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10.08 04:00 | 수정 : 2015.10.15 10:09
[명사와 함께 걷는 길] (5·끝) 농암 17대 종손 이성원과 걸은 예던길
낙동강 물길따라 이어진 선비의 길… 그 길을 따라가다
안동의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1467~1555) 종택(宗宅)을 지키는 17대 종손 이성원(62)씨는 한때 등산과 영화, 테니스에 심취했고 포커도 쳤다. 중학생 때 도시에 나가 학교에 다녔던 그는 청바지 입고 쏘다니다가도 집으로 가면 17세기 방식으로 사는 게 싫었다. 결혼 전까진 꿈이 외항선원이었다. 종손의 길을 가리라는 생각 같은 건 꿈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집안 어른들은 일찌감치 계도(繼道)라는 자(字)를 지어 주었다. '유가(儒家)의 도를 이으라'는 의미다. 그는 학교 성적으로 어른들 뜻에 어깃장을 놨다. 고교 시절 성적이 330명 중 320등. 한 해 결석 일수는 무려 59일이었다. 대학에 갈 실력도 의지도 없었다.
때로는 남이 나보나 나를 더 잘 안다. 종손의 방황을 지켜보는 집안 어른들도 그보다 그를 더 잘 알았다. 어느모로 보나 그는 종손의 짐을 져야 할 사람이었다. 그것도 매우 성공적으로. "돌이켜보니 거부하는 몸짓은 주변을 맴도는 시늉뿐이었고, 훗날 중심으로 들어가기 위한 탐색의 수순에 불과했다"고 그는 말했다. 공부와는 인연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대학에 들어간 학생들을 보니 불 같은 갈망이 일었다. '어부가' '농암가'를 지은 농암의 피가 그의 몸에 흐르고 있었기 때문일까. 책을 붙들고 대입을 준비해 재수 첫해 바로 성균관대에 입학했다. 허다한 서양 학문 다 놔두고 하필 한문학을 택한 것도 지금 생각해보면 운명 같다. 졸업 후 귀향했더니 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안동의 한 고등학교에 교직 자리까지 미리 마련해 두고 그를 주저앉혔다. 한문 선생이 되어 고향에서 1977년부터 2000년까지 제자를 가르쳤다. 결혼도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자손으로 양동마을에 사는 여성과 했다. 지금의 종부 이원정(56)씨다.
이성원 종손은 종택 재건을 위해 안동 곳곳을 돌아다니다가 1994년 지금의 종택이 있는 땅을 발견했다. 35번 국도를 따라 좁은 계곡길을 달리다 보면 문득 인적 없는 너른 평지가 나타나고 그 위에 농암종택이 홀로 서 있다. 종택 앞으로 흐르는 낙동강 건너 청량산의 벽력암이 깎아지른 듯 서 있고 종택 뒤로는 건지산 능선이 낮게 팔을 펼치고 있다. 종택은 두 산 사이에 마치 품에 안긴 것처럼 들어서 있다. 그 옆으로 낙동강 물줄기가 태극무늬처럼 굽이치며 감싸고 흐르는데, 처음 본 이는 탄성을 지를 만큼 풍광이 수려하다. 때마침 물들기 시작한 단풍이 낙동강 색을 울긋불긋 수놓았다. "그 좋은 터에 아무 집도 들어서 있지 않은 게 기적이었습니다. 땅 주인들을 일일이 찾아가 땅을 조금씩 매입했지요."
땅은 마련했지만 종택 복원에는 더 큰 돈이 필요했다. 그런데 1999년 때마침 경북 유교문화개발사업이 발표되며 국가로부터 건축비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대신 문화적 가치가 높은 종택을 일반에 개방했다. 종택을 찾는 이들에게 안동 유교문화를 제대로 알리기 위한 노력도 시작했다. 한국한문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안동의 유교문화와 도산의 아름다운 자연, 안동출신 학자와 문인들 이야기를 소개하는 책 '천년의 선비를 찾아서' 등을 썼다.
농암종택 사랑채 앞에 있는 긍구당(肯構堂·경상북도 유형문화재 32호)에서 하룻밤 묵었다. '긍구'는 조상의 유업을 길이 이어간다는 뜻. 1370년 농암의 고조부 이헌이 지은 것을 농암이 중수하고 편액을 붙였다. 방에 앉으니 바닥은 따뜻한데 청량산 나무숲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스산했다. 방 한쪽에 마련된 메밀차에 뜨거운 물을 부어 마시고 풀 먹인 듯 빳빳한 요 홑청과 두툼한 이불 사이로 파고들었다.
