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이란 책을 읽었다. 오랜전 대학 대닐때, 80년도에 그 책 얘기를 들었고 한 번 읽어봐야지하고 맘 먹고 있었는데 20여년이 지난 이제야 읽게 되었다. 그 때만해도 국내 출판이 안돼 일본어판을 암암리에 돌려 봤기에 아무나 볼 수 없었고, 그 책을 보는 것만으로도 불온시되던 시대였다.
아리랑은 암울한 일제하 중국땅에서 온갖 역경속에서도 끝까지 혁명정신을 놓지않은 김산의 일대기다. 그는 일제 강점기동안 조선의 해방, 피지배자와 약소국을 위해 불꽃같이 살다 간 혁명가다. 일제가 중국대륙에서 침략행위를 본격화하고 중국은 국공의 대립으로 내전상태에 빠져 있었던 1937년 미국의 미모의 젊은 여성 기자인 님웨일즈가 조선의 혁명가를 기적적으로 만나 그의 파란 만장한 일대기를 구술 기록하여 책으로 남긴 것이다.
김산, 본명은 장지락이고 님웨일즈가 그를 보호하기 위해 붙여준 이름이다. 당시 중국공산당 비밀 당원이었던 그는 노출될 경우 일경에 체포되어 처형될 위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일대기를 책으로 출판할 경우 피압박 조선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라는 판단하고 인터뷰에 응했다. 한번도 영어로 말해본 적이 없고 오로지 책과 사전을 통해 영어를 익힌 그는 자신이 살아온 과거와 경험 그리고 생각을 적절한 영어로 표현했다. 비상한 두뇌의 소유자였으며, 거침없는 행동주의자였으며, 자신에게는 극도로 엄격한 전형적인 혁명가였다.
뛰어난 공산당 요원 이었는던 그는 공산당의 조직확대와 투쟁과정에서 수많은 동료들의 죽음을 목격하였고, 국민당에 패해 부상병이 되어 죽음의 고비를 수없이 넘겼다. 그럴 때마다 조선의 해방을 염원하는 조선인으로서의 강인한 정신력에 의해 불사신처럼 살아났다. 그는 대의를 위해 개인의 욕망은 철저하게 억제했고, 조선의 해방을 위해 공산주의자가 됐으며, 결혼도 연애도 혁명에 방해된다는 생각에 금기시했다.
책을 읽으면서 줄곳 느낀 것이 그의 강인함, 뛰어난 능력, 절제심이었다. 조국이 아닌 중국에서, 극한의생존 상황에서, 분열된 조선독립운동세력들의 알력속에서 혁명가로서 역할을 굽히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그의 강인한 정신력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중국공산당 비밀당원이란 사실이 노출되어 2차례나 중국경찰에 체포되어 일본경찰에 넘겨졌지만, 고문을 받고도 끝까지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무혐의로 풀려났다. 하지만 이런 이유로 같은 동포로부터 일본의 혐력자라는 혐의로 공산당에 고발되는 아픔과 좌절을 겪어야 했다. 이것이 이유가 돼 인터뷰가 끝난 얼마후 수정주의자란 비판과 함께 처형당한다.
개인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빠져 있을 때 극적으로 중국 여인을 만나게 됐고, 극도로 심신이 허약해진 혁명가는 그의 혁명 동지가 되겠다는 여인과 결혼하게 된다. 그리고 아들을 낳는다. 결혼에 부정적이었던 그의 생각도 바뀌고 결혼도 혁명의 연장선에서 바라보게 된 것같다.
아리랑은 80년대 이후 사회변혁을 꿈꿨던 사람들에게 교범과 같은 책이었다. 젊음의 낭만과 사회변혁에 대한 꿈을 함께 품었던 젊은이게 방향을 제시하는 지침서 같기도 했으며, 한편으로는 이를 극복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부끄럽고 두려운 책이였다. 내가 이 책의 존재를 일찍 알고도 바로 읽지 못한 것도 이런 이유가 두려움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제 사회가 많이 변하고, 나이 또한 역천이 아닌 순천에 접어들었기에 불안감을 느끼기보단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그리고 혁명도 결국 인간의 삶의 조건을 더 윤택하게 하는데 있으며, 그것은 공공의 행복을 찾아가는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남미의 혁명가 체게바라를 읽을 때도 그가 위대하다는 생각보다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고난의 길, 혁명가의 삶을 살다가 최후를 마친 그의 모습에서 성스러움이 느껴졌다. 자신의 꿈, 심념을 따라 살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없는 것이기에 더욱 아름다워 보인다.
김산은 열악한 식민지 반도에서 철저히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살다간 비운의 혁명가다. 체게바라는 혁명에 성공하기도 했고, 혁명 지도자로서 세계 혁명을 꿈꾸다 간 성공한 혁명가였는데 비해 김산은 중국공산당에 의지하여 조선의 해방을, 피지배자의 해방을 꿈꾸다 간 실패한 혁명가인지도 모른다.
이런점에서 김산의 아리랑은 읽은 뒤에도 계속해서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혁명가로서 자신에게 그렇게 철저했던 그가 결국은 아내를 만나고 자식을 낳아 가정을 이뤘다는 사실에서 인간적인 면모를 느꼈고, 혁명과 사랑은 결국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출발한다는 생각을 했다. 혁명가는 로맨티스인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2005.7)
'변방통신'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산 아리랑 (0) | 2023.04.22 |
---|---|
태 백 문 화 권 (0) | 2021.03.06 |
스코트 니어링의 아름다운 임종 (0) | 2020.12.19 |
봄을 준비하는 나무들 (0) | 2020.04.06 |
손녀와 숨바꼭질 (0) | 2020.04.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