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조식이 지리산을 열두 번 오른 이유는? -2 궁궐 과 왕릉 속으로
4. 마지막 은둔처, 산천재 (山川齋)! 지리산 같은 높은 정신을 세상에 전하고자!~
남명의 열두번째 유람에는 또 하나의 목적이 있었는데 바로 노년을 보낼 장소를 물색하는 일이었다.
"나름대로 평생의 계획을 가지고 오직 화산의 한 모퉁이를 빌어 인생을 마칠 장소로 삼으려 했으나
일이 마음과 어긋나 머무를 수 없음을 알고 배회하고 돌아오며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 - 유두류록, 조식
이때 남명의 나이는 막 예순에 접어들고 있었다. 남명은 지리산에 은둔하며 자신의 남은 생을 정리하고 싶었던 것이다.
"남명 선생은 어차피 정권에 항거해서 될 일이 아니니까, 우리나라 남쪽에서 제일 큰 천왕봉이 내려다보이는 쪽에 은거를 하시면서, 하늘과 닿아있는 천왕봉처럼 큰 정신 세계, 큰 도덕, 큰 학문을 이루어 세상에 전해주고, 세상을 크게 울려주고 싶어 하셨던 것 같습니다." - 최석기 교수
남명은 예순 한살에 합천의 집과 재산을 동생에게 맡기고 천왕봉이 한눈에 보이는 덕산의 산천재에 자릴 잡는다.
그리고 지리산을 스승으로 삼아 자신의 도덕과 학문을 더욱 높이고, 현실에 대한 비판을 꾸준히 전개한다.
5. 청학동!~ 지리산속 이상세계를 찾아서!~
"남명은 성리학 이외에 아주 다양한 학문과 사상을 포용한 학자였습니다.
심신을 단련하고 현실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된다면 어떤 사상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특히 남명은 심성을 수양한다는 차원에서 도가 사상도 수용을 했는데요, 남명의 주변에서 그 모습을 찾는 건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산천재에서 '산천(山天)'은 단지 산과 하늘의 의미가 아니라 주역에 나오는 '대축(大畜) 괘'를 말합니다.
이 '대축 괘'는 '아주 깊이 은거해서 아주 큰 덕을 이루겠다'는 뜻입니다.
또 남명이 13년을 살았던 '뇌룡정(雷龍亭)'의 당호 역시 장자 <재유>편에서 찾은 문구인데요,
'연못속에 묵묵히 잠겨있다가, 덕이 우러나오면 우뢰와 같은 소리를 내고 용처럼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조선 시대 산수유람은 도가 사상의 영향을 받아서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천왕봉을 찾아온 선비들은 반드시 청학동을 찾아나섰습니다.
청학동은 지리산의 어딘가에 숨어있다는 우리 민족의 유토피아 중 하나인데 도가의 신선 사상과 연관이 있습니다.
지금 보시는 이것은 언제,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청학동(靑鶴洞)이 갖추어야 할 조건을 아주 소상하게 그려놓고 있습니다.
"청학동은 지리산 남쪽 어딘가에 숨어있는데 그곳에는 내성문이 있고, 또 외성문이 있으며 좁은 계곡을 거슬러 폭포를 지나면 넓은 땅이 나오는데 그곳이 바로 청학동이다."
숱한 사람들이 이런 비결을 가지고 청학동을 찾아나섰습니다. 남명 선생 역시 유두류록에서 청학동을 찾아나섭니다. 과연 남명은 청학동에서 무엇을 보았을까요?"
지리산에서 청학동을 찾아보기로 했다.
현재 일반인에게 청학동으로 알려진 마을은 하동 청암면 묵계리 학동마을이다.
과연 이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이곳을 전설의 유토피아 청학동이라고 알 수 있는 것일까?
학동 마을이 세간에 알려진 것은 6.25 전쟁 직후, 정감록을 믿는 종교 집단이 들어와 살면서부터다.
이 마을의 촌장인 서계용 할아버지는 여기가 바로 청학동이라고 주장한다. 청학동이 아닌 학동이라는 행정 명칭도 잘못된 것이라고 했다.
이곳이 청학동으로 알려진 것은 지난 73년 7월 26일자 경남일보. 진주의 향토사가들이 현지를 답사하면서부터다. 각종 문헌을 근거로 찾아보니 지금의 학동 마을이 청학동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구체적인 증거를 대며 청학동이라고 주장하는 주민도 있었다.
