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만 바다와 갯벌은 아침 햇살을 받아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쌀쌀하고 바람이 불고 안개비가 내렸던 어제에 비해 날씨는 좋을 듯했다. 바닷가 제방길을 걷다가 산자락과 들판사이로 난 마을길로 접어들었다. 빈 들판 연녹색 벼 그루터기는 햇볕을 받아 선명해져 마치 연녹의 카펫을 들판에 온통 깔아 놓은 듯했다. 자비로운 아침 햇살을 받으며 걷는 백련사 그리고 다산초당 여행길은 설레는 마음으로 벅차 올랐다.
아침 일찍부터 밭에 나온 부지런한 농부를 만났고, 황갈색으로 물든 신갈나무 야산에 다정하게 자리 잡은 쌍봉 무덤도 지났다. 남파랑길은 유배길 2코스, '사색과 명상의 다산 오솔길'과 겹쳤다.
만덕산 백련사 일주문을 지나 절 경내로 들어섰다. 사천왕문을 지나자 얕은 돌계단 너머 숲 속으로 절길이 이어졌다. 대웅전 가는 절길은 동백나무로 뒤덮여 있었다. 숲이 울창해 하늘이 보이질 않을 지경이었다. 백련사 동백나무 숲은 숲의 가치와 백련사와 다산초당 등과 관련된 문화적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었다. 이곳 동백나무는 겨울에 꽃이 피는 동백이 아니라 봄에 꽃이 피는 춘백으로 아직 붉게 핀 꽃은 눈에 많이 띄지 않았지만, 진초록의 잎은 더욱 짙고 무성했다. 동백 숲은 목재로 지은 절 건물을 화마로부터 보호하는 방화목의 역할을 한다고도 했다.
동백나무 숲길을 나오자 갑자기 풍경은 180도 바뀌었다. 진홍색 단풍으로 물든 화려한 정원이 나타났다. 배롱나무는 잎을 떨군 나목으로 천수관음보살처럼 경건하게 서있었지만, 단풍나무는 불심으로 붉게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만경루 2층 마루에서 보는 늦가을 풍경은 가히 일품이었다. 특히 3개의 정사각형의 창문틀사이로 보이는 풍경은 마치 세 폭의 멋진 병풍을 쳐놓은 듯했다. 차경借景 정원의 멋스러움이 이런 거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몇 년 전 안동의 병산서원 대청마루에서도 이런 풍경을 보고 감동했던 기억이 되살아 났다.
만경루 좁은 회랑을 지나 가파른 계단 앞에 서자 갑자기 대웅전이 눈앞에 전개되었다. 눈앞이 신성한 부처님 불법의 세계로 꽉 찬 느낌이 들었다. 다른 절에서 느낄 수 없었던 느낌이었다. 아마도 유난히 좁은 대웅전 앞 뜰이 만들어낸 특별한 공간감이 아닌가 싶었다. 빛바랜 단청을 입은 대웅전 건물은 오히려 엄숙하게 느껴졌다. 하대 신라에 창건되었다고 추정되는 백련사는 고려 때 타락한 불교의 개혁에 앞장섰던 백련결사의 진원지였으며, 조선말 다산 정약용과 혜장 스님이 깊은 학문토론과 진한 우정을 나눈 곳으로도 유명한 곳이었다.
찌뿌듯한 하늘이 맑게 갠 어느 봄날, 냉이 밭에 하얀 나비가 팔랑거리자
다산은 자기도 모르게 초당 뒤편 나무꾼이 다니는 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들판이 시작되는 보리밭을 지나며 그는 탄식했다.
"나도 많이 늙었구나. 봄이 되었다고 이렇게 적적하고 친구가 그립다니." 백련사 혜장선사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벗 될 만한 이가 없는 궁벽한 바닷가 마을에서 혜장은 다산에게 갈증을 풀어주는 청량제 같은 존재였다.
-백련사 가는 오솔길
백련사에서 다산초당 가는 길은 완만한 오르막 오솔길이었다. 녹색 동백나무 숲길을 지나면 스님들의 손길이 많이 간 녹색 차밭이 나타났고 그리고 갈잎이 수북이 쌓인 산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곳에서 보는 산 풍경은 붉고 푸르고, 11월 하순임에도 아직 초 가을 느낌이 많이 났다.
