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30일, 점심때 장승포에 도착했다. 버스터미널 주변에서 점심을 먹을까 두리번거리다, 장승포항 쪽으로 걸었다. 하늘은 맑았고, 태양은 제법 따갑게 내려쬤다. 장승포초등학교를 돌아 조금 더 내려가니 음식점 거리가 나타났다. 횟집, 장어집, 돼지국밥집, 칼국수집... 마음이 끌리는 식당에 들어거서 된장찌개에 막걸리 1병을 시켰다. 깔끔하고 소박한 식당에는 얼굴이 닮은 중년 여자 두 명이 주방일과 상차림일을 나눠하고 있었고, 건너편 자리에는 작업복을 입은 중장년 3명이 돼지고기 삼겹살에 소주를 세병째 비우고 있었고, 젊은 청년은 혼자서 핸드폰을 보면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이번 여행은 독일에서 '프랑크푸르트 9주 살기'를 하면서 구상한 것이다.
지난해 남파랑길을 걸으면서 이런저런 이유로 스킵하였던 거제도 구간을 어떻게 할까, 숙제로 남았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남파랑길 원고를 교정하고 보완하면서, 거제도 여행을 에필로그 여행으로 성격 지어 마무리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혼자가 아니라 친구들과 함께 하는 여행을 하기로 했다. 지난해 몇몇 구간에서 친구들과 동행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나 홀로 여행이었다. 나 홀로 여행의 좋은 점도 많았지만 즐기기보다는 탐구하듯이 여행을 한 것이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에필로그 여행으로 떠나는 거제도 여행은 '친구들과 함께 즐기면서 하자'는 컨셉으로 구상했다.
코스는 장승포에서 출발하여 남파랑길을 따라 저구까지 걷고, 저구에서 배를 타고 매물도와 소매물도로 건너가 섬 트레킹을 하고 또다시 배를 타고 통영으로 넘어가 귀가하는 것으로 짰다. 걷는 총거리는 약 56km, 일정은 3박 4일로 하고 친구들은 트레킹 첫날 저녁에 지세포에서 만나 둘째 날부터 함께 걷기로 했다. 계획을 짜놓고 보니 바닷가 숲길을 걷고, 몽돌해변을 걷고, 산길을 걷고, 배를 타고 섬으로 건너가 섬 트레킹도 하는 봄 숲과 바다를 함께 즐기는 환상적인 트레킹 여행코스가 아닌가 싶었다.
근로자의 날까지 삼 연휴가 겹친 탓인지 장승포항에는 제법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부둣가에는 낚싯대를 드리운 사람들도 여럿 보였다. 진중하게 낚싯대를 응시하며 낚시에 몰입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캔맥주를 마시며 물고기 낚시보다 친구하고 시간을 낚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고, 휠체어를 타고 아들과 함께 낚시를 즐기는 부자도 보였다. 동백섬 지심도 여객터미널에는 배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좋은 계절 4, 5월 봄 연휴를 맞아 바다를 즐기고자 하는 사람들로 장승포항은 살짝 들떠있었다. 때마침 하늘도 흐리고 비 오다가 개여 나들이 여행하기에는 최적의 날씨였다.
장승포항을 빙 돌아 방파제를 지나서 해안가 숲길로 접어들었다. 되돌아서 보는 장승포시가지는 야트막한 구릉 아래 남쪽 바다를 바라보고 포근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해안을 따라 조성된 숲길은 너무 좋았다. 연초록의 나뭇잎 사이로 언뜻언뜻 푸른 하늘도 보였고, 성긴 나뭇가지 사이로는 파도에 밀려오는 하얀 바다도 보였다. 어린 나뭇잎이 흘러 보낸 숲속 햇살은 부드러워 아늑함이 느껴졌다. 바람 소리, 파도 소리도 듣기 좋았고, 나를 따라오는 새소리에도 기분 좋았다. 앙상한 겨울 숲길은 뭔가 허전하고, 짙은 여름 숲길은 두렵기까지 하는데 비해, 신록의 봄 숲길은 향기롭고 평화로웠다.
평탄한 숲길에 취해서 걷다가 거제대학 쪽으로 가는 남파랑길을 놓치고 해안가 숲 길로 계속 걸었다. 절벽아래 바위에는 낚시하는 사람들도 보였고, 동백나무 숲을 지나자 해안가 바다 위로 난 나무데크 길이 나타났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지세포항이 건너다 보였다. 지세포 앞바다에는 사람들이 카누를 타고 있었다. 파도가 센 동해 바다에서는 서핑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는데, 호수처럼 잔잔한 이곳 바다에서는 카누를 즐기고 있었다.