고조부때부터 이곳에 살고 있는 김삼주씨. 그는 이곳이 청학동이라는 근거로 정감록과 각종 청학동 비결들을 제시했다.
"거의 대동소이 합니다. 여기 천왕봉이 있지요. 반야봉이 있지요. 영심대에서 산맥이 흘려나와서 학형을 만들어요..."
"다른 것도 보면 거의 일치합니다. 여기 천왕봉, 여기 반야봉, 그리고..."
그런데 김씨가 소재하고 있는 비결을 보고서야 취재진은 청학동이 한 곳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문을 가졌다.
십여 점의 비결들과 고서들의 청학동의 조건을 종합해보았다.
청학동은 진주에서 서쪽으로 147리 떨어져 있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풀밭(옥토)가 40리 갖추고 있으며, 백운삼봉이 한 눈에 들어오고, 그곳엔 청학이 서식한다는 것이다.
'제왕, 충신, 달사 등 빼어난 인재가 대대로 이어 나고 누구나 부귀공명이 수를 헤아릴 수 없고 가장 오래 사는 노인은 156세까지 살고 36성이 들어와 사는 이상향' - 무학선사, <무학도결>
지리산에서 처음으로 이상향을 찾은 사람은 신라의 최치원이다.
화개동천엔 최치원의 흔적이 남아있다. 그가 꽂은 지팡이가 자라났다는 천 년을 넘은 푸조나무가 그것이다.
최치원은 화개동천의 절경을 자기 나름의 이상향으로 삼고 그 인근의 삼신동(三神洞)에서 은둔 생활을 했지만 그 스스로 청학동이란 개념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런 청학동을 본격적으로 찾아나선 사람은 고려의 이인로다.
무신정권하에서 참담한 벼슬살이를 경험한 이인로는 세상과 인연을 끊고 은둔할 곳으로 청학동을 찾지만 결국은 발견하지 못했다.
이인로를 이어 수많은 사람들이 비결을 찾아나섰다.
지리산 일대에 또 다른 청학동 후보지는 세석고원이다.
세석 입구의 석문(石門)
세석고원으로 들어서는 입구에 거대한 석문이 우뚝 서 있다. 두 개의 거대한 바위가 기둥이 되어 한 개의 바위를 떠바치고 있는데 이러한 형상은 청학동이 구비해야 할 조건의 하나다.
석문을 통과하면 세석고원이 있고 이곳을 중심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평지가 넓게 펼쳐져 있다. 청학동의 조건인 초전 40리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뜻밖에도 사람이 살았음을 보여주는 돌담이 발견되었다. 구한말 이곳을 청학동이라고 믿고 들어온 사람들의 흔적이라고 했다.
"초전 40리로 이루어져 있고, 거기서 백운삼봉이 남쪽으로 정면으로 보이고, 밭이 많아서 경작을 할 수 있는 땅이 한 천마지기 되구요, 진주에서 147리 떨어져 있고, 이런 조건으로는 세석이 거의 완벽하다고 볼 수 있지요." - 성낙건, 산악인
지리산에서 청학동을 찾았던 많은 사람들. 그 중 일부는 청학동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그 위치가 천차만별이다.
택리지를 쓴 이중환은 악양골의 매계를, 김종직은 지금의 연곡사 근처로 봤으며, 겸암 유원용은 세석고원을 청학동으로 봤다.
남명은 불일암 근처를 청학동으로 생각했다. 심지어 하늘을 오르내리는 청학을 봤다고 유두유록에 적고 있는데 과연 그곳은 청학동으로써의 조건을 갖추고 있을까?
보조국사 지눌이 수행한 불일암은 82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사방이 산자락으로 감싸있으며, 비교적 넓은 공터인 점에서 청학동이란 것에 수긍이 간다.
남명이 거쳐갔던 청학동. 그 불일암에도 사람이 거쳐간 흔적이 있다.
"78년에 들어왔지, 나는 청학동이라고는 생각을 안 하고 내가 좋아서 그냥 편하게 사는데, 부엌을 개조를 하다가 땅속에서 이 돌을 발견을 했어, 그리고 돌의 파편을 많이 주웠어" - 변규화, 불일산장 주인
변씨에 따르면 구한말에는 동학교도가, 일제때는 정신대와 징용을 피해온 사람들이 살았다고 한다.
