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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파랑길

프롤로그

걸으면서 대한민국의 아름다움을
보고, 듣고, 느끼고, 상상하고, 표현하자.

2년 전 해파랑길을 걷고 우리나라의 아름다움을 새삼 느꼈다. 그래서 그 느낌을 글로 표현하게 되었고, 욕심내서 책으로 내기까지 하게 되었다. 그런데 보고 느낀 것을 글로 쓰고 책으로 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걸으니, 세상이 새롭고 달라 보였다. 또 다른 차원의 세상이 열리는 것 같았다. 그냥 걸을 때는 무심코 지나쳤을 풍경, 나무, 돌덩어리도 나에게 얘기를 하는 것 같아, 더 유심히 보게 되고 애정을 갖고 상상하게 되었다. 남파랑길은 아예 처음부터 그 과정과 느낌을 글로 표현하고 책으로 내겠다는 생각으로 걸었다. 

남파랑길 1,470km, 부산 이기대에서 전남 해남 땅끝마을까지.

2022년 1월부터 남파랑길 트레킹을 시작했고, 연말까지 완주할 목적이었다. 첫 출발지 부산 이기대, 해파랑길의 출발지이기도 한 이기대에 1월 17일 오후 5시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7시에 다시 이기대로 나와 본격적인 남파랑길 트레킹을 시작했다. 첫 출발점인 이기대의 일몰과 일출 풍경을 꼭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남파랑길을 완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 나름의 느낌에 충실하고 싶었다. 그래서 꼭 보고 싶은 곳이 있으면 남파랑길을 벗어나서라도 가보았다. 어떤 구간에서는 코스를 스킵하기도 했다.

부산에서는 영도 봉래산 정상에 올라 부산의 아름다운 뷰에 감탄했고, 감천동문화마을과 아미동비석마을에도 가보았다. 경남에서는 창원 장복산 정상에 올라 창원 마산 진해 전경을 둘려보기도 했고, 고성에서는 소가야 왕릉을 찾아가기도 했으며, 통영에서는 한산도 제승당을 배 타고 다녀오기도 했다. 그리고 전남에서는 강진 고려청자 유적지를 찾아갔었고, 해남에서는 남파랑길 코스인 임도길이 아닌 등산로를 따라 상왕봉에 오르기도 했다.

고성, 통영, 거제 구간을 걸을 때는 어떻게 걸을까, 고민스러웠다. 남파랑길은 <고성 - 통영- 거제- 통영- 고성>, 행정구역을 왔다 갔다 하며 연결돼 있었다. 생각 끝에 행정구역 중심으로 걷기로 했다. 먼저 고성을 다 걷고, 다음에 통영을 걷기로 했다. 그리고 거제는 땅끝마을까지 걸은 후 맨 마지막에 걷기로 했다.

부록으로 실은 '남파랑길 트레킹 회차별, 일자별 여정'에서 전체 일정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도록 정리하였다.

남파랑길에 관심이 많은 친구들이 더러 있었기에 떠나기 전에 친구들에게 일정을 알려 동행하기도 했다. 부산에서는 부산에 사는 친구가 동행을 했고, 통영에서는 서울 친구가 쭉 함께 걸었으며, 남해에서는 서울 친구와 남해군청과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는 교수 친구가 길동무가 돼주었다. 그리고 맨 마지막 해남구간은 고향 친구들이 찾아와 함께 걸었다.
 
매서운 바닷바람을 맞기도 했고, 그늘 없는 뙤약볕 아래 포장도로를 고행하듯 걷기도 했다. 아름다운 풍경에 감탄하기도 했지만 지루한 풍경에 내가 왜 걷지, 스스로 묻기도 했다. 걷는다는 것은 나와의 대화였고, 세상과의 대화였고, 자연과의 대화였다.

여행은 나에게 가장 즐겁고 의미 있는 삶이 되었다. 여행계획을 세우고, 여행을 다녀오고, 그것을 글로 표현하는 일련의 행위는 가장 소중한 일상이 되었다. 은퇴 후 10년째, 나의 변화된 모습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한 때 심한 우울증에 빠지기도 했었다. 세상이 원망스럽기도 했었다. 나의 가치관이 와르르 무너지는 허무감에 빠지기도 했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패닉상태에 빠지기도 했었다. 가장 이기적으로 사는 것이 가장 이타적으로 사는 방법이다, 라는 생각도 했었다. 가족들이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그리고 걷기 여행은 극도로 불안한 나를 구원한 선물이었다.

11월, 아직도 보성 장흥 강진 완도 해남 구간이 남은 때였다. 하던 대로 걸으면 연말을 넘길 수밖에 없었기에 계획을 변경하기로 했고, 이왕이면 11월에 끝내자는 생각으로 평소보다 훨씬 긴  9박 10일 일정을 짰다.

7월, 코로나19 확산으로 중단되었던 해외여행이 풀려 키르기스스탄 트레킹을 다녀온 것이 일정 지체의 한 원인이기도 했다. 때 묻지 않은 청정지역, 키르기스스탄은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 감동이 쉬 가시질 않아 '에피소드 여행'으로 담았다.
 
트레킹 여행 중 잠자리를 구하지 못해 애를 먹기도 했고, 식당을 만나지 못해 배를 곯기고 했다. 하지만 불편한 기억보다 즐겁고 고마웠던 기억들이 더 많다. 소주 한잔을 건네주던 마을 가꾸기 할머니들, 고구마 2개를 쥐어 주던 밭일 아주머니, 새벽 일찍 밥을 챙겨주던 식당 할머니, 어쩌다 만난 동행자들에게 소주파티를 열어주던 펜션 사장, 또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하고 무척이나 친절했던 여사장... 은퇴한 선배를 잊지 않고 시간을 내어준 백승조 남창원농협조합장, 류정훈 농협고성군지부장, 김은수 농협하동군지부장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그리고 남파랑길 트레킹에 함께 동행해 준 친구들, 오수관 김경운 김정오 오하석 안재락 이영석 정영교 장원경 그리고 응원해 준 많은 친구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하고 SNS상에서 응원해 준 분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지금 프랑크푸르트 9주 살기 중이다. 지난해 말 며느리가 독일 해외근무 발령이 나서 손녀를 케어하기 위해 왔다. 아내는 손녀를 봐야 한다는 부담감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지만, 나는 또 다른 여행이며 이참에 남파랑길 원고를 마무리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즐기고 있다. 
 
가족의 응원이 남파랑길 완주에 큰 힘이 되었다. 낯선 독일에서 두려워하면서 국제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채송, 트레킹 기간 중에 태어난 송하와 의젓한 언니로 동생과 잘 노는 설하의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은 생각만 해도 엔돌핀이 솟는다. 나에게 여행의 자유를 준 아내, 여세희의 배려가 없었다면 이 여행은 아예 불가능했을 것이다. 
 
더불어 출판계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흔쾌히 책을 발간해 준 사람과 책 이재욱 사장님, 그리고 꼼꼼히 편집을 해준 000님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안개 자욱한 프랑크푸르트에서
                                                                                                                                                                           2023. 2.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