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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통신

조선 선비들의 지리산 유람-<崔錫起>교수님의 달궁 강연 원고


 

작성일 : 09-09-14 21:54
          
 글쓴이 : 꼭대
조회 : 3,601  
[제6회 달궁모임]에서 <최석기>교수님께서 강연해주신 원고를 아래와 같이 올립니다.
참석하지 못하신 분들 참고하시기 바라며,
참석하신 분들께서도 좋은 말씀 되새겨보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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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22 19시 지리산 아흔아홉골 달궁 모임

조선 선비들의 지리산 유람
崔 錫 起(경상대 한문학과 교수)



1. 조선 선비들이 지리산을 찾은 이유?

1) 孔子가 泰山에 올라 천하를 작게 여긴[登泰山小天下] 것을 본받아 정신세계를 높게 지향하기 위함. 胸襟을 펴고 정신을 상쾌하게 하며 시야를 확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함. 높은 정신적 志向. 天王峯에 오르는 것을 목표. 김종직의 유람록에 보이는 것처럼 천왕봉에서 해돋이를 구경하고 사방을 조망한 뒤 ‘가슴속이 탁 트이고 시야가 넓어짐을 느낀다’는 정신적 상쾌함을 드러낸 경우가 많다.

2) 靑鶴洞・三神洞 등 仙界에서 노닐며 탈속적 정취를 즐기기 위함. 이상과 현실이 괴리되었을 때 불화를 달래기 위한 수단으로 흉금을 蕩滌하여 속세의 티끌을 씻어내는 것을 목적으로 함. 탈속적 仙趣를 지향. 청학동․삼신동을 찾는 것을 목표. 현실에서의 불평한 심경을 해소하기 위해 유람한 경우가 많다. 예컨대 성여신은 현실에서의 불화가 극에 달하자 ‘신선을 배우는 사람이 되겠다’고 읊조리며 眞仙을 찾아 仙遊를 하였다. 花開洞天에는 三神洞․靑鶴洞이 있다. 이곳에는 우리나라 仙家의 鼻祖인 崔致遠과 관련된 유적과 전설이 많다. 신라 말 난세에 不遇하여 지리산에 들어와 신선이 되었다는 최치원은 ‘崔仙’ 또는 ‘儒仙’으로 불리며 후대 불우한 지식인의 정신적 귀의처가 되었다. 성여신은 극대화된 불화를 달랠 길이 없자 佛日庵에 올라 ‘孤雲을 부름이여, 眞訣을 묻노라’라고 읊조렸으며, 金之伯은 화개동천을 최치원이 노닐고 청학이 살던 신선세계로 인식하였다. 이들은 모두 최치원을 신선으로 여기며, 그 세계에 들어가길 원했다.


2. 조선 선비들은 지리산을 오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1) 자신의 心性을 돌아보다

조선시대는 성리학이 발달한 시기다. 특히 16세기 이황․조식 등에 이르러 성리학이 활짝 꽃을 피운다. 이황과 조식은 학문하는 방법이 서로 달랐는데, 조식은 “진리탐구는 송나라 때 현인들이 대강을 밝혀 놓았기 때문에 더 이상의 탐구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고서, ‘이미 밝혀진 진리를 가지고 자신의 心性을 어떻게 修養할 것인가’하는 修養論에 초점을 맞추어 공부를 했다. 그리하여 그는 마음이 動하기 이전의 涵養, 마음이 동하고 난 뒤의 省察, 마음에서 일어나는 사욕을 곧바로 물리치는 克治의 삼단계 수양론을 공부의 핵심으로 파악하고, 함양에는 敬을, 성찰에는 義을 척도로 삼았다.

이처럼 수양론을 통해 자신을 바르게 세우고, 그를 통해 사회의 기강과 도덕을 부지하는 것을 임무로 여겼다. 이런 생각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던 조식은 유람을 하면서도 자아에 대한 성찰을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그는 佛日瀑布를 유람할 때, 가파른 비탈길을 오르고 내리면서 느낀 감회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당초 위쪽으로 오를 적에는 한 발자국을 내디디면 다시 한 발자국을 내딛기가 어렵더니, 아래쪽으로 달려 내려올 때에는 단지 발만 들어도 몸이 저절로 흘러 내려가는 형세였다. 이것이 어찌 선을 좇는 것은 산을 오르는 것과 같고, 악을 좇는 것은 무너져 내리는 것과 같은 일이 아니겠는가?