"인생이 불운하고 시대가 험난할 때 유토피아에 대한 관념은 더욱더 증폭될 것입니다.
종교가 번성할 때도 역시 그렇듯 남명시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청학동을 찾았는데 그것은 그만큼 그 시대가 불운하고 불안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 되겠습니다." - 정우락 교수
현실의 혼란을 피해 청학동을 찾았지만 남명은 이곳에서도 현실에 대한 고민을 털어버리지 못하고 시를 한 편 남긴다.
청학이 나는 이상세계를 보면서도 남명은 물이 흐르는 현실세계를 간과하지 않았던 것이다.
청 학 동
한마리 학은 구름을 뚫고 하늘로 올라가고
구슬이 흐르는 한가닥 시내는 인간세상으로 흐르네
"청학동에서 남명이 현실을 생각했다는 것은, 초월공간을 그대로 자연속에 매몰시키지 아니하고 끊임없이 현실화시키는 역설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남명에게서 그대로 삶에 반영되고 있습니다.
자연속에서 처사의 삶을 영위하면서도 거기에 매몰되지 아니하고 끊이없이 현실의 부조리를 비판하는 것으로 나타나지요." - 정우락 교수
세상이 혼란할 때 이상향을 찾아들어오는 사람들처럼 남명 역시 지리산에서 청학동을 찾았지만 남명은 오히려 그곳에서 자신이 발 딛고 있는 현실세계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6. 조선시대 양반들의 산수유람,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남명의 산수유람은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의 학문과 정신세계를 높이려는 뜻에서 이뤄졌습니다. 또한 다른 선비들에게 자신의 사상과 현실 인식을 자연스럽게 피력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남명이 살았던 시대는 산수유람이 유행처럼 퍼져 있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전국의 유명한 산수를 돌아보며 호연지기를 기르는 것이 진정한 선비가 되기 위한 통과의례로 여겨질 정도였던 것입니다.
이런 여행 과정을 선비들은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습니다. 지리산만 하더라도 김종직, 김일손, 정여창, 이동항 등 많은 선비들이 기행록을 남겼습니다.
이 기행록은 후일 선비들이 어떻게 여행을 했는지 알리는 좋은 자료가 되었던 것입니다. 험한 산길, 변화무쌍한 기후, 그리고 긴 여정 동안의 음식과 숙박, 만만치 않았을 것 같습니다.
남명을 비롯한 다른 선비들은 도대체 산을 어떻게 올랐던 것일까요?" 당시의 산행 풍속도를 알아보기 위해 선비들이 남긴 유람록을 살펴보기로 했다.
점필재, 김종직(1472년) '유두류록(遊頭流錄)' 우리는 그의 기록에서 당시 산행 모습을 발견했다.
"'수친서(壽親書)'에 적혀 있는 대로 산행 도구를 갖추었다."
수친서. 오늘날의 여행가이드 같은 서적은 아닐까?
국립중앙도서관. '수친서'를 찾아보기로 했다. 백방으로 찾아보았지만 '수친서'는 어디에도 없었다.
다시 기록을 찾아가던 중 1790년 지암 이동항선생 문집 '방장유록(方丈遊錄)'에서 재밌는 사실 한가지를 발견했다.
이동항이 지리산을 유람할 때 '점필재 김종직의 두류록을 손에 넣고 다녔다'는 것이다. 이는 선대의 산행 기행록이 후대의 산행에 지침서가 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기행록은 김종직을 필두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지리산 유람록
김종직, 정여창, 이륙, 남효온, 김일손 조식, 양대모, 유몽인, 박여량, 성여신 허목, 박장원, 이동항 등 70여 명
이 기록들을 바탕으로 당시 산행 모습을 복원해봤다. 우선 선비들의 산행 옷차림은 어땠을까?
평소의 옷차림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다만 변덕스런 날씨에 대비해 삿갓과 도롱이, 짚신 등을 따로 준비했다.
긴 일정동안 작정하고 나선 길이라 산행의 규모는 오늘날처럼 단출하지 않았다.
이동항은 '방장유록'에서 산행을 떠나는 자신의 일행이 70여 명에 이른다고 했고,
"계곡을 내려갈 때 사람들의 수가 모두70여 명이었다."