종가의 아침밥은 안채에 모두 모여 먹는다. 사랑채와 분강서원, 애일당, 강각 등에서 밤을 보낸 이들이 종손이 흔드는 쇠종 소리를 듣고 하나 둘 모여들었다.
◇수많은 문학작품 빚어낸 예던길
아침 식사를 마치고 이성원 종손과 농암종택을 나와 낙동강과 나란히 난 예던길을 함께 걸었다. "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이육사 시인의 생가를 지나 도산서원에 이릅니다. 퇴계 이황 선생이 숙부인 종재 이우 선생에게 학문을 배우기 위해 청량산으로 갈 때 걷던 길로, 과거 녀던길, 또는 퇴계 오솔길로 불렸습니다."
도산서원까지 약 10㎞에 이르는 길 중 농암종택과 백운지 사이 4㎞는 지금도 차량 진입이 불가능하고, 오직 옛 선비들이 그랬듯 걸어야 하는 오솔길이다. 한 시간 남짓 걷는 길은 청량산과 낙동강이 함께 빚은 수려한 풍광 덕에 전혀 지루하지 않다. 낙동강 물길을 따라 청량산의 육육봉과 학소대의 수직단애, 백운지의 넓은 못이 차례로 펼쳐진다. 때마침 들기 시작한 단풍이 물에 비쳐 더욱 고왔다. 예던길은 문학의 길이기도 하다. 이성원 종손은 "철학자 칸트가 걸었다는 독일 하이델베르크 '철인의 길'이 유명하다지만 퇴계를 비롯해 수많은 문인이 걸으며 작품을 쏟아낸 예던길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고 했다. 퇴계는 백운지 근처에서 본 예던길의 수려한 풍경을 이렇게 노래했다. '구비구비 넓은 여울/ 높고 높은 푸른 산/ 청량산은 숨은 듯 다시 보이고/ 무궁한 모습 시심을 북돋우네.'
◇경치엔 취해도 술에는 취하지 않네
◇원이 엄마의 애틋한 사랑이 깃든 월영교
농암종택에 이어 퇴계종택, 도산서원을 차례로 들른 뒤, 안동댐 바로 아래 조정지댐을 가로지르는 월영교(月映橋)로 향했다. '달빛이 비친다는 뜻'의 이 다리에는 조선시대 남편과 사별한 '원이 엄마'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고성 이씨 집안 며느리인 원이 엄마는 남편 이응태가 1586년 31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자 남편의 관에 자신의 머리카락을 끊어 만든 미투리와 함께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을 담은 한글 편지를 넣었다.
소설 '능소화'에는 이응태의 이른 죽음에 대한 문학적 상상력이 펼쳐져 있다. 결혼 전 원이 엄마에게는 저주가 씌어 있었다. 그녀와 결혼하는 남자는 요절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능소화가 피어난 담벼락 너머로 그녀를 우연히 보고 사랑에 포박된 이응태는 결혼을 택하고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내용이다. 관에서 나온 미투리 모양을 본떴다는 월영교는 길이 387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나무다리다. 다정하게 손을 잡고 월영교를 건너는 젊은 남녀가 간간이 눈에 띄었다. 다리를 건너 오른쪽으로 이어진 안동호반 나들이길은 강을 보며 걸을 수 있는 명품 산책길이다.
☞농암 이현보는?
조선 중기 연산군 중종 때의 문신이다. 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심으로 효절(孝節)이란 시호를 받았다. 안동부사로 재직하던 1519년 9월 안동 부내 80세 이상 노인은 여자와 천민까지 초청해 화산양로연을 열고 장수를 축하했다. 이때 자신의 아버지를 포함해 동네 노인 9명을 애일당으로 초청해 그 앞에서 색동옷을 입고 흰머리를 휘날리며 춤을 췄던 애일당구로회 일화로 유명하다. 연산군 때 기묘사화에 연루돼 귀양갔다가 중종반정으로 복귀했다. 국문학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농암가(聾巖歌)와 어부가(漁父歌)로 유명하다. 사후 분강서원에 배향되었다.
이성원과 함께하는 토크 콘서트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는 오는 22일 안동 농암 종택에서 이성원 종손과 토크 콘서트를 진행한다. 이성원 종손과의 콘서트에 참석하고 싶은 개인은 19일까지 한국관광공사가 운영하는 ‘명사와 함께하는 지역 이야기’ 홈페이지(www.koreastoryteller.com)에서 일정을 확인하고 참가 신청을 할 수 있다. 토크 콘서트 후 농암의 ‘어부가’도 관람할 수 있다. 참가비는 1만원.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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