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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통신

태 백 문 화 권

 

 

1. 왜 태백문화권인가

2. 태백의 선사시대

3. 태백의 삼국시대

4. 태백의 지배세력

5. 태백의 불교와 다양한 문화

6. 근대 격동기 은둔과 저항

7. 마치면서

 

 

 

 

 

 

1. 왜 태백문화권인가

 

태백은 백두대간과 남한강과 북한강 그리고 동해안 일대를 아우르는 생활권으로 예부터 우리 역사와 문화의 터전이 되어 왔다.

- 그러나 타 지역에 주목을 받지 못한 지역

구석기, 신석기부터 사람이 살았고, 고조선시대 예맥족의 이동 경로였고, 삼국시대에는 치열한 영토 쟁취 전쟁터였음

불교 문수, 관음의 성지였고, 강릉단오제 등 전통 축제의 맥이 이어오고 있음

고려말, 조선말 은둔과 저항의 고장

 

 

2. 태백의 선사시대

 

구석기 유적 : 25만년

- 양구 상무룡리 유적 : 후기 구석기, 백두산 흑요석으로 만든 석기

- 제천 점말동굴 유적

신석기 유적 : 1만년 전, 빗살무늬토기, 마제석기, 장신구

- 춘천 중도와 교동 유적

- 양양 오산리 유적 등 동해안 일대 유적

 

* 흑요석

 

태백문화권의 선사인들은 시베리아에서 한반도 북부를 거쳐 동해안과 북한강, 남한강 상류의 산간지역에 정착하였고, 이들은 한강과 낙동강을 따라 한강, 낙동강 하류에 살았던 선사인과 교류하였다.

태백의 선사문화는 한반도 북부와 남부의 선사문화를 연결하는 통로이자 매개의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청동기, 초기 철기 시대 : 만주와 한반도에 여러 부족국가 난립

- 고조선, 부여, 동예, ,

- 고구려, 백제, 가야, 신라

 

<참고> ,맥족의 이동과 전쟁

예맥족이란?

- 고대 만주지역에 거주한 한국의 종족 명칭을 가리키는 역사용어

- 예맥에 대해서는 예와 맥으로 나누어 보거나, 예맥을 하나의 범칭(汎稱)으로 보는 견해, 예맥은 맥의 일종이며, 예는 예맥의 약칭이라는 등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예족 : 고조선, 부여, 동예, 말갈, 삼한, , 상나라?, 여진, ,

* 맥족 : 동호, , 낙랑, , , , , 거란, 흉노, 신라(김씨)

* 예맥 : 고구려, 백제

 

* 춘천박물관 예맥논쟁 : 강원 예족-맥족 논란춘천박물관 예족특별전 무산(동아일보 2018.1.4.)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180104/88018537/1

 

 

예맥족 이동과 전쟁(추론)

BC6000 홍산문화의 주역은 예맥족임

- 예족은 중국본토와 한반도 그리고 일본열도로 이동

- 한반도는 예족의 나라 맥족의 나라

 

중국최초의 역사국가인 상나라는 예족의 나라임

- 주나라(화하족)에 망한 후, 상나라 유민은 예족의 나라 요하지역 고조선으로 이동

- 주나라가 기자를 조선제후 임명

 

한사군 설치와 멸망

- 한나라 BC108년 위만조선을 멸하고 한사군 설치

- 313년 고구려에 의해 멸망

 

낙랑군 일부 세력 남하, 신라와 백제 왕권 장악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전쟁은 동아시아 세계전쟁으로 맥족과 예맥족의 전쟁임

- 맥족 : 신라, 당나라 예맥족: 백제, 고구려, 일본

 

 

 

3. 태백의 삼국시대

 

한강의 발원지인 태백은 삼국의 쟁패지였다. 3세기 이후 백제가 북한강 유역에 진출한 이후, 46세기에는 고구려와 신라가 남한강을 두구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남한강 유역과 동해안 일대를 장악한 신라는 마침내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 북한강과 남한강은 한반도 중부를 관통하며 북부와 남부를 연결하는 국토의 대동맥이다.

 

고구려에서 남하한 온조와 부여계인 비류는 각각 서울과 인천지역에 정착해 소국을 세웠다.

- 상류지역으로는 말갈족 때문에 진출이 어려웠다.

 

* 말갈족은 원래 만주와 연해주에 살았던 종족이다. 고구려가 건국하자 함경도, 강원도 일대로 내려왔다.

 

4세기 초반 고구려는 낙랑군과 대방군을 멸망시킨 뒤 한강을 사이에 두고 백제와 힘을 겨루었다.