미리 예약한 게스트하우스에는 친구 한 명이 먼저 와 있었고, 샤워를 하고 조금 있으니 친구 3명이 도착하여 5명이 됐다. 당초 7명이 함께 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1명이 심한 복통이 나서 빠졌고, 1명은 사업 제안서 제출이 늦어져 내일 저녁 합류하기로 했다.
다음날 아침 6시 30분에 모두 일어났다. 편의점에서 간단히 아침을 먹고 간식을 준비해 기분 좋게 출발했다. 날씨는 여전히 좋았다. 해안가 마을길을 조금 올라가자 바로 옛 성터가 나타났다. 성벽은 허물어져 흔적만 있었고, 빈터는 잡초만 무성했다.
대롱대롱 하얀 초롱꽃을 단 때죽나무가 남파랑길 리본을 달고 안내하는 길을 따라 숲길로 들어섰다.
숲길에서 제일 먼저 눈길을 끈 것은 담쟁이덩굴이 수관 밑까지 달라붙어 있는 해송군락이었다. 소나무가 답답해 보였다. 그런데 담쟁이덩굴과 소나무는 기생관계도 공생관계도 아니고, 서로에게 손해를 끼치지는 않는다고 한다. 송담이 한약재로 유명한 걸 보면 아무래도 담쟁이가 덕을 보는 것 같은데, 소나무가 아량을 베푸는 것은 아닐까.
망산에 올랐다. 해발 304.9m, 정상에는 봉수대가 복원되어 있었다. 봉수대 위에서 바라보는 바다풍경은 환상적이었다. 끝없이 푸른 바다가 펼쳐졌고, 왼편으로 동백꽃으로 유명한 지심도가 떠 있었고 오른편으로는 낭만의 섬 외도 그리고 저 멀리는 신비로운 바위섬 해금강까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해안 끝자락 서이말등대에서는 대마도까지 가물가물 흐릿하게 보였다.
텅 빈 백사장에서 뭔가를 열심히 줍고 있는 사람이 있어 가까이 가서 보니 조개껍질을 줍고 있었다. 궁금해서 물어보니, 말하면 믿겠냐고 하면서 '얘들을 모아 태풍을 막는다'라고 기상천외한 대꾸를 했다. 남의 일에 신경 쓰지 말고 가던 길이나 똑바로 가라는 뜻인가.
구조라에서 싱싱한 해산물에 소주를 파는 파라솔 노점을 만났다.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멍게, 소라, 해삼 그리고 석화를 안주로 소주를 마시면서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구조라 성에 올랐다. 임진왜란 때 세워진 왜성일 거란 생각으로 올랐는데, 조선초기에 왜적을 막기 위해 세워진 우리나라 진성이었다.
어느 날, 한려해상국립공원동부사무소로 한 통의 편지와 함께 선물이 도착했습니다. 그 선물은 바로 몽돌이었습니다.
미국에 살고 있는 한 소녀는 방학을 맞아 한국의 할머니 댁을 방문하였고, 가족과 함께 몽돌해수욕장을 방문하였다고 합니다. 몽돌해수욕장의 몽돌이 너무나 아름다워 집으로 몽돌 두 개를 가져갔고, 어머니에게 혼이 난 뒤 몽돌을 되돌려 보낸 것입니다. -한려해상국립공원동부사무소
망치몽돌해수욕장에 오후 느지막하게 도착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합류하기로 한 친구도 도착했다. 미리 예약한 숙소에 배낭을 내리고 사워를 하고 돼지고기 삼겹살집에서 제법 오랫동안 술을 마시며 얘기 꽃을 피웠다. 그리고 다음날 전날 그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본격적인 트레킹 여행에 나섰다.
마을 뒤편 오르막 산길을 올라 고갯마루에서 임도로 접어들었다. 임도는 평탄했고, 산그늘이 내려앉아 햇볕을 피할 수 있는 산의 북사면이라 걷기에 너무 좋았다. 공기도 상쾌했고, 바람결에 향긋한 꽃향기도 느껴졌고, 무엇보다 시야가 탁 트여 신록이 물들어 가는 봄산 풍경을 막힘없이 볼 수 있어 좋았다.