수우당 최영경의 경우는 그 보다 더 많아 일행의 수가 100여 명이 넘었다고 적고 있다.
"예전에 최영경이 지리산을 유람할 때 함께 간 사람들이 100여 명에 이르렀다."
남명의 일행도 40여 명에 이르는 큰 규모였다.
그렇다면 이 많은 인원이 다 선비들이었을까? 남명의 유두류록을 바탕으로 당시의 산행 모습을 복원해봤다.
산행을 위기 먹고, 자고, 즐기는 모든 도구를 산으로 옮겨가야 했다. 그러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필요했다.
산행의 맨 앞에는 산행의 흥을 돋을 수 있는 악공과 기생들이 앞장섰다.
중간 대열에 선비들이 걷거나 말을 타고 갔다. 산수를 보고 즐기는 게 목적인지라 선비들은 급하지 않게 천천히 움직였다.
또 행렬의 맨 마지막엔 요리사와 노비 수십 명이 산행에 필요한 각종 물건을 가지고 뒤따랐다.
선비 개개인이 준비했던 물품들을 살펴보자.
"아무때고 읽을 수 있는 시집 1권과 산수에서 느끼는 감흥을 표현해줄 종이, 벼루, 먹, 붓 등 문방사우, 그리고 짚신 1켤레, 옷, 이불, 베개, 방석, 대지팡이 등 생활필수품이었다." -1616년 지리산 유람시 성여신의 개인 준비물
여름철 산행일 경우 특히나 각종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갑자기 찾아온 복통과 설사로 남명 일행은 큰 고통을 겪어 급히 소합원과 청향유를 먹었다고 한다.
"가슴이 아프고 (몇 말을) 토해서 소합원과 청향유를 급히 먹였다."
소합원과 청향유. 이것들은 오늘날의 구급약에 해당하는 것일까?
경희대학교 한약박물관
경희대의 육창수 교수는 소합원이 소합향원이란 이름으로 전한다고 했다.
소합향원이 어떤 약인지 알아보기로 했다.
동의보감(東醫寶鑑)에 의하면 소합향원은 막힌 기를 뚫어주는, 병의 기초약으로 각종 약재를 환약으로 만든 것이라 한다.
이 약에는 백출, 목향, 침향, 사향, 정향, 안식향, 용뇌, 백단향,주사, 서각, 가자피 등 수십가지 약재가 들어가는데, 오늘날에는 잘 쓰이지 않는 귀한 약재다.
"소합향원(蘇合香元)은 모든 기병(氣病)과 중기(中氣), 상기(상氣), 역기(逆氣), 기통(氣痛) 등 증상에 치료함"
"필수 약재는 사향, 침향, 정향, 백출 등 네 가지만 들어가도 약효는 상당히 우수하다고 보죠. 그 당시에도 이런 약재들이 전부 들어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육창수 교수, 경희대 한약학과
소합향원의 주성분 중 하나인 침향은 월남에서, 또 정향은 중국에서 수입해야 했기 때문에, 값이 비싸 양반들만 음용할 수 있는 귀한 약이었다.
한편 산행을 하는 선비들의 숙소는 지리산 곳곳에 산재한 절과 암자였다.
한때 지리산 일대에서 가장 큰 절의 하나였던 이곳 단속사(경남 산청군 단성면)도 유람객들의 숙소로 이용됐다.
남명은 쌍계사와 신응사에서 몇일동안 호남 선비들과 어울렸으며 계곡물이 넘치면 스님들이 나무다리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선비들과 함께 쌍계사 법당에서 술잔을 돌리고 풍악을 울렸다."
"신응사 중 옥륜과 윤의가 비로 불어난 계곡에 나무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 유두류록, 남명
400여 개에 이른다는 지리산의 절과 암자는 산 어딜가도 만나는 안식처였고 산길 구석구석을 잘 알고있는 스님들은 산행에 꼭 필요한 존재였다.
오늘날로 치면 절은 산장이고, 스님들은 산행가이드인 셈이다.
"우선 유람하는 선비들이 예를 들어 군자사에서 자고 천왕봉을 올라갑니다. 베이스캠프 같은 역할을 한 곳도 절들인데 많은 선비들이 오다보니까 그분들 접대해야죠, 더 지체높은 분들은 가마에 태워 산행까지 해야죠," - 최석기 교수, 경상대 한문학과
16세기 선비들의 산수유람은 일정한 경향을 가지고 이루어졌는데 특히 여러 사람이 함께 하는 유람의 과정을 중요시 했다는 특징이 있다.
