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러시아 이르쿠츠크로 가는 날.
새벽2시 일어나 아쉬운대로 별구경을 하고 3시30분에 아침 요기를 한 후,
4시에 공항으로 출발했다.
비행장까지는 버스로 1시간 30분정도 소요. 아침 출근시간에는 정체가 심해 좀 일찍 출발했다.
울라바토르에서 이르쿠츠크까지 비행시간은 1시간 30분 걸렸다.
비행기에서 내려다 보는 몽골과 러시아 시베리아의 지상 풍경은 대조적이었다.
몽골의 풍경은 거친 거인의 손가락처럼 메마른 산줄기가 겹겹이 뻗어 있었고,
이르크츠크가 가까워질 수록 초록빛 자작나무 수해가 끝없이 펼처져 있었다.
이르쿠츠크의 7월은 우리나라 봄날같았다.
하늘은 맑고 푸르고, 높이 자란 버드나무 가로수가 눈길을 끌었다.
높은 빌딩이 눈에 띄지 않는 유럽풍 거리는 번잡스럽지 않았다.
넓은 앙가라강은 유유히 흘렸고, 강변을 따라 조성된 산책 공원은 한가로웠다.
이르쿠츠크는 바이칼에서 발원한 앙가라강 유역에 자리잡은 시베리아에서 가장 오랜 350여년의 역사를 지닌 도시다.
먼 옛날부터 몽골계 부족인 부랴트족들의 삶의 터전이었으나, 16C 코사크 전사들이 모피를 얻기 위해 진출했었고,
러시아의 동방진출 전진 기지 역할을 했으며, 실패한 혁명가의 유배지였기도 했다.
스프스카야 교회, 즈나멘스키수도원
흑담비를 물고 있는 검은 호랑이, 흑호. 이르쿠츠크의 상징이다.
지금은 남획으로 거의 멸종되었다고 한다.
이르쿠츠크의 역사는 흑담비 모피 수집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신대륙 발견으로 부가 축적된 유럽에서 모피가 대유행을 하게 되었다.
유럽으로 모피를 수출하던 러시아는 시베리아로 진출해 유럽 귀부인들에게 최고의 인기품이었던
흑담비 모피 수탈에 혈안이 되었다.
그 선봉에 선 사람들이 러시아 자유농민집단인 코사크민병대였다.
시베리아 원주민들은 총기로 무장한 코사크민병대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많은 원주민들이 침략자의 총에 맞아 죽고,
이보다 더 많은 원주민들이 침략자들이 옮긴 전염병에 걸려 죽었다.
이르쿠츠크는 그 모피수집의 중심지였다.
코사크 민병대는 동으로 동으로 모피를 찾아 태평양연안을 거쳐 알래스카 까지 이동하였고,
그 코사크 민병대가 간 곳이 바로 오늘의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다.
영주들의 수탈을 견디다 못해 도망처나온 자유농민으로 구성된 코사크족이
유럽 귀부인들의 경쟁적인 모피 소비 욕구를 채워줬고,
아이러니하게도 러시아가 세계 최대 영토 보유 국가가 되는 일등 공신이 되었다.
그리고 반대로 많은 시베리아 원주민들은 목숨을 잃거나 삶의 터전을 잃었고,
소수의 살아남은 자들은 더 북쪽 변방으로 이동해야만 했다.
코사크 장군의 동상 그리고 초기 코사크의 성채
데카브리스트 박물관.
러시아 12월 혁명 주역이었던 세르게이 발콘스키 공작의 집을 개조한 것이다.
나폴레옹의 모스코바 침공을 막아낸 러시아 젊은 장교들은 후퇴하는 프랑스군을 쫒아 파리까지 입성하였고,
그곳에서 자유로운 유럽 문화을 경험하고, 러시아의 낙후성을 목격하였다.
이들은 유럽과 같은 새로운 러시아를 만들기 위해서는 농노제 폐지, 전제군주제 폐지가 절실하다고 보고,
1825년 12월 전제 군주 짜르체제 전복을 목적으로 혁명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12월 혁명은 조선말 김옥균, 박영효 등 개화당이 일으킨 갑신정변을 연상케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선각자들만의 혁명은 성공하기 어려운가 보다.
12월 혁명에 참여한 젊은 귀족들을 데카브리스트라 한다.
혁명에 참여한 귀족들은 체포되었고, 시베리아 이르쿠츠크지역으로 유배를 당하게 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중 11명의 부인이 남편을 따라 이르쿠츠크로 왔다.
귀족 신분을 버리고, 재산도 포기하고, 자식을 낳으면 농민신분으로 살게 하며,
남편이 죽어도 귀족사회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고 남편곁으로 왔다.
여인의 몸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혹독하게 추운 낯선 땅으로 남편을 찾아온 부인들의 순애보는
참으로 대단하고 놀랍다.
남편은 7년의 유배생활 끝에 복권되었고, 그들은 함께 살게 되었다.
이들은 지역주민들을 위해 학교, 병원, 극장등을 세웠고, 지역주민들과 모여 토론하고 문화 행사를 개최하기도 했다.
모스코바에서 멀리 떨어진 모피수탈과 유배지의 도시였던 이르쿠츠크는 이들 데카브리스트와 부인들에 의해
유럽을 닮은 지성과 예술의 도시로 탈바꿈하였다.
이러한 영향으로 이르쿠츠크는 '시베리아의 파리'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데카브리스트를 찾아온 부인들 초상화와 초등학생들이 그린 그림
황제 알렉산드로 3세 동상.
시베리아 횡단열차 건설.
콜챠크 제독 동상.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흑해함대 사령관이었다.
소비에트 2월 혁명에 반대하여 옷을 벗었다.
혁명군인 레닌의 적군에 반대하여 반혁명군 백군을 조직하여 대항하였다.
이르쿠츠크는 반혁명군, 백군의 중심였다.
콜챠크제독은 결국 적군의 포로가 되어 이르쿠츠크에서 처형되었다.
영화 '제독의 여인' 실제 주인공이다.
콜챠크 제독 동상은 구소비에트가 붕괴되었기에 가능했을 것 같다.
제2차세계전쟁때 이르쿠츠크 시민 21만병이 전쟁에 나갔고, 그 중 5만명이 돌아오지 않았다.
이들을 기리기 위해 꺼지지 않는 '영원의 불꽃'이 타 오르고 있다.
바이칼에서 흘려내리는 앙가라강변에 자리잡은 이르쿠츠크는 많은 스토리를 간직하고 있다.
원래 부랴트족의 땅이었고, 흑담비 모피 수집의 중심지였고,
데카브리스트의 유배지였으며 이들에 의해 수준높은 문화도시로 변모하였다.
시베리아횡단철도 건설로 교통의 중심 역할을 해 왔으며,
그리고 소비에트 혁명후에는 반혁명군 백군의 근거지가 되어 적군과 처절한 내전을 치룬 비극적인 도시이기도 했다.
이르쿠츠크는 이렇게 진취적이고 애잔하고 아이러니한 역사를 갖고 있기에 더없이 매력있는 도시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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