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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통신

[스크랩] 시베리아-몽골스텝을 그리며

  몽골제국이 고려의 세자를 저들의 수도인 大都(지금의 북경)로 데려다 교육시
켜 부마를 삼은 뒤 고려왕으로 임명하여 내려보내곤 하던 1260년, 漠南 대총독 
쿠빌라이는 고려 세자 王倎(뒷날 원종)을 맞아 난해한 환영의 말을 했다. 원나
라의 막남 대총독은 동아시아 전체를 다스리는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었다.
  “…自唐太宗 親征而不能服 今其世子…”
  ‘당 태종의 친정을 물리친 바로 그 세자’라는 환영사였다. 600년 전 당 태
종을 물리친 용맹한 고구려 세자에 준해 고려 세자 왕전을 대접하겠다는 극진한 
뜻이 담겨 있는 말이었다. 실제 원나라는 고려를 통합하지 않고 그들이 다스리
던 유라시아의 여러 나라 가운데 유일하게 독립국 지위를 유지하도록 배려했을 
뿐만 아니라, 고려 왕실과 대대로 사돈관계를 맺고 고려왕에게 옛 고구려 영토
인 만주지역의 왕을 겸하게 하는 납득하기 어려운 특전까지 베풀었다.
  우리 가치관으로 이해하기 힘든 의혹은 세월을 뛰어넘어 이어진다. 한․몽 수
교 직후인 1990년 7월, 우리나라를 방문한 대만의 몽골인 사학자 한촐로는 도착 
인사말로 ‘어머니의 나라에 왔습니다’ 하며 정중하게 한국식으로 허리 숙여 
인사했다. 이때 받았던 강렬한 충격을 간직하고 있던 주채혁 교수는 유적․유물 
및 口碑史料를 발굴하기 위해 한촐로의 고향인 흥안령 일대를 누비는 동안 서서
히 그 실체를 확인하고 한촐로의 정서를 이해하게 된다. 몽골의 시조 보돈차르의 
계보에서 그의 어머니가 코리족임을 확인하고서야 몽골인들이 한국을 어머니의 
나라로 인식하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떠난 자들은 고향을 잊었어도 고향
에 머물러 대대로 사는 사람들은 떠난 사람들을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이다. 
  1992년에는 흥안령의 부이르호수 가에서 몽골 부녀자와 고올리 부녀자가 인사
를 나누는 광경을 보고 의아해하다가 그 마을의 촌장에게 물어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양 종족의 부녀자가 마주치면 몽골인은 북동쪽을 향해, 고올리인은 서
남쪽을 향해 손을 들어 한 번 돌리고는 인사를 나누는 것이었다. 촌장의 설명인 
즉, 먼 옛날 바로 이 근방에서 몽골족과 고올리족이 각각 서남과 북동으로 갈라
졌기 때문에 서로 이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 상대방이 떠나간 곳을 향해 손을 
들어 한 바퀴 돌린 뒤 인사를 나눈다는 설명이었다. 고올리족들이 살던 성읍터
와 두 집단의 경계를 표시했던 石人像도 확인했다. 
  교단에 복직한 뒤에도 주 교수는 시베리아-몽골스텝에 흩어져 사는 여러 부족
들의 습성과 口碑史料들을 이처럼 하나하나 유적과 유물을 발굴하면서 재확인하
곤 했다. 유적과 유물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주 교수가 흥얼거리는 타령조의 우
리 민요가락을 들은 현지인들이 ‘어떻게 차아탕의 노래를 아느냐’고 물어 흥
분하기도 했었다. 차아탕, 코리족, 고올리족은 모두 우리 선조를 부르는 같은 
이름이다. 한국이나 한국인을 솔롱고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많은 사이트에서 
‘솔롱고스는 무지개의 나라라는 뜻으로 한국을 가리킨다’고 소개하고 있지만 
이는 조선을 해 뜨는 나라라고 잘못 알고 있듯이 틀린 내용이고 ‘족제비족’이
라는 뜻이다. 고올리 가운데 족제비를 생계수단으로 삼던 집단을 일컫던 말이다.