- 371년 백제 근초고왕은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킴

- 475년 고구려 장수왕은 백재를 공격하여 한성을 점령하고, 개로왕을 생포 참수

 

4세기말 고구려는 신라에 쳐들어온 백제, 가야, 왜의 연합군을 물리치고자 남하하였다.

- 449년 충주에 중원 고구려비를 세워 이 지역이 고구려 지역임을 선포하였다.

- 6세기 중반까지 중원지방 장악

- 신라는 4세기말부터 고구려의 영향 아래 놓여 있었다.

* 왜의 신라 침입

 

545년 진흥왕은 죽령을 넘어 남한강 상류 진출(단양 적성비)

- 433년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자 백제와 동맹을 맺어 고구려 대항

- 568년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세워 한강하류지역까지 지배

 

6세기 중반 신라는 고구려와 대치했던 동해안 일대를 신라의 영역으로 복속시킴

- 4세기 후반 왜가 신라를 침입하자 신라 내물왕은 고구려에 원군을 요청

- 광개토대왕은 5만 군사를 파견 신라를 도우고, 동해안 지역을 실질 지배하고 실성왕과 눌지왕 즉위과정에 개입하는 등 신라 내정에 영향력 행사

- 503년 지증왕은 실직주를 설치하고 이사부를 군주로 파견, 우산국을 정벌하여 동해안 제해권 장악하는 등 동해안 지역에 대한 지배권 강화

 

* 동해안 지역은 남북으로 완만한 지형을 이루고 있어 일찍부터 한반도 남북을 쉽게 오갈 수 있는 교통로가 개발 되었음

* 해안을 따라 평야가 형성되어 있고, 백두대간이 천혜적 방어막을 형성하고 있어 동예를 비롯한 여러 군장국가 형태로 상당가간 유지되었음

* 강릉지역의 예국(濊國), 삼척지역의 실직국(悉直國), 울진지역의 파조국(波朝國, 또는 파단국(波但國)이란 군장국가가 공존해 있었는데, 이들 세 나라를 통칭하여 창해삼국(滄海三國)이라 했다.

- 1988년 봉평 신라비 발견, 신라에 복속된 실직국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이를 진압한 내용이 비문에 새겨져 있음. 이 비석을 보겠다고 일본 하타()씨 가문 사람들이 찾아옴.

- 하타씨는 신라에 패해 복속된 실직국 후예로 일본에 망명한 부족의 후예로 추정

  * [박종인의 땅의 歷史] 조선 왕실이 500년 동안 찾아 헤맨 왕조의 뿌리, 준경묘 - 조선일보 (chosun.com)

 

 

4. 태백의 지배세력

 

명주군왕 김주원이 강릉 일대를 지배하면서 태백 일대는 신라말 고려초 역사 변동의 중심이 되었다.

 

강릉시 성산면에 있는 명주군왕릉이라고 불리는 강릉 김씨 시조묘가 있다.

- 김주원은 명주군왕이라 불리지만 원래 신라 수도 경주에 살았던 진골귀족이었다.

 

8세기 후반, 신라왕실은 성골귀족은 대가 끊기고 진골귀족이 장악하였다. 왕위는 쟁탈전에서 승리한 진골귀족이 차지하였다.

- 김주원은 김경신에 패해 명주(강릉)으로 낙향 했다. 명주는 그의 선대부터 경제적 연고가 있던 지역이엇다.

 

787년 김주원은 명주의 독자적 지배를 행사하는 명주군왕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명주에 남아 있던 김주원의 후손은 명주일대뿐만 아니라 남한강 유역까지 다스리는 호족세력으로 성장하였다.

- 명주군국이란 독자적 국호를 가진 제후국으로 일종의 봉건제의 유형을 띠었다.

- 궁예의 태봉을 건국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 나말여초 변혁기에 태백문화권의 독자성을 지켜 가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미륵불의 화신, 태봉왕 궁예

- 궁예는 원주, 강릉지역을 기반으로 북한강 일대를 점령한 후, 철원에 태봉 건국

- 미륵신앙을 기반으로 왕권전제화를 실현하려다 신하들의 반발로 실패

- 궁예는 왕건을 추대한 측근세력에 의해 숙청

 

신라사회에 저항하면서 독자적 세력을 유지하였던 태백문화권의 정치세력은 이후 역사의 주도권을 한강 하류에 자리한 정치세력에게 넘기고 오랜 침체에 빠져 들었다.

 

 

5. 태백의 불교와 다양한 문화

 

< 강릉 단오제 >

 

음력 320일부터 제사에 소용될 신주(神酒)를 빚는 데서 시작하여 단오 다음날인 56일의 소제(燒祭)까지 약 50여 일이 걸리는 대대적인 행사이다.

- 중요무형문화재 제13,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백두대간 대관령에 국사성황당과 산신각이 있다.

