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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파랑길

남파랑길33. 친구들과 해남 땅끝에 서다

 

드디어 남파랑길 트레킹 마지막, 남은 구간은 89, 90 두 구간.
아침 일찍 기사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택시를 타고 해남 남창으로 넘어가 트레킹을 시작했다. 사흘 전 이 구간을 걸어 건너기도 했었고, 친구들이 조금이라도 편하게 걸을 수 있도록 거리를 단축하고 싶어 택시를 탔다. 그래도 걷을 거리는 24km가 넘었다.

가끔 만나 식사도 하고 여행도 다니는 사이지만, 트레킹을 같이 하기는 처음이었다. 하얀 억새가 늦가을 바람에 춤추고, 싱싱한 보리가 뿜어내는 푸르름이 돋보이는 들길을 걸으니 마치 추억 속 고향으로 함께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오래전에 고향을 떠나 헤어졌고 각자의 방식대로 살아왔지만, 만나니 옛 추억에 잠기고 그저 반가웠다. 멀리 달마산이 머리를 내밀기 시작했다. 경치 좋은 곳에서 사진을 찍기도 했다. 몇 번이나 들었는지도 모를 어릴 적 싱거운 무용담을 듣고 덩달아 낄낄거리기도 했다.

들길을 걷고 구불구불 산길을 걸어 얕은 고개를 넘으니 달마산이 정체를 온전히 드려냈다. 순한 산자락 위에 바위산이 우뚝 솟아 있었다. 강진을 거쳐 해남으로 해안을 따라 이어진 산줄기가 만덕산, 두륜산을 만들고 마지막으로 불쑥 솟아 이룬 산이 달마산이다. 달마산의 기운은 또다시 잔잔하게 흘려 땅끝에서 바다로 그 기운을 감춘다. 달마산 능선 길은 평탄한 편이고 멋진 바다 풍경을 바라볼 수 있으나, 뾰족 뾰족 돌길이라 걷기에는 만만찮다. 안개비 내리는 날 산길 너덜겅에서 길을 잃을 뻔한 적이 있으며, 능선 길에서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손과 무릎을 다친 적이 있다.

 

천년고찰 미황사에 도착했다. 그런데 대웅전은 가림벽에 막혀 있었다. 법당의 해체보수 및 보존복원을 위해 1000일간 휴식을 한다고 쓰여 있었다. 대웅전 사진은 몇 년 전 친구들과 문화탐방 여행 때 찍은 것이다. 공룡등뼈처럼 까칠한 달마산 아래 대웅전은 위엄 있게 앉아 있었었다. 대웅전 색 바랜 단청에서는 오히려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이 느껴졌었다. 대웅전 기둥은 천년의 세월만큼 수많은 주름이 세로로 잡혀있었었다. 예스러움과 쓸쓸함이 함께 묻어 있었던 미황사 대웅전의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해체복원 공사 후 미황사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했다.

공사 중임에도 미황사 경내는 고요했다. 사립문 옆에는 '출입금지'라고 쓴 기와장이 '쉿 조용히 해주세요' 하고 속삭이는 듯했다. 벌써 동안거철이라 그런가. 승방 마당 모퉁이에는 배나무가 잎을 모두 떨구고 무소유 수도승처럼 서있었고, 천리향 나무는 마지막 향기를 모아 공양을 하는 독실한 신도 같았다.

미황사에서 남파랑길 89구간이 끝나고 마지막 90구간이 시작되었다. 이 길은 달마고도와도 겹쳤다. 달마고도는 미황사에서 출발하여 달마산 7부 능선을 걸어 미황사로 돌아오는 17.7km 순환코스였다. 4개 코스로 되어 있으며 완주하는데 6시간 30분 정도 걸린다고 했다. 자연친화적인 치유의 길을 표방하며, 길을 조성할 때 자연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기계를 일절 쓰지 않고 오롯이 사람의 손으로 길을 만들었다고도 했다. 도보 여행자를 위한 정자도 의자도 일체 없었다. 미황사 템플스테이와 곁들여한다면 마음의 단련과 신체의 단련을 동시에 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달마고도는 평탄하고 걷기 편안한 숲길이었다. 달마산의 까칠한 바위 산세가 부처님의 법륜에 순치된 것일까.

 

편백나무 숲길도 걷고, 잡목 숲길도 걷고, 팥배나무 숲길도 걸었다. 나무 한그루 살지 않는 너덜겅도 지났다. 너덜겅은 바위산이 오랜 수축과 팽창을 견디지 못해 강처럼 흘러내린 돌덩어리 지대다. 도솔암 가는 삼거리에서 땅끝으로 가는 미황사 천년역사길로 접어들었다. 바다도 언뜻언뜻 보이기 시작했다. 걷기 시작한지 벌써 4시간째, 친구들 얼굴에는 피곤함이 묻어 있었다. 편편한 곳에 앉아 휴식도 취하고 에너지도 보충했다.