조식은 산을 오르고 내리면서 한 순간 마음을 단속하지 않으면 악으로 빠지기 쉽다는 것을 새삼 느낀 것이다. ‘선을 따르기가 산을 오르는 것처럼 어렵다[從善如登山]’는 말은 ?國語?에 나오는 말인데, 이를 심성수양의 도구로 삼은 것이다. 뒤에 이황은 조식의 「유두류록」을 보고 ‘정신이 번쩍 들게 하였다’고 칭찬하였다.


2) 자신의 本分을 돌아보다

조선 士人들이 지리산을 유람하면서 잠시 신선세계에 몰입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본분을 저버리지 않고 곧 士意識을 되찾는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경우가 조식의 문인 成汝信에게서 나타난다. 성여신은 出仕를 하지 못한 불우에다 당시 집권층과 노선을 달리 함으로써 불화가 극대화되어 선계를 유람하며 신선이 되고 싶어 한다.

성여신은 士의 본분을 獨善其身이 아닌 經世濟民과 兼善天下로 규정하고 있다. ?맹자?에 “곤궁하면 자신만 선하게 하고, 현달하면 천하 사람들과 선을 함께 한다.”고 하였는데, 성여신은 이를 보다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士의 이상과 포부를 드러냈다. 그리하여 뜻을 얻지 못한 士일지라도 현실에 등을 돌리고 산 속에 들어가 신선이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래서 그의 仙遊는 명목만 선유였을 뿐 실제로는 仙이 아니었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3) 역사를 회고하며 현실을 돌아보다

조선 사인들의 유산기에는 역사 유적지에서 옛날을 돌아보며 역사를 회고하는 기록이 자주 등장한다. 김종직은 영신봉에서 쌍계사 방면을 바라보며 신라시대 최치원의 불우를 탄식했고, 고려시대 李仁老가 청학동을 끝내 찾지 못한 일을 떠올렸으며, 조선시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李克均이 지리산에 숨은 도적 張永己와 싸웠던 역사적 사실을 회상하였다. 또한 그는 천왕봉 성모상과 영신사 가섭상에 난 흠집이 ‘고려 말 荒山에서 이성계에게 패한 왜구가 달아나면서 낸 칼자국’이라는 말을 듣고서, 왜구의 잔혹함에 치를 떨기도 하였다.

남효온은 칠불사에서 玉寶高의 전설을 접하고 그 내용을 기록해 놓았고, 화엄사에서 四獅子三層石塔에 얽힌 설화를 듣고 상세히 기록해 놓았으며, 쌍계사에서 최치원과 관련된 일화를 역시 상세히 기록해 놓았다.
김일손은 단속사 입구에 있는 최치원 글씨라고 전하는 ‘廣濟嵒門’, 단속사 경내의 최치원이 머물던 致遠堂, 절에 보관하고 있던 고문서, 고려 학사 權適이 지은 五臺山水精寺記, 영신사에 걸린 匪懈堂이 그린 가섭상, 신흥사에서 들은 신선 최치원, 쌍계사 최치원 유적 등을 상세히 기록해 놓았다.

양대박은 운봉 荒山 碑殿에서 고려 말의 왜구 침입과 이성계의 공적을 떠올렸고, 하동바위에 이르러서 하동군수가 천왕봉에 오르다가 이곳에 이르러 힘이 다해 통곡했다는 말을 듣고서 비루하게 여겼다.
이런 경우는 역사를 회고하는 데에서 그친 경우로, 논평이 없어 작가의 의식을 살필 수 없다. 그러나 간혹 논평을 곁들인 경우도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쌍계사에서 최치원의 유적을 만나 인물이나 글씨에 대해 평을 남긴 것이다. 조선 사인들이 쌍계사를 유람하게 되면 최치원이라는 인물을 만나게 된다. 최치원은 유학자지만 만년에 佛家와 仙家에 몸을 의탁하였고, 신선과 관련된 수많은 전설을 남긴 인물이다. 특히 지리산 쌍계사․청학동․삼신동 등지에는 그가 신선이 되어 살아있다는 전설이 후대까지 전해졌다.