- 성황신(서낭신)은 원래 성을 지켜주는 신이었다. 세월이 지난뒤 토속신으로 변해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정착

- 대관령 국사성황당의 주신은 범일국사이고, 산신은 김유신임

 

강릉 단오제는 삼한시대 이래 강릉 일대의 고유신앙을 대변해온 축제였다.

- 우리 민족의 고유 축제 원형, 일본의 마쯔리 원형?

 

 

< 태백의 불교 >

 

태백문화권에는 상원사, 월정사, 낙산사 등 이름난 고찰들이 들어서면서 교종 불교 가운데 특히 화엄사상이 크게 발전하였다.

- 화엄종의 전통위에서 새로운 선종 사상이 꽃 피웠고, 교와 선의 일치를 추구한 불교 융합의 터전이 되었다.

 

 

불보살이 머물고 있는 오대산

- 신라이래로 풍수가들은 국내 명산 중 가장 좋은 산으로 오대산을 꼽으며, 불법이 길이 번창할 곳이라고 하였다.

- 처음에는 단순히 문수보살이 상주하는 곳이었으나, 오방불 신앙이 수용되면서 다섯봉우리에 각각 불보살이 상주하는 곳으로 성역화

- 7세기 초 자장은 당나라 오대산에서 기도하던 중 신라 오대산에 문수보살이 머문다는 계시를 받고 귀국해 월정사를 지음

 

세조가 문수동자를 만나 괴질을 고친 상원사

- 신라시대 창건된 상원사는 고려말 특히 억불정책을 폈던 조선시대에 와서 번창하였음

 

3대 관음성지 낙산사

- 낙산사는 의상이 세운 사찰로, 서해 강화도 낙가산 보문사와 남해의 보리암과 함께 대표적인 관음 도량임.

 

사굴산문, 범일과 굴산사

- 범일은 명주 도독의 청으로 굴산사 주지가 됨

- 범일은 선종인 사굴산문을 열었고, 강릉단오제의 주신이 되었음

 

태백문화권이 보살주처신앙의 근원지가 된 이유는, 이곳이 처녀림과 같은 곳으로 때가 묻지 않은 곳이었기 때문이며, 신라중대에 불교의 대중화가 확대되면서 지방에서도 불교가 성행하고 있었던 배경에서도 찾을 수 있다.

 

고려시대 불교

 

 

< 관동팔경 >

 

관동팔경은 고려시대부터 널리 알려진 관동의 명승지

- 통천의 총석정, 고성의 삼일포, 간성의 청간정, 양양의 낙산사, 평해의 월송정, 강릉의 경포대, 삼척의 ㅇㅇㅇ, 울진의 ㅇㅇㅇ

* 신라 화랑들이 수련하고 풍류를 즐길 만큼 빼어난 경치지만, 언제부터 회자되었는지 확실하지 않음

 

관동별곡

-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관동 일대를 유람하며 지은 글

 

 

< 공양왕릉과 준경묘 >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에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의 무덤이 있다.

- 고양에 있는 공양왕 무덤은 태종때 복위돼 이장한 것으로 본다.

 

준경묘는 태조 이성계의 5대조 묘

- 풍수지리적으로 명당터며, 묘주변 금강송이 아름다움

 

 * 영해 이색, 삼척 이승휴

 

 

 

6. 근대 격동기 은둔과 저항

 

< 화서학파와 위정척사 >

 

북한강 양평 화서 이항로(17921868) 문하의 유생

- 존화양이론에 기초, 한말 위정척사론과 의병항쟁의 사상적 기틀을 다져놓았다.

* 주자와 송시열을 위대한 인물로 받듬

- 1866년 프랑스 군함이 침입하여 강화도를 약탈한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김병학의 추천으로 동부승지가 되어 흥선대원군에게 척화론을 건의, 이를 국론으로 채택

- 문인으로는 의암 유인석, 면암 최익현 등 조선말 위정척사와 의병운동의 중심 세력

 

* 강화학파 : 숙종 말년 강화도에 은퇴해 학문을 닦은 정제두(鄭齊斗)의 양명학적 학풍을 이은 조선후기의 학파.

- 소론이라는 당색과 상호간의 혈연적 관계로 인해 250년 간 학맥을 이어나갔다.

- 이건창, 황현, 정인보

 

화서학파의 반개화, 반일운동은 한말 자주적 민족주의 운동의 본류를 이룰 정도로 최대 규모로 장기간 지속되어 일제 침략기의 항일 의병투쟁을 주도하였을 뿐 아니라, 일제 강점기의 국내외 독립운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한국 근대 민족운동사에서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 황사영과 배론성지 >

 

천주교는 초기에는 학문적 차원에서 이해되었으나, 18세기 들어와 종교적 차원에서 받아들여졌다.

