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이 지난 지 열이틀이나 되는데, 날씨는 한 겨울이었다. 전국에 한파주의보, 강풍주의보가 내린 곳이 많았고, 남쪽 바닷가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장갑을 끼고 머프로 머리를 감싸고 목을 둘렸는데도 추위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대형 트럭이 무섭게 달리는 녹산산업대로를 지나 진해 용원동으로 들어섰다. 도시의 분위기는 확 바뀌었다. 계획도시 부산 명지와 녹산 쪽과는 달리 진해 용원은 다소 어수선했지만 정감이 느껴졌다. 날씨와는 달리 봄 바다 냄새가 물씬 풍기는 해산물이 길가 좌판 위 붉은 다라이에 담겨 있었다. 멍게 소라 털게 새조개 쭈꾸미 도다리... 여기서 잡은 것이냐고 물었더니 대부분 가덕도 인근 바다에서 잡은 것들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올해는 다른 해보다 날씨가 따뜻해서 그런지 새조개가 빨리 나고, 씨알도 굵다고 했다.
점심을 먹기엔 좀 이른 시간이었지만, 바로 옆에 있는 장어조개구이집에 들어갔더니 가게 안에는 벌써 손님이 차고 빈자리가 몇 개 없었다. 한참 손님이 많이 올 시간에 혼자 들어가는 것이 겸연쩍어 구석자리에 앉아 요즘 가덕도에 많이 잡힌다는 생대구탕을 시켰다. 옆 테이블엔 살아 꿈틀대는 곰장어 구이에 소주를 마시는 일행이 있었고, 다정하게 새조개 샤부샤부를 즐기는 남녀도 있었다. 나도 혼자만 아니었다면 곰장어 구이도 먹고, 새조개 샤부샤부도 먹었을 텐데... 날씨는 심술을 부려 겨울 같았지만 음식점 안에는 봄 내음이 진하게 느껴졌다.
안골포 바다에는 바다새가 한가로이 무리 지어 떠있었다. 평온해 보이는 곳이었지만, 임진왜란 때 웅포해전이 있었던 곳이었다. 이순신 장군이 다섯 번째 승리를 거둔 해전으로, 왜병이 호남으로 서진하려는 의지를 좌절시킨 해전이었다고 했다. 부근에는 일본과 관련된 역사적 유물이 또 있었다. 조선시대 일본인이 거주했던 삼포 왜관 중 제일 규모가 컸던 제포 왜관이 있었으며,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쌓은 안골 왜성이 안골포가 내려다 보이는 높은 곳에 터를 잡고 있었다.
이 지역은 조선 조정에서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지역이었다. 제포 왜관에 거주하는 일본인 수가 늘어나고 횡포가 심해지자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웅천읍성을 쌓았다. 웅천읍성은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주둔한 적이 있기도 했으나, 오랜 기간 남해안을 방어하는 거점 역할을 했다. 웅천은 일본에게 열린 교역의 장소였으며, 일본의 침략을 가장 먼저 받은 곳이기도 했다.
웅천읍성 바로 곁에 주기철 목사 기념관이 있었다. 주기철 목사는 일제강점기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항일운동을 펼치다 순교하신 분이다. 평안도 오산중학교를 졸업하고, 평양 장로신학교 입학하여 목사의 길을 걸었다. 웅천에서 태어난 그가 고향 근처 학교에 가지 않고 저 멀리 정주와 평양까지 가게 된 데는 일본인에 대한 적개심과 나라를 구해야겠다는 의분심에 불타올랐기 때문이라고 했다. 일본과 좋은 인연보다 악연의 역사가 오랫동안 쌓인 웅천지역의 감정이 자연스레 발로 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지난 역사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 있는 웅천지역도 읍성을 지나 바닷가로 나가니 빠르게 변모하고 있었다. 바다를 매립하고, 새로운 아파트가 들어서고, 해양레저스포츠 시설인 마리나항만을 건설 중에 있었다.