우리 넷은 하동군 옥종면 북방리, 법대리, 대곡리에서 각각 태어나 지금은 폐교가 된 북평초등학교를 함께 다니고 함께 졸업한 친구다. 한 친구는 일찍 서울에 올라와 사업을 시작해 안정적으로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기업체 사장이고, 한 친구는 국립산림과학원 연구원으로 있다가 은퇴 후 요즘도 전국 산에 산림조사를 다니고 있는 나무박사이고, 또 한 친구는 국립축산과학원 원장으로 봉직하다 퇴임한 축산박사이다. 축산박사는 퇴임 후 갑자기 혈액암에 걸려 실의에 빠졌었는데, 27번이나 고통스러운 항암 치료를 받고 회복 중인 의지의 사나이다.

우리가 살았던 고장은 그저 그런 곳으로만 알았었는데, 나름 독특한 풍토를 지닌 곳이란 생각이 요즘 많이 들었다.
마을 어귀, 들 가운데 그리고 마을 앞 안산에는 엄청나게 큰 고인돌이 있었고, 어릴 적 고인돌 위에서 놀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지리산에서 발원하여 빠르게 흐르던 덕천강이 유속이 느려지면서 형성된 충적 들판인 이곳은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기에 좋은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는 지형이었던 것 같다.

어릴 적 아버지로부터 포은 정몽주 선생과 남명 조식 선생 얘기를 많이 들었었다. 정몽주 선생은 인근 영당마을에 있는 옥산서원에 모셔져 있고, 들 가운데로 흐르는 덕천강 상류인 산청 덕산에는 조식 선생의 산천재가 있다. 정몽주의 지조와 조식의 경敬과 의義 실천 유학은 은연중에 조금이나마 체화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고향에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은 근대에 일어난 엄청난 역사적 사건일 것이다. 북방리 고성산에는 동학혁명위령탑이 있다. 1894년 11월 11일 5,000여 명의 동학 농민군은 관군과 일본군에 대항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처참하게 패배했다. 당시 경남지역 가장 큰 전투였다. 어릴 적 우리는 고성산을 이유도 모르고 고시랑이라 불렸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죽은 원혼이 고시랑 거린다고 그렇게 불렸다고 한다.
 
625가 할퀴고 지나간 상처도 뼈저리게 남아있다. 어머니의 산, 지리산의 치맛자락 언저리인 고향 마을은 빨치산의 식량 보급투쟁 지역 중 하나였다. 간간히 부역자로 몰린 집안의 가슴 아픈 사연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어릴 적 이 아픈 사건들에 대한 얘기는 많이 듣지 못했다. 아마 마을 어른들은 마을의 비극에 대해 말을 아꼈던 것 같다.

박태영은 항복지점으로서 하동군 옥종면 북방리를 상정했다... 박태영이 찾은 곳은 이장 집이었다...
박태영은 대원 8명이 가진 총과 실탄을 광 앞에 쌓아두게 하고 전원을 광 안으로 몰아넣고 이장에게 자물쇠를 채우게 했다.
"이장님, 우리를 위해, 사회를 위해 큰 일을 해주셔야겠소. 이장님 보시다시피 이 안에 수용된 파르티잔은 8명입니다. 이현상 부대 마지막의 파르티잔입니다. 이 사람들의 생명을 구해주십시오..."

- 소설 지리산 7권 마지막

모두를 받아들이고 아낌없이 나눠주는 어머니 산이자,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는 군자의 산인 지리산은 이 지역사람들의 삶의 모태이자 영원한 스승이 되었을 것이다. 학교 가는 길에서도 일손을 돕는 들에서도 지리산은 보였었다. 매서운 겨울에는 지리산 눈바람이 채찍처럼 살갗을 파고들었었다.

어쩌면 이곳 사람들이 지리산을 닮아가는 것은 숙명이었을 것이다. 가슴 저린 사연이 많음에도 뿌듯한 전통은 이곳 사람들의 자랑이었을 것이다. 내 친구들이 오뚜기처럼 쓰러지지 않고 일어서는 안티프래질한 기질을 가진 것도 이러한 지리와 인심을 감응유전 받은 덕분일 것이다.

신갈나무 마른 가지사이로 서해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멀리 남쪽으로는 땅끝 전망대가 보이고 남해 바다도 보였다. 그래도 땅끝까지는 한참을 더 걸어야 했다.

여기는 땅끝, 한반도의 시작

2022년 11월 28일 오후 3시 35분,
드디어 땅끝에 도착했다.
아침부터 장장 8시간 35분을 걸었다.
나에게는 11개월에 걸친 남파랑길 여정의 끝이었다.

"땅끝에서 새롭게 시작하자, 건배"
땅끝 항에서 이곳 해산물 안주에 이곳 쌀로 빚은 막걸리로 완주를 자축했다.


남파랑길 89코스(13.8km), 남파랑길 90코스(13.9km) (총 27.7km)
<원동(조식) - (택시) - 남창 - 미황사 - 도솔암갈림길 - 땅끝전망대 - 땅끝 - 땅끝항>
11.28일 7시 -  11.27일 15시 35분 (총 8시간 35분)
* 목포로 택시로 이동, KTX 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