7. 조식의 실천사상, 임진왜란에 수많은 의병장을 배출하다!~
"이곳은 남명이 말년을 보냈던 산천재입니다. 지리산 자락에 마지막 삶의 안식처로 삼은 곳입니다.
나이가 들며서 남명은 지리산과 더 가까운 곳에 자신을 둡니다. 지리산을 향한 애틋한 마음은 산천재의 구조를 통해서도 확인을 할 수 있습니다.
원래 이런 건물은 본채를 앞에 두고 양 옆으로 동재와 서재를 두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본채를 중심으로 동재는 있는데 당연히 있어야 할 서재는 없습니다. 이유는 서재를 지을 경우 지리산이 가려지기 때문입니다.
서재를 짓지 않은 이유는 매일까지 천왕봉을 바라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더 이상 지리산을 오르는 것이 힘들어지자 본채와 동재에 앉아 천왕봉을 바라보는 것으로 위안 삼은 것입니다. 평생 지리산을 떠나지 않은 남명다운 발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지리산은 남명에게 어떤 의미였을까요?
경남 산청군 시천면. 지리산을 포근히 감싸는 이곳에 남명의 기질을 보여주는 시비가 하나 있다.
남명이 1549년 마흔 아홉살때, 인근 산 계곡에서 선비들과 목욕하며서 지은 시.
냇물에 목욕하고서(浴川-욕천)
온 몸 40년 동안 쌓인 티끌 천 섬 되는 맑은 못에 싹 씻어버렸다. 만약 티끌이 내 오장에서 생긴다면 지금 당장 배 쪼개 흐르는 물에 부쳐 보내리라
"내 마음속에 조금이라도 사욕이 생기면 곧바로 버리고 다스리겠다는 말씀인데 그만큼 일상생활속에서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리려고 하셨고 그게 결국 사회생활하면서 불의를 보면 참고 견디거나 그냥 지나지 못하고 잘못 되었다, 바로 현실 대결의식을 보이셨습니다." - 최석기 교수, 경상대 한문학과
학문적 노력과 현실에 타협하지 않는 처신. 남명에 매료된 수많은 학자들이 그의 문하에 모여들었고 퇴계 이황과 더불어 영남학파의 쌍벽을 이루는 남명학파가 형성되었다.
덕천서원(산청군 시천면 원리), '덕천원생록(德천院生錄)'
"남명은 학자가 학문만 연구하고, 이론만 탐구하는 것은, 본연의 자세가 아니라고 평가하셨습니다. 학자는 실제 현실의 모순이나 위기적 상황에 부딪혔을 때 과단하게 표현하는 그 행위, 그것을 굉장히 강조하셨습니다." - 신병주 박사, 서울대 규장각
남명은 왜(倭)를 '조그맣고 추잡하고 섬 오랑캐(島夷小醜)'라고 경계했는데, 왜구의 배가 해안에 정박했다는 소식을 듣고 당장 여행계획을 취소할 정도였고,
심지어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0년전부터 이를 예견하고 제자들에게 병법을 가르쳤다.
"왜국의 배가 와서 정박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곧 여행계획을 취소..."
삼가식현(하동군 악양면~적량면 사이 고개)
왜에 대한 이런 태도는 남명의 국토인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남명은 산과 그 산을 잇는 강줄기를 혈맥과 경락으로 인식하여 우리 국토를 살아있는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로 보았다.
"산은 혈맥처럼 서로 꿰이고 뒤섞여있고 강과 바다와 포구가 경락처럼 얽혀있다." - 유두류록, 남명 조식
국토를 생명체로 볼 정도로 남명은 우리 국토를 사랑했고, 때문에 국토와 백성들을 유린하는 왜(倭)는 당연히 경계해야 할 대상이었다.
"남명의 표현을 빌리자면 '조그맣고 추잡한 섬나라 오랑캐들이 백성들을 유린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남명의 애민,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는데요, 때문에 남명은 평소에도 긴칼을 차고 있었고 제자들에게 병법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만약 왜구가 쳐들어오면 어떻게 하겠느냐' 대응책을 모색해보라고 요구도 하게 됩니다." - 정우락 교수
남명의 제자들 중에는 남명의 학풍을 이어 현실의 문제에 맞서 대응한 인물들이 많다.