이 길은 다산과 혜장이 오고 갔던 오솔길이었다. 거리는 1km, 천천히 걸어도 30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였다. 다산은 오랜 유배생활 중에 나라가 걱정되고 가족이 그립고 친구가 보고 싶을 때 술병을 들고 넘었고, 혜장은 학문이 목마를 때 정성 들여 덖은 차를 들고 넘었다. 둘은 친구지간이었고, 스승과 제자 사이였던 것이다.
강진만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천일각이 자리하고 있었다. 다산이 돌아가신 정조대왕과 흑산도에 유배 중인 형님 정약전이 그리울 때면 언덕에 서서 강진만을 바라보며 스산한 마음을 달랬을 것으로 추정하고 세운 건물이었다.
상록활엽수와 소나무로 어우러진 숲 속에 다산초당이 모습을 드려냈다. 먼저 보이는 건물은 동암이었다. 다산이 주로 생활했고, 저술활동을 한 곳이라고 했다. 그리고 작은 연지 곁에 다산초당이 고즈넉하게 앉아 있었다. 세 칸 아담한 집은 고졸古拙한 멋을 지니고 있었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주변 풍경 속에 잠겨있는 듯한 모습이 아름답고 편안했다.
정약용은 1808년 봄, 해남 윤 씨 집안의 산정에 놀려 갔다.
아늑하고 조용하며 경치가 아름다운 다산서옥은 지난 7여 년간 전전했던 주막이나 제자의 집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정약용은 시를 지어 머물고 싶은 마음을 전했고 윤 씨 집안은 이를 흔쾌히 허락했다.
이곳에서 정약용은 비로소 안정을 찾고 후진 양성과 저술 활동에 몰두했다.
10년 동안 다산학단이라 일컬어지는 18명의 제자를 길렸고, 50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집필했다.
다산초당은 유배객의 쓸쓸한 거처가 아니라 선비가 꿈꾸는 이상적인 공간이자 조선 시대 학술사에서 가장 활기찬 학문의 현장이었다.
- 다산초당
다산의 강진 유배는 조선말의 시대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으로 봐야 할 것이다. 서양은 과학혁명 이후 확실한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세계지배를 확대해 나갔고, 조선의 지식인들은 새로운 지식에 눈을 뜨고 개혁을 꿈꿨고, 이러한 세상의 흐름 속에서도 나라는 오히려 반동적으로 문을 걸어 잠그고 지식인을 박해한 근대와 반근대의 극렬한 대립의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 변환의 한복판에서 다산에게 닥친 불행은 개인의 불행을 넘어선 나라 공동체 전체의 불행으로 봐야 할 것이다.
조선의 대학자인 다산의 강진 유배는 강진의 유학자와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학문의 길을 열어준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특히 외가 쪽으로 인연이 있는 해남 윤 씨의 후원은 유배지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저술을 하는데 결정적 힘이 되었을 것이다. 10년 동안 18명의 제자를 기르고 500여 권의 책을 저술했다니, 그 놀라운 열정과 성과에 감탄할 따름이다. 학문을 숭상하는 풍토와 젊은 유학자들의 집단 지성이 이루어 낸 위대한 업적이며, 강진판 문예부흥이라 일컬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다산의 노력과 업적이 조선 후기 개혁의 동력으로 발전하지 못함은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다산초당 아랫마을에는 영모당이라는 기와집이 있었다. 다산에게 초당을 제공한 해남 윤 씨의 선조께 제사를 올리는 제각이었다. 불이 꺼져 있는 카페를 지나 마을 모퉁이를 돌아서자 왼편으로 너른 들논이 나타났고, 오른편 산자락에는 주황색 선명한 감이 주렁주렁 달린 감나무 밭이 나타났다. 그리고 다시 평탄한 숲길이 나왔고, '인연의 길'이라는 길 안내목이 나타났다. 하지만 길에서 누구도 만나지 못했다. 고독하고 쓸쓸한 사색의 길이었다.
