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하동은 꽃 피는 동네다.
매화가 봄소식을 전하면, 이어서 벚꽃, 배꽃이 뒤를 잇고
여기저기 풀꽃들이 뒤질세라 맑고 예쁜 얼굴을 내민다.
섬진강 흰백사장 대나무숲을 지나 불어오는 바람에는 봄기운이 느껴지고
평사리 들판 파란 보리밭을 지날 때면 봄 향기에 젖는다.
봄을 느끼기에 하동만한 곳이 없다.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8시 출발, 3시간30분만에 화개장터에 도착햇다.
우선 동백식당에 들려 참게탕을 시켰다.
식당 주인 김사장은 오래전부터 아는 사람이고, 몇 년전에도 친구들과 악양 형제봉 등산을 하고 내려와 쏘가리회와 참게장백반을 먹은 적이 있다.
내 또래인 사장은 은퇴하고 아들이 가업을 이어받아 영업을 하고 있었다.
택시를 타고 악양삼거리 외둔으로 갔다.
고소산성에 올라 평사리들을 조망하고 지리산 둘레길을 따라 먹점골까지 갈 계획이다.
외둔 마을에서 올라가는 등산로는 다니는 사람이 적어 거의 묵은길이 되어 있었다.
무덤을 지나고, 대숲을 지나 섬진강과 평사리들을 바라 볼 수 있는 곳까지 갔다가 길도 없는 산자락을
타고 내려 왔다.
평사리 부부송은 아름답다. 서로 닮아 가고 서로 의지하고 서로 배려하고 .......
평사리에서 바라본 섬진강 건너 광양 백운산. 마치 어머니가 자식들을 품에 안고 있는 듯 하다.
사랑이 가득하고 유교적 질서가 잘 유지된 유복한 가정같다.
평사리들은 너르다. 악양면 전체가 이 들안에 있다.
정월 초하루에 들어온 거지가 한집에 한끼만 얻어 먹어도 섣달 그뭄에 석집이 남는다는 말이 전해진다.
대축마을. 대봉감으로 유명한 마을이다. 토양, 배수 등등 대봉감 재배에 최적지로 꼽혀 오래전부터 대봉감이 재배되었다.
이 마을은 아주 오랜된 마을이다. 안내판에는 변한시대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는데, 아마 그 훨씬 이전부터 마을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앞으로 섬진강이 흐르고 뒤로는 1천미터가 넘는 산들이 둘려 싸고있어 농사를 짓기에 적합하며,
더불어 외적을 막기에도 적합해 일찍부터 사람들이 찾아들어오지 않았을까 싶다.
오랜된 돌담, 아직 겨우잠에서 덜 깬 대봉나무와 엄나무.
그리고 봄 소식을 전하는 매화, 막 봄기지개를 켜는 녹차나무.
전형적인 3월 대축마을의 봄 풍경이다.
문암송. 수령이 600년 정도 된다고 한다.
오래된 소나무를 더러 보았지만 이렇게 힘차게 느껴진 소나무는 본적이 없다.
소광리 소나무숲의 대왕송, 뱀사골 천년송도 빼어난 자태를 뽐내지만 이보다 우렁차게 느끼지는 못했다.
특히 단단한 편마암 바위를 뚫고 자란, 그 모습에서 강한 남성미가 느껴졌다.
이 길은 지리산 둘레길중 하나다.
오래된 마을을 지나고, 섬진강을 조망하고, 과수원을 지나고, 차밭을 지나고, 또랑 건너 숲 속을 지나고....
참 아름다운 길이다.
흙길이 아니고 시멘트 포장도로인 것이 아쉬운 점이다.
하지만 원래 트래커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농사짓는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 포장 된 것이니
감지덕지해야 겠다.
드디어 오늘의 목적지 먹점골에 도착했다.
이곳은 지대가 높아 매화가 아직 한창이겠지 하고 기대했는데 꽃빛이 저물고 있었다.
내 기억속의 먹점골은 오지중의 오지.
차 한대가 겨우 갈 수 있는 좁은 산길 속의 외딴 섬같은 곳이었는데, 그 길이 2차선으로 확장되고 아스팔트로 포장되었다.
산촌의 멋이라곤 사라지고 그저 평범한 마을로 바뀌어 있었다.
신작로를 따라 내려오다 게스트하우스겸 찻집, 묘향이 눈에 띄여 쉬어갈 겸 들렸다.
기와집에 방이 두개, 따로 주방이 마련되어 있는 깔끔한 구조였다.