특히 남명 문하의 제자들은 임진왜란때 전국에서 제일 먼저 의병장으로 궐기했다.
이때 활동한 남명의 제자만도 곽재우, 정인홍, 김면, 조종도 등 50여 명이 넘는다.
남명 문하 의병장
성주 이준민, 고령 김면, 현풍 박성, 초계 전치원, 곽준, 합천 정인홍, 박이장, 하혼, 삼가 노흠, 이흠, 의령 곽재우, 거창 문위, 안음 조종도, 함양 박여량, 산음 오장, 단성 이유근, 김경근, 진주 이정, 이로
이들의 활약상 중 특히 주목할 부분이 진주성 싸움이다.
남명 문하의 의병장들은 호남 의병장들과 연합하여 왜구를 물리쳤다.
그런데 영,호남 의병장들의 연합은 그 이전부터 영, 호남 선비들의 교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박공 충신 사적(朴公忠臣事蹟)
박성무는 진주성 싸움때 두드러진 활약을 한 호남의 의병장 김천일의 제자다.
"왜구가 재차 일어나니 강을 건너 창의하였다."
그런데 그의 이력엔 독특한 점이 있다. 김천일의 문하에 들어오기 전에 남명 조식에게 성리학을 배웠다는 것이다.
"박성무는 남명 조식이 오랫동안 객관에 머무를 때 그에게 성리학을 배웠다."
영, 호남 의병 연합이 가능한 이면엔 남명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남명은 영, 호남 선비들이 교류를 할 수 있도록 꾸준히 자릴 마련해왔다. 이와 같은 사실은 유두류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호남의 관리가 술과 음식을 보내오고, 신응사 계곡에서 3일간 머물며 학문과 현실 정치에 대해 이야기 나눴다."
"호남순번사 남치근이 쌍계사로 술과 음식을 보내왔다."
"호남에서 온 여러 사람들과 함께 신응사 계곡에서 날이 저물도록 누각에 앉아 불어난 시냇물 구경을 하였다. 기대승 일행 11명도 비에 막혀 상봉에서 내려오지 못했다." - 남명, 유두류록
남명은 호남 사림의 거두 기대승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당연히 그 당시 학자들이 산에서 만났을 때 현실정치에 대해 이야기 나눴을 것이고, 또 학문에 대해서도 많은 교감, 교분을 나누고, 더우기 그 지역에서 명망이 높은 학자라면 더욱 교분을 넓혀갔을 것입니다." - 신병주 박사
지리산은 남명에게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공간이자, 사상의 깊이를 채워주는 스승이었다.
크게 두드리지 않으면 소리가 나지않는 거대한 종과 같은 지리산의 기상. 남명에겐 경외의 대상이며 닮고싶은 존재였다.
지리산을 열두번 오르며 마침내는 지리산이 되고싶었던 남명 조식. 그런 간곡한 바램은 천왕봉 아래 들어가 인생을 정리하는 것으로 그 인연을 더했다.
지리산과 남명의 특별한 관계는 계속 이어져 지리산 자락에 서원을 세워 남명의 덕행과 학문을 계승하고 있다.
안으로 마음을 밝게 하고 밖으로 의로써 실천한다는 남명의 경의사상은 이렇게 그 맥이 이어지고 있다.
덕천서원, 숭덕전
"남명의 사상과 학문은 학파로 형성되었고 수많은 후학들이 뒤를 따랐습니다.
남명은 조선 최고의 성리학자였습니다. 대학자 남명은 죽기전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내 평생에 시종일관 지켜온 것이 있다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복종하지 않는 정신이다. 사후에 나를 '처사'라고 불러라. 그것이 내 평생의 뜻이다"
명망있는 학자로도, 또 관리로도 아닌, 한 사람의 처사로 기억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남명에게 있어 이 '처사'는 부조리한 현실에 야합하지 않고, 자신의 위치에서 이 현실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노력했던 실천하는 지식인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지리산은 이런 남명이 처사의 정신을 잃지않고 꿋꿋히 실천하게 했던 스승과 같은 존재였던 것입니다."
- 유인촌의 역사스페셜을 보고(감사합니다!~늘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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