남효온은 쌍계사의 眞鑑禪師碑를 보고서 ‘최치원이 그의 도를 칭찬한 것이 너무 심하다’고 비판하였다. 김일손은 최치원에 대해 조선시대에 태어났더라면 나라를 빛낼 문필을 잡고 태평성대를 노래했을 것이며 자신은 그의 문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칭송하였지만, 처신에 대해서는 선사와 부처를 위해 글짓기를 좋아하였다고 은근히 비난하였다.

李滉은 쌍계사를 유람하지 않았지만, 최치원에 대해 부처에 아첨한 사람으로 폄하해 문묘종사가 불가하다고 하였다. 이는 16세기 도학자의 시각으로 최치원을 평한 것이다. 그러나 쌍계사를 유람한 대부분의 사인들은 최치원의 不遇에 초점을 맞추어 不幸으로 평하며 儒仙으로 보았다.

남효온․김일손도 이런 시각을 갖고 있다.
유람 도중 유적을 만나 역사를 회고하는 것은 유람록에 흔히 나타나는데, 감회에 젖는다는 내용이 대부분이고, 뚜렷한 의식을 드러내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런데 曺植은 특별한 역사의식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그는 유람을 하면서 산수의 아름다움을 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산수에 남아 있는 흔적을 통해 역사를 회고하며 그 사람을 생각하고 세상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하동 악양에서 고려시대 이곳에 은거한 韓惟漢을 생각했고, 화개를 지나면서 그곳에 은거했던 鄭汝昌을 떠올렸으며, 옥종 정수역을 지나면서 그곳에 살았던 趙之瑞를 생각했다.

조식은 한유한․정여창․조지서를 ‘君子’로 지칭하며 “높은 산과 큰 내를 보고 오면서 얻은 바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유한・정여창・조지서 세 군자를 높은 산과 큰 내에 비교한다면, 십 층이나 되는 높은 봉우리 끝에 옥을 하나 더 올려놓고, 천 이랑이나 되는 넓은 수면에 달이 하나 비치는 격이다.”라고 하여, 산수를 구경하는 것보다 그 속에서 떳떳하게 살았던 사람을 만나게 된 것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는 ‘군자’를 ‘높은 산 위의 옥’이나 ‘넓은 수면 위의 달’과 같은 존재로 보았다. 결국 산수의 아름다움보다 향기 나는 군자의 아름다움에 더 큰 의의를 둔 것이다.

이런 그의 유람관을 한 마디로 말하면 ‘看山看水 看人看世’라 할 수 있다. 곧 산과 물을 구경하며 답답함을 푸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산수 속에 깃들인 역사를 회고하며 그 시대의 인간과 사회를 생각하는 것이다. 이처럼 산수에 남아 있는 역사적 유적을 통해 옛 사람을 그리워하고, 그들의 불우를 안타까워하고, 그 시대의 사회상을 회고하는 것이 조선 사인들의 유산기에 나타나는 또 하나의 사의식이다.


4) 佛敎와 巫俗 등의 惑世誣民을 비판하다

조선시대는 사대부정치 시대이다. 사대부들은 성리학으로 정신적 무장을 하여, 불교․무속으로 타락한 사회풍상을 쇄신하려 하였다. 士人들은 기본적으로 이런 이념을 가지고 있었기에 불교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특히 조선전기 사림파는 훈구파보다 도덕적 실천에 대한 인식이 각별했고, 16세기 도학자들은 정체성을 더욱 선명히 하여 崇正學 闢異端의 기치를 높이 내걸었다. 이들에게서 불교와 무속에 대한 비판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우선 巫俗에 대해 살펴보자. 천왕봉 聖母에 대해 유람인들은 어떤 의식을 보이고 있을까? 김종직은 천왕봉에 올라 날씨가 불순해서 사방을 조망할 수 없게 되자, 성모에게 술을 따르고 祭文을 지어 告由했다. 그는 성모를 석가의 어머니인 摩耶夫人으로 보는 속설을 부정하고, 李承休의 ?帝王韻紀?에 나오는 설을 인용해 고려 태조의 어머니인 威肅王后로 보았다. 그러나 그는 이 설에 대해서도 고려 사람들이 자기 나라 임금의 계통을 신성시하기 위해 지어낸 것이라 여겨 신빙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날이 개이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 성모에게 제사를 지냈다.

