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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여행

개성 관광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 5시 50분, 종합운동장에서 개성관광 버스에 올랐다. 난생 처음 방문하는 북녘땅이라 묘한 기분이었다. 올림픽대로와 자유로를 거쳐 도라산 남측 출입괸리소에 7시 조금 지나 도착 했다.

절대로 지도자 동지의 건강에 관해서는 묻지마라. 허략된 장소 외에는 사진을 찍지마라. 신문이나 간행물은 가져가지 마라...  등등 북측에서 해서는 안될 주의사항을 교육받았다. 만약 어기면 벌금을 내야함은 물론 일행 모두 답사일정이 엉망이된다고 했다.

휴대폰을 맡기고 우리 일행은 1호차에 올랐다. 하지만 북측 군부로부터 입경허가가 떨어지지 않아 30분 이상을 다시 대기하다 우리측 인도차량을 따라 북으로 갔다. 북측의 통신시설이 낙후돼 동해안 금강산 통신망을 통해 허가가 오기 때문에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서울과 개성 갈림길. 여기서 차로 10분이면 개성 공단이고, 또다시 30분만 가면 개성 시내에 도착한다.  

북축출입관리소에서 또다시 입경수속을 밟았다. 북측 남성 안내원 3명이 탔다. 이중 나이 많은 사람만 안내를 했고, 나머지 두사람은 맨 뒷자리에서 우리를 감시하는 것 같았다.

 

 

평양가는 고속도로를 따라 먼저 박연폭포로 갔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북한 풍경은 을씨년스러웠다. 가을 걷이가 끝난 들판은 황량했다. 나무라곤 찾아보기 힘든 민둥산, 척박한 산중턱까지 개관해 만든 밭. 연탄 창고 같은 낡고 초라한 주택들. 사람들이 살지 않는, 저 일제시대를 배경으로하는 영화 촬영 세트장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성에 들어서니 송악산이 먼저 눈에 들어 왔다. 북측 안내원은 '만삭의 여인이 바다쪽으로 머리를 풀어헤치고 손을 가슴위에 가지런히 얹고서 누워있는 형상'이라 했다.

소나무가 많아 붙여진 송악산은, 소나무숲은 거의 사라지고 그 골격만 드려내고 있었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폭포물을 볼 수 없어 아쉬웠다. 개성도 가뭄이 심했다고 했다.

'박연'은 박같이 생긴 연못이란 뜻이고 폭포 바위에 박처럼 생긴 못에 고인 물이 떨어진다고 해서 붙어진 이름이 '박연폭포'다. 

 

황진이가 긴 머리를 물에 묻혀 용바위에 쓴 글씨.

비류직하 삼천척(飛流直下 三千尺)

의시은하 락구천(疑視銀河落九千)

1957년 8월 26일 김일성 주석이 방문하여 ' 경치 좋은 박연에 휴양소를 건설하여 근로자들의 놀이터로 만들라'고 한 유지를 찬양하는 거대한 화강암 비.

 

 개성의 자랑, 황진이나 서화담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황진이가 썼다는 용바위 안내판에도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 찬양 일색이다.  

황진이의 풍류도 서화담의 격물치지(格物致知) 학문의 흔적도 느낄 수는 없었다.

 인삼차 한잔 씩 하고 판매원 아가씨들과 촬깍. 공짜 사진촬영은 사절.

남성 안내원들의 여유.  

 

 안내원 외 북한 주민을 접촐할 수는 없었다. 우리가 탄 버스가 지나가는 길에도 군데군데 북한군이 배치돼 있었고, 개성 시내 답사중에는 아예 통행을 통제하고 있었다. 운행중인 차량은 볼 수 없었고, 인도에는 자전거 끌거나 걸어다는 사람은 제법 눈에 띄었다. 창창을 통해 손을 흔들어도 반응은 없고, 가끔 호기심 많은 아이들만 답례를 했다.    

 민속마을. 한옥 기와집이 잘 보존 돼 있고, 개울도 잘 정비돼 있고 물도 맑았다. 집안을 볼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감나무에는 주황색 잘 익은 감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고, 다리도 그런대로 운치가 있었다. 

 

백송식당에서 11첩 반상 점심을 했다. 육류는 튀김 조금, 모두 채소류였다.

 

 

 

 

 포은 정몽주 선생의 생가터에 세워진 숭양서원. 포은 선생, 서경덕 선생 .... 위패가 모서져 있다.

 

이번 답사길에 동행한 고대문화예술과정 5기 원우들. 나는 빠졌네.

 

 포은 선생이 말을 타고 내릴 때 썼던 디딤돌

 

 

송덕비와 불망비

 

 

 

선죽교, 좁은 돌다리. 조선 시대 포은선생의 후손이 사람들이 막 밟고 다니느 것을 안타깝게 여겨 돌 난간을 설치하고 옆에 통행로를 만들었다. 여기서 엄청난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돌다리위의 붉은 흔적은 포은 선생의 흘린 핏자욱이란다.    

 

 

유적 설명하는 북측 여인. 거목으로 자란 메타세콰이어 아랫둥치. 

 

고려 성균관. 고려시대의 대학교육기관이었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고려시대 도자기, 특히 국보급 고려청자가 보관돼 있어었고, 공민왕릉의 석실이 실물 크기로 재현돼 있었다.   

 

 

 

 

 

 

 

 

 

 

 

 

 

 

 

 

 

 헌화사비석, 헌화사 7층 탑, 불일사 5층탑, 개국사 석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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