걷는 길은 남파랑길 22코스 일부와 23코스, 약 17km. 해발 0m에서 해발 550m 노자산 정상까지 올라갔다 다시 내려가는 산길 코스였다. 남파랑길에서 이렇게 긴 거리 산행을 하는 코스는 없었다. 산행코스라 기대도 되었지만 친구들이 어떻게 걸을까, 걱정도 됐다. 만약 힘들면 1.5km 가파른 구간, 학동고개에서 노자산 정상까지 케이블카를 타기로 했다.
가끔 산행을 같이 하고, 포럼도 같이 하는 친구들이지만 만나니 말이 많았다. 북한 핵무장, 임진왜란, 정치얘기, 골프얘기... 나무와 야생화 이야기를 하면서 관심을 자연에 돌려보려 해도 어느새 대화는 뒤죽박죽 얽히고 말았다. 그런 중에도 아름다운 풍경을 보거나 예쁜 꽃을 보고는 모두 감탄했다.
학동고개 케이블카 탑승장에서 2명은 케이블카를 타고, 4명은 산길을 계속 걸었다. 숲 속 산길에는 뜻밖의 놀라운 풍경이 펼쳐졌다. 연초록 숲 아래 초록의 그늘사초가 카펫처럼 깔려 있었다. 그 풍경은 너무나 신박했고, 환상적이었다. 포항 내연산과 이화령 조봉에서도 멋진 사초군락지를 본 적이 있지만, 거제 노자산 사초 군락지는 넓이나 밀도면에서 최고였다.
노자산 전망대에서 보는 바다는 가히 일품이었다. 짙은 옥빛 바다 그리고 올망졸망 크고 작은 섬들이 떠 있는 한려수도의 수려한 풍광이 눈앞에 전개되었다. 하늘이 맑아 한산도 그리고 통영 미륵산까지 선명하게 눈에 잡혔다. 거제도에서 제일 높은 산 가라산을 거쳐 마지막 숙박지 저구에 도착했다. 이번 여행의 마지막 밤, 싱싱한 생선회를 먹을 참이었는데 아쉽게도 횟집이 쉬는 날이라 낙지볶음에 해물된장으로 대신했다.
여행 마지막 날, 편의점에서 산 컵 라면과 햇반으로 아침을 해결한 뒤 매물도로 가는 배에 올랐다. 매물도 섬 일주 트레킹을 하고 다시 배를 타고 소매물도로 넘어갔다. 소매물도에서 회덮밥으로 점심을 든든하게 먹은 후 썰물로 드러난 몽돌길을 따라 아름다운 등대섬까지 천천히 다녀왔다. 소매물도에는 동백꽃은 이미 졌고, 곳곳에 찔레꽃이 보였다. 하얀 찔레꽃뿐만 아니라 붉은 찔레꽃도 있었다. 흥얼흥얼 추억이 많은 노래를 불렀다.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 ∼∼
엄마일 가신 길에 하얀 찔레꽃 ∼∼
통영행 마지막 배를 탔다. 그리고 충무김밥집에서 김밥을 먹고 여행을 마무리했다. 친구들은 덕분에 멋진 여행을 했다고 이구동성으로 고마워했다. 나에게도 의미 있는 여행이었다. 남파랑길 여정을 마무리하는 여행이었고, 친구들과 즐기면서 함께 하는 여행이었기에 가슴 벅찼다. 그리고 독일에서 9주 동안 있으면서 독일의 아름다움에 감탄했었는데, 이번 여행을 통해 우리나라의 아름다움에 새삼 감동했다. 독일의 풍경은 이색적이었지만 단조로웠고, 우리의 풍경은 익숙하지만 다양한 멋이 느껴졌다. 특히 거제도와 매물도 섬여행에서 그 다양한 아름다움의 진수를 제대로 만끽했다.
<일정> 2023.4.30 - 5.3 (3박 4일, 55.9km, 남파랑길 20일부 - 23코스, 매물도, 소매물도)
<4월 30일> 9.0km
장승포터미널 - 장승포항(중식) - 지세포(석식, 박)
<5월 1일> 21.7km
지세포(간편조식) - 지세포성 - 망산 - 서이말 등대 - 와현모래숲(중식) - 구조라 - 구조라성 - 망치몽돌해변 (석식, 박)
<5월 2일> 16.9km
망치몽돌해변(조식) - 양화삼거리 - 케이블카탑승장 - 노자산(간편중식) - 가라산 - 저구(석식, 박)
<5월 3일> 8.3km
저구(간편조식) - (배) - 매물도 - (배) - 소매물도(중식) - 등대섬 - (배) - 통영(석식)
* 통영시외버스터미널에서 버스로 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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