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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이야기

나를 키운 질곡의 시절

 

나를 키운 질곡의 시절

 

 

 

부산고 합격. 촌놈인 나에겐 더 없는 영광이었지만, 선배도 없고 친구도 한명 없는 나에겐 질곡의 시작이기도 했다.

심한 열등감에 괴로웠고 급기야 내가 왜 부산고에 왔던가?” 후회하기 까지 했었다.

그때 나에게 구세주처럼 나타난 것이 석우라는 모임이었다.

24회 선배가 돌처럼 변하지 않는 우정을 간직하자는 취지로 모임을 만들었고, 우리가 4기다.

아침 버스안에서 2학년 선배로부터 수업 끝나고 보자는 말에 겁먹고 나갔었는데, 그것이 석우와의 인연이 되었다.

우리 기수회원은 김기석, 김경운, 김윤만, 김태진, 박철수, 박천대, 오수관, 윤한철. 대부분 대연동 쪽에 살았고,

좌석버스 39, 40번을 타고 통학을 했다. 대연동 못골 시장, 남천동 횟집에서 자주 어울렸다.

나는 그중 김경운, 박천대와 특히 잘 어울렸다.

 

 

 

 

 

 

 

1.방어진 울기등대

 

천대는 얼굴도 잘 생겼고 문예반장을 하고 있었기에 여고생들에게 인기도 많았다.

2학년 가을 우리 셋은 천대의 제의로 N여고 여학생의 고향인 울산 방어진에 12일로 놀러 갔다.

고래 갈비뼈 정문이 인상 깊은 방어진 중학교, 울기등대, 조개껍질처럼 침식된 아름다운 대왕바위와 해변을 구경하고

해질 무렵 지금 현대중공업 뒤편 일산해수욕장 남쪽 산기슭에 텐트를 쳤다.

마침 그녀가 생선회와 안주를 가져왔고, 아무도 없는 바닷가에서 기분좋게 소주병을 비우기 시작했다.

어둠이 내리자 어선의 집어등 불빛이 아름다웠다. 쉴새없이 들려오는 파도 소리, 파도에 힙쓸리는 자갈소리는 마음을 들뜨게 했다.

바닷가에서 마시니 술이 안취하네’. 분위기 좋은 곳에서 오랜만에 해방감에 기분좋게 취했다.

그런데 갑자기 밖에서 손들어, 암구호손을 들고 텐트 밖으로 나오니 해경 세명이 총을 겨누고 있었다. 술이 싹 깼다.

야간 출입금지 구역에 텐트를 치고 술까지 마시고 있는 까까머리에 교련복 입은 남학생 셋, 그기에다 여학생 까지 한명.

순찰병 형님들은 허허 웃었다. 우리는 별탈없이 그냥 쫓겨났다. 아마 그 형님들도 우리와 비슷한 경험을 했던지,

아니면 부산고를 알아 봤던지..

 

 

 

 

 

 

 

2. 에덴공원, 해운대, 광안리

 

3학년이 돼도 여전히 우리 셋은 공부에 열중하지 못했다. 그날도 월요시험이 끝나고 셋은 에덴공원으로 갔다.

민속주를 적당히 하고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맞은편에 P여고생 3. 능청스런 면이 있는 경운이가 작업을 걸었다.

그리고 그 후로 밤에 P여고를 찾아가기도 하다가 어느 초 여름날 토요일 저녁 해운대에서 만났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해수욕장 개장날이었고, 지도교사들이 백사장에 짝 깔려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동백섬 가기전 방파제로 피해 그녀들이 싸온 커피, 과자를 먹으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그리고 사건은 터지고 말았다. 시내로 들어가는 막차가 끊겨버렸다. 전혀 의도한 것도 아닌데... 당혹스러웠다.

해운대에서 잘 못 걸리면 큰 일 날 것 같아, 궁리 끝에 천대가 사는 광안리로 가기로 했다.

요즘 같으면 택시를 탔겠지만, 그런 생각은 못하고 수영을 지나 민략동 해안초소를 어렵게 지나

12시 넘어 광안리 해수욕장에 도착하여 빈 천막에 몸을 숨겼다.

그런데 천대가 찾은 숙소로 가다가 통금위반으로 붙잡혀 결국 바다파출소로 끌려갔다.

우선 화장실 간다고 핑계를 대고 아까운 담배를 변기에 벼렸다.

우리의 신분을 확인한 경찰관으로부터 명문고 다니는 학생들이 공부는 안하고 밤늦게 남녀가 뭉쳐 다니면 되겠냐? 고 세게 야단을 맞았다. 생전 처음으로 파출소에 하루밤을 보낼 수 밖에 없게 된 그녀들은 새파래졌고,

우리도 초조하고 당황스러웠다. 그런데 새벽 세시쯤 우리를 야단치신 경찰관이 우리 더러 파출소를 좀 지키라고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아마 그 경찰관도 부산고 뺏지를 단 우리를 믿었던 것 같다.

그 후 한 여학생은 금족령이 내렸고 그 뒤로 만나지 못했다.

 

 

 

3. 하동군 옥종면 북방 부락

 

3학년 마지막 여름 방학이 됐다. 하지만 방학은 며칠뿐, 나머지는 보충수업. 방학이 되자마자

석우 전체 단합대회를 서생 진화해수욕장에서 했다. 매년 하는 연례행사였다.

단합대회를 마치고 부산역에서 그녀들을 만나 또 다른 피서를 하기로 했다.

그런데 단합대회가 늦게 끝나, 약속시간 보다 늦게 부산역으로 갔고, 그녀들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할까?

이왕 이렇게 된 거 시골 우리집으로 놀려 가기로 하고 경전선 기차를 탔다. 그런데, 이것은 운명. 기차안에서 그녀들을 만난 것이다.

우리를 못 만난 그녀들도 그 중 한명의 고향인 하동으로 가는 중이었다.

우리는 용감 무모했다. 우리 5명은 시골 우리집으로 가기로 결정하고 같이 완사역에서 내렸다.

완사역에서 우리집까지는 4남짓, 지리산에서 발원한 덕천강변 길이다. 마침 석양이 물드는 초여름 풍경은 환상이었다.

강을 따라, 대나무 숲을 지나고, 배밭을 지나고, 나룻배를 건너 긴 여름해가 떨어진 후 시골 우리집에 도착했다.

우리집은 아연실색. 착한 범생인 줄 알았던 아들이 여학생을 더리고 왔으니..

잘 곳이 마땅치 않아 작은형님 집을 통째로 비워 줬다.

그런데 시골은 모기가 극성이라, 마루에 모기장을 치고 남녀 구분없이 한 모기장안에서 이틀을 잤다.

엉뚱하고 무모한 여름피서를 마치고 보충수업 이틀 늦게 학교로 가니 담임 선생님의 사랑의 뺨 세례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뒤로도 그녀들을 수차례 만났다. 그리고 9월 어느 일요일, 금정산성에 갔다.

대학시험은 점점 다가오고, 공부는 안 되고 불안은 점점 깊어갔다. 차라리 집 없이도 살아가는 집 없는 달팽이가 부러웠다.

산성으로 올라가는 중 점점 어색해졌고, 우리는 현명하게도 중턱에서 헤어졌다.

우리 셋은 산성에 가서 막걸리 한 되를 나눠 마시고 하산했다. 그날은 한국과 호주의 월드컵 예선전을 중계하는 날이었다.

그 뒤로 우리 셋도 떨어져 지내게 됐고 그녀들도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녀들의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다.

 

<윤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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