반면 그의 문인 김일손과 정여창은 제사를 지내는 문제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보인다. 김일손은 당나라 때 韓愈가 衡山의 신에게 날씨의 쾌청을 빈 고사를 인용하며 성모에게 기도하려고 제문까지 지었다. 그때 정여창은 “세상 사람들은 모두 마야부인이라 하는데 그대는 위숙왕후라고 확신하니, 세상 사람들의 의심을 면치 못할까 두렵다.”라고 하면서 제사를 말렸다. 그러자 김일손은 “명산대천의 신에게 제사지내는 예를 따라 산신령으로 보면 되지 않는가?”라고 반문을 하였고, 정여창은 “국가에서 산신령에게 제사하지 않고 聖母나 迦葉에게 기우제를 지내는데 그대가 성모를 산신령으로 여겨 제사지내면 국법에 어긋난다.”고 반론을 폈다. 이에 김일손도 어쩔 수 없어 제사를 그만두고 말았다.

여기서 김종직․김일손과 정여창의 사의식이 확연히 다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김종직과 김일손은 성모에게 제사지내는 것에 대해 별다른 의식이 없었던 반면, 정여창은 유학자로서의 본분에 따른 인식을 분명히 하고 있다. 후대 사람들 중에는 김종직이 성모에게 제사한 것을 흠으로 여기며 儒者로서의 사의식이 부족했음을 지적하는 사람이 있다.

다음은 불교에 대한 비판의식을 살펴보기로 한다. 김종직은 천왕봉의 성모가 석가의 어머니 마야부인이라고 하는 설에 대해, ‘인도는 우리나라에서 수만 리나 떨어진 곳인데 어떻게 이곳까지 올 수 있겠는가’라는 관점에서 믿을 수 없는 설이라고 일축해 버린다. 또 영신암 뒤의 伽葉像 오른팔에 불에 탄 듯한 흉터가 있는 것을 두고, 승려들이 ‘劫火에 탄 것으로 조금 더 타면 미륵세상이 온다’고 하자, ‘돌에 난 흔적이 본래 그런 것’이라고 하며, ‘황당하고 괴이한 혹세무민하는 말’이라고 가증스럽게 여겼다. 이런 것들을 보면, 김종직은 불교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남효온도 가섭상에 대해, 세속에서 영험이 있다고 하는 말을 부정하며 하나의 돌덩이일 뿐이라고 하였다. 또 의신사에서 義神祖師의 설화를 듣고 허풍이 심하다고 하였으며, 화엄사를 유람하면서 송나라 仁宗이 황후를 위해 極輪寺를 지었다는 승려가 들려준 창건설화에 대해서도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고 일축해 버렸다. 또 승려들과 대화를 하면서 느낀 소감을 ‘허무맹랑한 말을 마구 하면서 윤회설을 고집하였다’고 하였다. 이를 보면 그가 승려들과 禪에 대해 토론을 하기도 하였지만, 유자로서의 사의식은 변치 않고 있으며, 불교와 승려들에 대해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김일손은 香積寺에서 절을 중건하기 위해 쌓아 둔 목재를 보고 “백성들이 邪敎에 탐닉하는 것이 우리들이 正道를 믿는 것과 다르구나.”라고 탄식한 것을 보면, 그 역시 불교를 사교로 보고 유교를 정도로 보는 인식이 확고하다. 그러나 도학군자로 이름 난 정여창이 사의식을 선명히 하여 행사에 근신한 것에 비하면, 김종직․김일손은 정여창에 비해 유자로서의 정체성 확립에 분명치 못한 점이 발견된다.

17세기 조식의 문인 成汝信은 22세 때 단속사에서 ?三家龜鑑?을 出刊하면서 儒家를 맨 뒤에 둔 것에 분개하여 冊版을 불사르는 과격한 행동을 보였고, 조식의 재전문인 朴汝樑도 유생으로서 승려가 된 사람을 보고 ‘성씨를 버리고 집안을 돌보지 않으니 매우 미혹된 자들이다’라고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처럼 16세기 사화를 거치면서 사의식이 본명해진 사인들에게서는 불교를 배척하는 경향은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조식의 경우는 박학하고 개방적인 학문을 추구하여 불교를 신랄하게 비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역시 실천을 위주로 하는 도학자였기 때문에 불교는 實地가 없다고 비판하였다.