  차아복, 즉 순록을 漢人들은 四不象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한다. 발굽은 
소와 같은데 소도 아니고(蹄似牛非牛) 머리는 말과 같은데 말도 아니며(頭似馬
非馬), 몸은 당나귀와 같은데 당나귀도 아니고(身似驢非驢) 뿔은 사슴과 같은데 
사슴도 아니(角似鹿非鹿)라는 뜻이다. 漢人들이 길든[馴] 사슴이라는 뜻에서 馴
鹿으로 부르는 차아복을 몽골인들은 ‘오루’라 부른다. 길들지 않은 짐승이라
는 정반대의 뜻이다. 순록은 가둬놓고 기를 수 없다. 광활한 스텝을 자유롭게 
뛰어놀며 蘚을 뜯어먹고 산다. 몽골인들은 이를 보고 ‘오루’라 했다. 그러나 
큰 우리를 지어놓고 새끼를 그 속에 가둬두면 어미들은 낮 동안 蘚을 뜯어먹으
며 실컷 뛰어놀다가 밤이 되면 새끼에게 젖을 먹이기 위해 제 발로 우리를 찾아
든다. 정착 농경민인 한인들이 먼발치에서 보기에는 ‘딱 길든 사슴[馴鹿]’이
었을 터이다.
  이후 몽골족 일부는 부이르(수달)를 주 생존수단으로 삼으며 저습지대를 따라 
이동해갔고, 고올리족 일부는 엘벵쿠(너구리)를 주 생존수단으로 삼으며 산악지
대를 따라 이동해갔다. 이들에게 수달과 너구리는 의식주의 기본이었다. 조선조 
때 편찬된 몽골어 사전 「蒙語類解」에 보면 ‘Elbenku : 山獺’로 풀이해놨는
데, ‘산달’도 너구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동국여지승람」의 춘천도호부 편
에 보면 ‘…본래 貊國으로…’하는 설명이 나오는데, 이 맥(貊) 또한 너구리다. 
산악을 따라 이동해온 고올리족 일부가 춘천 근방에 맥국을 세웠다는 기록이다. 
비슷한 시기에 강릉 근방에는 濊國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는데, ‘예’는 수달을 
가리키는 말로 저습지대를 따라 이동해온 몽골족 일부가 고올리족이 세운 맥국
과 인접하여 예국이라는 부족국가를 창건했다는 뜻이다. 맥계의 대표적인 부족
은 거란이요 예계의 대표적인 부족은 여진이다. 춘천의 맥국과 강릉의 예국이 
평화롭게 공존한 이웃이라면, 거란과 여진은 중원 진출을 다투며 치열하게 대
결한 거대한 집단이었다.
  차아탕(朝鮮)과 Korea라는 국명에 이미 숙명적으로 순록치기라는 뜻이 내포되
어 있듯이, 우리 겨레의 핏줄에는 수만 년, 수십만 년 전 시베리아-몽골스텝을 
누비며 순록을 타고 순록을 기르며 그 젖과 고기를 주식으로 삼고 그 가죽으로 
옷을 해입고 천막을 만들어 기거한 유구한 유전자가 흐르고 있다. 고려와 조선
을 거치며 어쩌다 자학적인 事大史觀이 기승하여 스스로 우리 역사의 지정학적 
범위를 한반도로 위축시키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시베리아-몽골스텝의 순록유목
사는 저절로 上古史에서 제외되고 말았다. 순록치기 고올리족이 언제 한반도로 
유입되었으며, 어떻게 유목․수렵생활로 발전하여 다시 농경생활로 진화하면서 
토착민들과 조화를 이루어 생존했는지 역사적으로 밝혀내야 할 과제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현재 국내에서 순록유목시대의 상고사 연구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은 
주채혁 교수를 비롯하여 유전자 분석을 통해 차아탕-코리족의 이동경로를 추적
하는 분자생물연구소장 서정선 교수, 시베리아-몽골스텝의 동물 일반에 관한 연
구로 생명공학적 방향에서 민족기원사를 연구하는 한국야생동물유전자은행장 이
항 교수, 사람의 골격과 두뇌의 유전체적 연구를 통해 순록치기의 태반을 추적
하는 조용진 교수, 순록의 생태를 연구하는 한국녹용연구센터장 전병태 교수, 
순록의 먹이인 이끼를 연구하는 蘚연구센터 소장 고영진 교수와 한국초지학회 
성경일 교수, 한국수달연구센터 소장 한성용 교수, 바이칼호를 중심으로 민족
기원설을 연구하는 바이칼포럼 공동의장 이홍규 박사 등 극소수에 불과하다. 
정부와 정통 사학계에서는 예산이나 인적 지원은 고사하고 관심조차 없다. 이
들 극소수 학자들의 노력이 결실을 맺아 하루 빨리 시베리아-몽골스텝의 광대
한 순록치기 역사가 우리 상고사에 편입되기를 고대하지만 글쎄…(계속)
출처 : 사사 작가 남성원 세상사는 이야기
글쓴이 : 만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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