남자 주인은 장작을 패고 있었고, 여자 주인이 주저주저 우리를 맞았다.
차 한잔 할 수 있나고 물었더니 찻방으로 들어 오란다.
등산화를 벗기가 귀찮아 마루에 앉아서 마실 수 없나고 했더니 굳이 방으로 안내했다.
찻실은 제대로 갖춰져 있었다. 여자 주인은 발효차를 달여 작은 찻잔에 따르고, 마시면 따르고 또또또 따랐다.
여자 주인은 50대 중반, 천안에 살다가 90년대중반 이곳 먹점골에 왔다가 산골 분위기에 반해 잡터를 장만하고 2002년도부터 살기 시작했단다.
지금은 신작로가 생겨 운치가 다 사라졌다고 아쉬어 했다.
여자는 재야 고수 산꾼이었다.
한 때는 가여린 몸매에 25kg 이상 배냥을 메고 지리산, 설악산을 제집처럼 다녔다고 했다.
지금까지 가본 곳 중에 가장 멋진 곳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하동활공장에서 보는 픙광이 우리나라 최고며,
화암사 뒷산 금강산에서보는 풍광을 두번째로 소개하고 싶다고 했다.
산이 좋고, 자연이 좋아 이곳에 젊을 때부터 들어왔지만 사람이 많이 그리웠던 것 같았다.
우리와 많은 얘기를 나눴었고, 빨간 오미자차까지 내어줬다.
남편이 손님들 내려갈 때가 안됐나고 재촉하고 나서도 한 참뒤, 땅거미가 내려 앉을 즈음에 그 집에서 나왔다.
우연히 들린 집에서 참 좋은 사람을 만나고 좋은 경험을 하고 좋은 정보도 얻었다.
선한 남편은 나무 25톤 사서 5년동안 쓸 화목장작을 만들고 있었고, 즐기면서 사는 여자는 아름다웠다.
읍내 섬진강가 송림 옆에 숙소를 정하고,
다리를 건너 광양땅에 가서 돼지갈비에 소주를 마시고 냉면을 먹고 첫날 여정을 마무리 했다.
하동의 아침은 상쾌했다.
어제는 날씨가 흐리더니 밤에 비가 제법 내려 공기가 맑아 졌고, 하늘도 맑아져 근래 보기 드문 기분 좋은 봄 아침이었다.
섬진강변 송림 산책로를 걸으며 피톤치드로 폐를 정화하고 하동공원에 올랐다.
아직 이른 봄이었지만, 봄기운이 꿈뜰꿈뜰 대지를 깨우고 있었다.
하동의 전경은 정갈하게 느껴졌고,
하동공원 전망대에서 보는 섬진강을 배경으로 한 풍경은 한 폭의 수채화같았다.
여여식당에서 재첩국으로 아침을 하고,
하동터미널에서 8시40분발 청학동행 버스에 올랐다.
청학동에서 삼신봉을 올라 지리산 주능선을 조망하고, 불일폭포를 거쳐 쌍계사로 내려 올 계획이다.
약 1시간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차장 밖으로 비치는 풍경은 하나하나가 그림이었다.
색다른 것이 아니라 익숙한 고향 풍경에서도 이렇게 아름다움이 느껴지다니.
회갈색 나목에도 봄기운이 감도니 옅은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고 나름의 아름다움에 눈길이 끌렸다.
그런데 청학동에 내리니 입산금지란다.
난감. 4월말까지 중산리 등산로만 개방하고 모든 지리산 등산로는 폐쇄되었다.
어쩔 수 없이 등산계획을 바꿀 수 밖에.
버스기사와 관리소 직원의 권유를 받아, 회남재를 거쳐 다시 악양으로 가기로 했다.
삼성궁 입구에서 시작되는 회남재 숲길은 완만한 오르막 흙길이다.
소형 차량도 다닐 수 있고 회남재를 넘어 악양까지 이어지는데, 회남재부터는 포장도로다.
어쩌다 차량을 마주치기도 했지만 참 조용하고 걷기 좋은 길이었다.
길가에 놓인 파란 고로쇠물 통을 열어 도둑 목을 축이는 실례도 유쾌했다.
곳곳에 나무 이름표가 달려 있어 나무공부하기에도 안성 맞춤이었다.
요즘 부쩍 나무에 관심이 많아진 오총재는 사진을 찍고 관찰하느라 걸음이 계속 처졌다.