5) 백성들의 고통을 걱정하다

다음은 이 시기 사인들이 지리산을 유람하면서 백성들이나 승려들이 賦役에 시달리고 貢物을 헌납하기 위해 苦役을 하고 있는 참상을 목격하고서, 경세제민의 이상을 드러내고 있는 점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조선시대 사인들은 사화와 당쟁의 와중에서 출사를 포기하고 초야에서 학문에 전념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들이 현실을 외면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불합리한 현실을 보면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였다. 때로 불우낙척한 사인들이 갈등이 없는 선계를 그리워하기도 하였지만, 士의 본분을 잊지 않고 본연의 자세로 돌아왔다.

김종직은 유람을 하다가 나무에 잣이 많이 달리지 않은 것을 보고서 백성들이 貢物로 바칠 수량을 걱정하였으며, 산등성이에 움막을 지어 놓고 매를 사냥하는 사람들의 참혹한 실상을 보고서 노리갯감으로 충당하기 위해 밤낮으로 눈보라를 맞으며 고생하게 한다고 애민정신을 드러냈다.

김일손은 쌍계사 승려들이 공물에 시달리는 것을 목격하고 “오대산의 주민들이 里正의 포학에 시달린다고 들었는데, 상계사의 승려들도 물고기 잡는 물건을 관아에 바쳐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산 속에 사는 것도 편치 못하구나.”라고 하여, 민생의 괴로움을 통탄하며 정치력의 부재를 비판했다. 또 그는 坐方寺에 들렀을 때 깊숙한 골짜기까지 들어와 농지를 개간하는 사람들을 보고서 “백성들의 생활을 넉넉하게 하고 그들을 교화시킬 방도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라고 경세제민의 의식을 드러냈으며, 산간의 주민들이 잣・밤 등의 공물을 충당할 수 없어 다른 지역에 가서 사다가 관청에 내는 폐단을 목격하고서 우려를 금치 못하였다.

조식은 민생의 피폐함을 집권층의 부패에 있다고 보아 쇄신할 것을 국왕에게 강력히 상소하기도 하였는데, 그런 의식이 그의 유람록에도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쌍계사를 유람하면서 “이곳은 인가가 드물듯한데 이곳까지 관청의 부역이 미쳐, 식량을 싸들고 부역하러 오가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주민들이 부역에 시달리다 보니, 모두 흩어져 떠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절의 승려가 나에게 청하기를, 고을 牧使에게 부역을 조금 줄여 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써 달라고 하였다. 그들이 하소연할 데가 없음을 안타깝게 생각해서 편지를 써주었다. 산에 사는 승려의 형편도 이러하니, 산골 백성들의 사정을 알 수 있겠다. 政事는 번거롭고 세금은 과중하니,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져 아버지와 자식이 함께 살지 못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양대박의 경우에도 비슷한 의식이 보인다. 그는 君子寺에 이르러 절이 무너지고 경내가 적막한 것을 보고 승려에게 묻자, 그 절의 승려는 사대부들 유람시중을 들고 관청의 부역에 시달리다 보니 중들이 뿔뿔이 흩어져 거의 폐사가 되었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듣고 양대박은 “아! 가혹한 정치의 폐단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가? 산 속에 걸식하는 승려들도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부역에 시달리니, 살을 깎는 듯한 고통은 금수라도 면치 못할 것이다.”라고 하며 탄식하였다. 양대박이 유람한 때는 사림정치가 이루어진 시대였는데도 민생의 삶은 여전히 나아지지 않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6) 외적의 침입을 걱정하다

조식은 쌍계사를 유람하고 돌아오는 길에 岳陽에서 三呵息峴을 경유했는데, 고개에 올라 “가장 높이 솟아 있는 것은 남해의 끝에 있는 산이고, 정동쪽에 파도가 연이어 물결치는 듯한 것은 하동과 곤양의 산들이다. 또한 동쪽에 먹구름처럼 아득히 하늘 높이 솟아 있는 것은 泗川 臥龍山이다. 그 사이에 마치 혈맥이 뒤엉켜 있는 듯한 것은 강과 포구가 서로 이어진 것이었다. 우리나라 산과 강의 견고함은 魏나라가 보배로 여긴 정도를 넘어, 넓은 바다에 접해 있고 100雉의 성에 웅거해 있다. 그런데도 오히려 백성들은 보잘 것 없는 섬 오랑캐에게 거듭 곤란을 당하고 있으니, 어찌 그 옛날 길쌈하던 과부의 근심을 하지 않겠는가.”라고 탄식하였다.