목이 마르고 허기가 느껴질 무렵 용문사에 도착했다. 약수터에서 목을 축이고 절 경내로 들어서니 토불土佛을 모시고 있다는 안내문이 있었다. 정확한 조성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섬세한 선의 흐름으로 볼 때 고려청자 전성기에 강진에서 만들어 전해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철불이나 목불은 들어 본 적이 있으나 토불은 처음 들어 본 것이기에 궁금해서 법당으로 가봤으나 아쉽게도 문이 잠겨 볼 수 없었다.
석문공원 아찔한 구름다리를 건너고 또 숲길을 한참 걸어 도암면 면소재지에 도착했다. 마침 문을 연 식당이 있어 들어갔더니 주민인 듯싶은 사람들이 제법 많이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다. 백반을 주문했더니 반찬 12가지에 시금칫국과 김치찌개를 곁들인 흰쌀밥이 정갈하게 차려져 나왔다. 간도 맞고 깊은 맛이 나고 깔끔했다. 막걸리도 한 병 주문해 천천히 남도의 맛을 즐겼다. 먹는 여행에는 좀 소홀한 편인데, 소문으로 듣던 남도 강진음식을 작은 면소재지에서 만난 것은 행복한 여행 경험이었다.
'항촌'이라는 해남 윤 씨 집성촌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 앞에 느티나무와 은행나무 정자 숲이 있고, 마을을 자랑한 노래비도 세워져 있었다. 뭔가 유서가 깊은 마을인 듯싶었다. 마을 어귀에는 '명발당'이라는 건물이 있었다. 이 집의 주인도 다산과 인연이 많은 사람이었다. 유배온 다산을 물심양면으로 도왔고, 다산의 딸과 이 집의 주인 아들이 혼인을 하였다고 했다.
항촌에서 바라보는 앞 들은 넓었다. 멀리 덕룡산 뾰족뾰족 돌산 아래로 평탄한 들이 너르게 형성되어 있었다. 들은 다산 초당의 뒷산인 만덕산 아래 들판까지 연결된 듯했다. 뒤로는 산들이 둘려 싸고 있고 앞으로는 강진만이 펼쳐져 있는 사람살기 좋은 너른 들녘이 바로 해남 윤 씨 가문의 세거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들판을 지나 바다가로 나왔다. 강진만 건너편으로 어제 걸어 온 강진땅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갯벌에 지금까지 보지 못한 낯선 그물망이 쳐져 있는 것이 보여 내려가 봤더니 짱뚱어 양식장이었다. 갯벌에 구획을 정해 모판처럼 이랑을 만들어 놓은 것이 특이했다. 그물망 안 이랑에는 제법 씨알이 굵은 엄지 손가락 크기의 짱뚱어들이 바글바글 놀고 있었다.
태양은 중천을 지나 서편 하늘 쪽에서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식어가는 태양 빛이 바다와 갯벌에 반사돼 신비롭고 오묘한 오후 바다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저쪽 멀리 오늘의 목적지 숙소가 있는 마을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지만 아직 걸어야 하는 거리는 한참이었다. 갈대밭을 지나고 해수욕장을 지나고 갯마을도 또 지나야 했다.
오후 5시쯤 '바다가 보이는 집'에 도착했다. 지난밤 강진에서 미리 예약을 했었다. 잠자리와 식사를 함께 해결할 수 있는 집으로 여자 주인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숙박용 방은 이미 손님이 차 있었고, 가끔 가족이 이용하는 방을 내어 주었다. 몸을 씻고 식당으로 가니 어제께 건너편 강진땅에서 만난 부부가 와 있었다. 이분들은 빈 방이 없어 저녁식사만 하고 다시 강진으로 나갈 참이었다. 그래도 어제에 이어 두 번째 만났고, 남파랑길을 트레킹 한다는 공통점이 있기에 공동의 대화거리가 있었다. 식사에 곁들여 소주와 맥주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나눴다.
남파랑길 83코스(18.0km), 남파랑길 84코스(13.7km) (총 31.7km)
<강진 - (택시) - 해창버스정류장 - 백련사 - 다산초당 - 용문사 - 도암석문공원 - 도암농협 - 명발당 - 신기마을회관 - 바다가보이는 집>
11.24일 7시 - 17시 (10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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