회남재 숲길 안내판에는
"이 숲 주요 수종은 흔히 극상림에서 많이 보이는 수종으로 교목종인 개서어나무, 층층나무, 신갈나무, 졸참나무, 굴참나무, 물푸레나무 등이다. 그 뒤를 이어 많이 보이는 교목과 아교목은 때죽나무, 물갬나무, 당단풍나무,, 비목, 노각나무, 함박꽃나무, 호랑버들 순이다...
음수인 낙엽활엽수들이 과거 녹화사업으로 심었던 일본잎갈나무나 침엽수등을 밀어내고 이 숲의 주인공으로 자리잡으면서 보다 안정적인 숲의 모습을 보이고 있고..."
숲의 역사 즉 천이를 설명하고, 생태학적으로 다양한 수종이 혼재하고 있는 건강한 숲이라는 설명이다.
한 때 이곳도 산림이 황폐해져 산림녹화를 하였고, 그 이후 새로운 나무들이 이동해와 산림녹화 때 심은 양수인 침엽수를 몰아내고 음수인 낙엽활엽수가 주축을 이루는 숲으로 바뀌었다. 단조로운 숲에서 풍성한 숲으로 바뀜에 따라 다양한 생물이 이 숲을 찾게 되었고 숲은 더 많은 생명이 숨쉬는 건강한 생태를 유지하게 되었다.
나무, 숲, 생태 공부하기에 최적의 장소인 것 같다.
회남재에서 버러본 악양, 평사리들이다.
최참판댁에서 바라본 평사리 들 안쪽으로 골이 깊고 들도 넓다.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내려가다가 등산리본이 보여 능선길로 내려 섰다.
등산로는 흔적만 남았고, 최근에는 등산객이 거의 다니지도 않은 듯 했다.
나무가지를 헤치고 가다가 결국 길을 잃어버렸다.
다행히 나무사이로 보이는 마을을 목포로 삼아 길 아닌 길을 만들어 어렵게 하산했다.
만약 녹음이 우거진 여름이었다면 꼼짝없이 산중 미아가 되었을 것이다.
운 좋게도 암자에서 내려가는 승합차를 얻어 타고 악양면소재지까지 편하게 갔다.
포장도로를 따라 내려 오는 것에 비해 약 2시간을 절약했다.
악양면에 있는 솔잎한우 식당.
이곳에 대한 좋은 추억이 있어 꼭 다시 들리고 싶었던 곳이었다.
간판은 색이 바랬고, 장소도 협소해졌고, 들어서니 손님은 아무도 없고, 아주머니 두분이 마늘을 까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지난 탓도 있겠지만 옛날에 비해 손님이 많이 줄었단다.
전에는 일주일에 소 1마리를 잡았었는데, 요즘은 그냥 소고기를 사서 파는 것 같았다.
그냥 막걸리 한잔 할 겸 소고기 1인분을 달라했더니 1인분은 안판다고 했다.
2인분을 시키고 악양 막걸리를 주문했더니, 막걸리는 마트에서 사와야 한다고 했다.
박대사가 마트에 가서 반갑게도 부산생탁을 사왔다. 악양막걸리는 악양에서 팔지 않았다.
소고기 200g,2만원. 마블링이 잘돼 빛깔도 좋고 맛도 좋았다.
결국 소고기 3인분을 먹고 소주도 1병 더 마셨다.
다시 택시를 타고 여행 첫날 내렸던 외둔에서 또 내렸다.
외둔에서 화개장터까지 섬진강변을 따라 걷기로 했다.
하루가 다르게, 어제는 봉오리만 맺혀 있던 벚꽃이 꽃망울을 떠뜨리기 시작했고,
초록빛은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어제 밤 봄비가 봄을 깨운 모양이다.
강변길을 지나고, 대나무 숲을 지나고, 팽나무 공원을 지나고, 차밭을 지나고,
바람 세차게 몰아치는 모래사장을 건너니 드디어 화개장터와 구례광양을 잇는 남도대교가 보였다.
약 2시간 얼떨떨 취중에 온 몸으로 봄을 느끼며 걸었다.
이번 여행은 당초 목적인 지리산 삼신봉 등산은 하지 못했으나,
하동을 더 많이 느끼게 되었고, 힘든 등산이 아니라 즐기면서 걷는 것에서 또다른 재미를 느꼈다.
그리고 먹점골 카페 여주인이 소개한 명소를 백패킹하기로 뜻을 모았다.
앞으로 시작할 새로운 여행에 대한 설레임을 안고 버스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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