조식은 지리산 줄기가 남해로 뻗어 이리저리 얽혀서 保障의 형세를 이루고 있는 점에 주목하며, 여러 차례 왜구의 침입으로 연안의 백성들이 피해를 당하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그는 상소문에서도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지 못하는 현실과 대책을 진달하였다.


3. 조선 선비들은 지리산을 어떻게 인식했을까?

조선시대 지식인들은 대부분 지리산을 ‘智異山’으로 부르지 않고 ‘頭流山’이라 불렀다. 그것은 우리 강토 남단에 우뚝하게 솟은 지리산을 白頭山으로부터 뻗어 내린 산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아래 자료를 보면, 우리 조상들이 지리산에 대해 얼마만큼 자긍심을 갖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① 아, 두류산은 숭고하고도 빼어나다. 중국에 있었다면 반드시 嵩山이나 垈山보다 먼저 천자가 올라가 封禪을 하고, 玉牒의 글을 봉하여 상제에게 올렸을 것이다.【金宗直, ?佔畢齋集? 권8 「遊頭流錄】

② 문장에 비유하면 屈原의 글은 애처롭고, 李斯의 글은 웅장하고, 賈誼의 글은 분명하고, 司馬相如의 글은 풍부하고, 子雲의 글은 현묘한데, 司馬遷의 글이 이를 모두 겸비한 것과 같다. 또한 孟浩然의 시는 고상하고, 韋應物의 시는 전아하고, 王摩詰의 시는 공교롭고, 賈島의 시는 청아하고, 皮日休의 시는 까다롭고, 李商隱의 시는 기이한데, 杜子美의 시가 이를 모두 종합한 것과 같다.【柳夢寅, ?於于集? 後集 권6 「遊頭流山錄」】

③ 지리산은 우리나라의 첫 번째 산일 뿐만 아니라, 천하의 아무리 큰산일지라도 이 산과 대등할 만한 산은 없을 것이다. 만약 孔子께서 이 산에 오르셨다면 천하가 크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宋光淵, ?泛虛亭集? 권7 「頭流錄」】

金宗直(1431-1492)은 중국의 숭산이나 태산보다 두류산이 더 낫다는 인식을 하였고, 南孝溫은 지리산을 帝王․聖人에 비유하였다. 柳夢寅(1559-1623)은 지리산을 동아시아 문학의 최고봉인 시에 있어서의 杜甫, 산문에 있어서의 司馬遷에 비유하였으며, 宋光淵(1638-1695)은 이 세상에서 두류산과 비견할 산이 없다고 하였다. 실로 대단한 자긍심이 아닐 수 없다.
왜 그럴까? 우리 것이 최고라는 막연한 의식이 아니라, 백두산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과 국토의 근원을 생각하고 말한 것이다. 지리산은 이처럼 조선시대 지식인들에게 민족 강토에 대한 자긍심을 갖게 하는 靈山이었다. 그리하여 이 산을 유람하는 것을 평생소원으로 생각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문인․학자들이 이 산을 유람하여 수십 편의 유람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처럼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은 단순한 산행이 아니라, 자신과 사회와 국토에 대한 종합적 성찰의 기회를 갖는 여행이었다.


4. 지리산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지리산에는 크게 세 가지 이름이 있다. 하나는 智異山인데, 순수한 우리말에서 나온 것으로 그 어원에 정설이 없다. 다른 하나는 頭流山인데,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국토 남단에 크게 서린 산을 의미한다. 나머지 하나는 方丈山인데, 중국 고대 설화에 나오는 바다 건너 신선이 사는 삼신산의 하나이다.

이 가운데 지리산이 가장 오래전부터 쓰였지만, 조선시대 지식인들은 지리산이나 방장산보다 두류산이라는 말을 즐겨 썼다. 그 이유는 백두에서 뻗어 내린 그 맥, 즉 우리 민족 강토에 대한 뼈대를 인식했기 때문이다. 실학자 성호 이익은 소백산 밑에서는 이황이 태어났고, 지리산 동쪽에서는 조식이 태어났다고 하여, 큰 산 밑에서 큰 인물이 태어난 것을 거론하였다.