- 실학자 이익과 안정복의 문인인 권철신 권일신 형제,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3형제

- 권철신의 지도아래 수도생활을 시작했고, 이벽과 이승훈 참여

 

1801년 신유박해 때 300여명이 순교하였다

-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하면서 남인정권을 꺽기위한 계책 

 

이 이후 많은 천주교도들이 제천 배론 산골에 숨어 살기 시작

 

황사영의 백서 발견

- 신앙의 자유와 조선 교회 재건방안, 북경 주교에 전달 목적

- 청나라의 내정간섭과 서양 배와 군대 파병 요청

 

 

< 동학사상 정비와 부활 >

 

1860년 경주에서 동학을 창시한 최재우가 1963년 정부의 탄압을 받아 사형당함

 

2대 교주 최시형이 태백산간에 은둔하여 동학사상을 정비하고 1880년대 후반 포교활동

- 1880년 인제에서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 인쇄

- 1890년 동학은 기나긴 잠복기를 거쳐 전국으로 확산

 

* 고성 왕곡마을 동학의 빛비석 : 18892천도교 제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 선생이 수개월간 이곳 왕곡마을에 은거하며, 동학을 포교해 민중을 교화했다고 한다.

 

 

< 태백의 동학농민전쟁 >

 

태백문화권에서는 19849월부터 11월까지 3개월동안 그야말로 불꽃처럼 농민전쟁이 일어났다.

- 동학재기의 보루가 되었던 태백문화권에서는 1894년 초 1차 동학농민전쟁 때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으나, 9월경 2차 농민전쟁이 일어나면서 농민군이 봉기하였다. 

- 그해 11월 말까지 3개월에 걸쳐 불꽃처럼 일어났고, 희생자만도 수천명에 달했다.

- 동학교단의 지시나 지원없이 독자적인 활동

 

 

< 전기 의병, 호좌창의진 >

 

1895년 국모시해, 단발령 발포등 망국의 변을 당하자 화서 이항로의 문하생인 유인석이 의병대장에 취임, 호좌창의진 출범

- 단양군수, 청풍군수, 충주부 관찰사 처형 충주성 점령

- 관군과 일본군에 밀려 패배를 거듭하다가 만주로 망명

 

호좌창의진의 의병정신은 한마디로 말하면 성리학적 민족주의였다.

 

포수와 동학농민군 출신들로 구성된 병사부의 전투력은 전기의병 가운데 가장 강력

 

유인석이 이끈 호좌창의진은 의병사의 첫장을 장식할 뿐아니라 한국독립운동의 개막을 알리는 신호탄

 

 

< ‘관동창의군과 민용호 >

 

또하나의 전기의병을 대표하는 민용호의 관동창의군

- ‘호좌창의진이 제천 충주 영월 정선 등지의 내륙지역 주무대

- ‘관동창의군은 강릉을 중심으로 울진에서 원산에 이르는 동해안 주무대

 

민용호는 경남 산청에서 태어나 명성황후의 문중 양자로 들어감

- 1895년 명성황후 시해되자 예의의 조선이 하루아침에 왜의 땅으로 변하고 말았다면서 의병을 일으킴

 

초기에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으나, 결국 거듭된 패전 끝에 만주로 넘어감

 

위정척사적 의식이 강했고, 의병해산을 거부하고 강력한 무장투쟁을 전개했고, 최후의 수단으로 해외망명을 결행한 점 등 활동양상에서 두 의병부대는 공통점이 있다.

 

 

< 태백전역을 물들인 후기의병 >

 

1907년 광무황제의 강제 퇴위, 군대해산 등으로 일제 침략이 노골화되면서 의병전쟁이 전국적으로 확산

- 지방의 질서유지를 목적으로 설치된 원주진위대 해산군인을 중심으로 의병운동전개

- 의병부대만 50개 넘었고 의병은 수만명으로 늘었으며, 태백의 골짜기와 능선은 모두 의병의 요새가 되었다.

 

190813도창의군 1만 여명이 양주에 집결, 서울을 위해 동대문까지 진출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해산하였다.

- 원주에 중심을 둔 관동창의대가 중심이 되었다.

 

< 태백의 3·1운동 >

 

3·1운동은 전국적으로 2백만명이 참여했고, 시위횟수는 2천여회

 

도시, 농촌, 산촌, 어촌을 막론하고 전지역에서 발생

 

천도교, 기독교, 불교인, 유학자, 화전민 등 모든 계층 시위 참여

 

의병출신들이 대거 참여

 

평화적시위와 폭력시위가 함께 나타남

 

   * 영해 만세운동 

 

 

7. 마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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