'아 - 어디로 가는 배냐 어디로 가는 배냐
황포돛 배야'
'바람 부는 저 들길 끝에는
삼포로 가는 길 있겠지'
뜻밖으로 노래비 두 개를 보았다. 황포돛배의 배경이 진해 바닷가일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고, 노랫말 속의 삼포가 실제 지명일 거라고도 예상치 못했다. 이 지역 출신 작사가 이일윤이 군 근무 시절 고향 바다를 그리워하며 황포돛배 노랫말을 썼고, 삼포로 가는 길은 이혜민이 고등학교 시절 실제 삼포항을 보고 작사 작곡했다고 했다.
멀리서도 눈에 확 띄는 해양생물테마파크, 거대한 조선소 단지를 지나 언덕길을 넘으니 진해항과 진해시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북쪽으로 천자봉 시루봉 웅산 장복산으로 이어지는 완만한 산능선이 감싸고 있었다. 전형적인 배산임수, 좋은 풍수 입지조건을 갖춘 곳이 아닌가 싶었다. 엎어놓은 떡시루를 닮은 시루봉은 어디서도 잘 보이는 진해의 시그니처였다.
남파랑길8코스는 진해를 감싸고 있는 산의 5부 능선을 따라 계속 이어졌다. 거리는 15.7km, 그런데 중간에 음식점이 한 곳도 없어 보였다. 아침도 토스트에 커피 한잔으로 부실하게 때웠는데, 점심을 거르고 트레킹을 할 수는 없었다. 장천동아파트 단지 옆길에서 상가거리로 한참 들어가 점심을 먹었다. 식당주인에게 물으니 친절하게 남파랑길과 연결되는 산길을 알려 주었다.
아파트 뒷길 포장도로를 따라 조금 걷다 보니 진해만생태숲이 나타났다. 친절하게 나무 이름표가 달려 있었다. 종가시나무 녹나무 비자나무 사스레피나무... 남부해안지역에서 볼 수 있는 늘푸른 상록수가 많았다. 그리고 남파랑길과 연결된 임도를 만났다. 임도는 오르내리막이 거의 없는 평탄한 길이었다. 진해시민들이 산책하기에 딱 좋아 보였고, 평일임에도 산책하는 사람들이 제법 눈에 띄었다. 길에는 차량통행을 통제하고 있었고, 길 옆으로 편백나무 왕벚나무가 심겨 있었다. 벚꽃이 피는 초봄, 신록이 짙어가는 초여름, 짙푸른 녹음이 무성한 초가을, 언제 와도 좋을 것 같았다.
'창원 편백숲 浴(욕) 먹는 여행' 지금처럼 나뭇잎이 떨어진 계절에도 편백나무 피톤치드향을 맡으면서 언듯언듯 보이는 진해만을 바라보며 걷는 것도 좋았다.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것은 편백나무 아래 자라는 차나무였다. 대나무 숲 속 차밭은 본 적은 있지만 편백나무 숲 속 차나무 밭은 신기했다. 애초 찻잎을 따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산불예방을 위한 방화림으로 조성하였다고 했다.
안민고개를 지나고 하늘마루를 넘어 삼밀사 입구에서 편백치유의 숲으로 하산했다. 진해하면 떠오르는, 해군과 벚꽃과 관련된 곳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남파랑길6코스(14.8km), 남파랑길7코스(11.0km), 남파랑길8코스(15.7km) (총 41.5km)
<용원 - 안골왜성 - 웅천읍성 - 삼포항 - 제덕사거리(박, 석식, 간편조식) - 진해해상공원입구 - 행암동(중식) - 진해생태숲 - 해병훈련체험테마쉼터 - 안민고개 - 하늘마루 - 편백치유의 숲 -(택시) - 창원 상남동(박,석식)>
2.16일 11시 - 17시,2.17일 7시 30분 - 17시 (총 15시간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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