이를 통해 볼 때, 백두에서 뻗어 내려 국토 남단의 중심에 위치한 산으로서의 지리산을 우리는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것으로 우리의 정체성을 삼아야 한다. 특히 교육적으로도, 지방학적으로도 중요한 문제이다.

지리산은 우리 민족사와 함께 해 온 다양한 역사와 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산이며, 오늘날의 최대 관심사인 생태의 보고이기도 하다. 이 외에도 우리는 역사 속에서 지리산의 의미를 아래와 같이 새롭게 인식할 수 있다.

첫째, 지리산은 소통의 산이다. 지리산은 고대의 국경지대로서 완충지대 역할을 하며, 교역의 장소이고 만남의 장소였다. 이런 의미에서 지리산은 삼한시대, 삼국시대 이전에는 소통의 장소였다.

둘째, 지리산은 융합의 산이다. 지리산은 망한 나라의 임금이 깃든 곳, 신분이 천한 사람들이 숨어 산 곳, 죄를 짓고 도망친 사람이 숨은 곳, 빨치산이 깃들어 저항한 곳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지리산은 모든 것을 포용해주는 仁의 덕을 가진 산이다. 지리산은 옛날부터 모든 생명체를 다 품어주는 융합의 산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추구할 가치도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갈등과 분열과 대결을 극복하여 사회 구성원이 하나가 되는 대동세계를 만들어야 한다.

셋째, 지리산은 불화를 해소시켜 주는 장소이다. 청학동은 신선이 타고 다닌다는 청학이 사는 곳으로 신선세계이다. 신선이 사는 세상은 인간이 사는 현실처럼 갈등과 고통이 없는 곳으로, 무릉도원이나 유토피아에 해당한다. 화개동 안에 삼신동이 있고, 신(神) 자가 들어가 영신사, 의신사, 신흥사 등이 있고, 쌍계사 뒤편에는 청학이 살았다는 청학동이 있다. 현실세계에서 치유할 수 없는 불화가 극에 달할 때 사람들은 신선세계인 청학동을 찾았다. 그리하여 그곳에서 무한한 우주 공간으로 잠시 날아가는 꿈을 꾸기도 하고, 고요한 대자연의 품에서 현실세계의 부질없음을 깨닫기도 하였다. 그래서 청학동은 휴식의 공간이고, 자신을 정화하는 공간이었다. 이런 곳은 오늘날처럼 급박한 사회에서 더없이 필요하다.

넷째, 지리산은 유학자들의 정신적 지주가 된 산이다. 천왕봉은 지리산의 주봉으로 하늘에 닿아 있는 봉우리다. 조선시대 남명 조식 같은 도학자는 이 천왕봉을 우러르며 자신의 정신을 하늘에 닿은 천왕봉처럼 드높이려 하였다. 유교에서는 인간이 자신을 갈고 닦아 하늘의 도에 합하는 것을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본다. 이를 天人合一이라 하는데, 이를 실천한 사람이 바로 천왕봉을 도반으로 삼아 수행한 남명 조식이다.
지리산에 무슨 문화가 있느냐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지리산만큼 복합적인 문화가 깃들어 있는 산도 드물다. 중국의 명산을 보면, 도교나 불교의 성지로서 하나의 특정한 문화가 주를 이룬다. 태산의 도교문화, 오대산의 불교문화가 그렇다. 그런데 지리산은 그 모든 것을 다 포용하고 다양한 가치를 융합하고 있다. 불교, 유교, 도교, 민속, 산악신앙 등등. 여기에 지리산의 매력이 있다. 모든 생명을 다 끌어안으면서도 그 속에는 조식 같은 대학자가 은거한 덕산동이 있고, 또 최치원처럼 신선들이 사는 청학동 같은 세계도 있고, 성모를 모시는 무속인들이 살던 공간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지리산은 조식처럼 자신의 도덕성을 드높게 하고서 현실을 비판할 줄 아는 지식인이 살던 곳이고, 대동과 융합을 지향하는 이상사회를 꿈꾸던 사람들의 정신적 귀의처였으며, 현실의 어려움을 해소시켜 달라고 기도하는 기도처였다. 오늘날 우리가 배워야 할 가치가 바로 이런 데에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