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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파랑길

남파랑길27. 그립고 아름다운 보성

 

2022년 11월, 한 해가 거의 저물어 가는 초겨울에 들어섰다. 또다시 한 해가 지나간다는 아쉬움도 있었지만 지난 1월부터 시작한 남파랑길 트레킹을 어떻게 마무리 지을까,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지나온 과정을 되돌아보면 힘든 때도 있었지만 그것도 추억으로 남았고, 즐겁고 아름다웠던 기억들이 나를 행복하게 했다. 키르기스스탄 텐산산맥 트레킹 여행을 다녀온, 한창 더운 6, 7월을 빼고는 추우나 더우나 매달 빠짐없이 남파랑길을 걸었다.

 

남은 지역은 보성, 장흥, 완도, 해남 구간.

지금까지 걸어온 방식대로 걷는다면 내년 1월에 가서야 트레킹을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칫하면 내년 초, 가족이 있는 독일 방문으로 인해 완주가 봄 이후로 늦어질 수도 있을 것 같아 좀 무리가 되더라도 올해 안에 끝내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이왕이면 11월에 끝내자는 각오로 9박 10일 일정을 짰다. 

 

11월 19일 오후 4시쯤, 보성군 조성면 소재지에 도착했다. 조성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보성구간 남파랑길을 걸을 참이었다. 그런데 숙소를 잡을 수가 없었다. 오래된 여관이 있었지만 카운터는 비었고, 전화를 걸어도 받지를 않았다. 할 수 없어 보성읍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하고 보성행 버스를 탔다. 그랬더니 그 버스는 보성읍으로 바로 가는 직행버스가 아니라 조성면 소재지를 중심으로 8자로 마을 구석구석을 돈 후 보성으로 가는 완행 농촌버스였다. 탈 때 손님은 나 혼자뿐이었는데, 중간중간에서 세 사람이 탔다. 면소재지로 나가는 젊은 여성과 중년 여성 그리고 옆 마을에 다녀오는 듯한 할머니였다. 

 

11월의 해는 생각보다 일찍 서산너머로 붉은 노을을 남기고 넘어가고 있었다. 텅 빈 들은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고, 산 아래 마을에는 저녁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전형적인 농촌 저녁풍경이었다. 버스 차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농촌 풍경은 평화롭고 아늑했다. 농촌버스는 도보여행에서 느끼지 못한 또 다른 즐거움을 선물해 줬다. 농촌버스를 타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농촌 투어가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음날 새벽 6시에 불이 켜진 보성역 앞 식당에 들어갔다. 김치찌개를 주문했더니 정갈하고 입에 맞았다. 식당 주인은 연세가 많으신 분이었다. 사람이 그리웠는지 낯선 객인 나에게, 모질게 살아온 얘기를 구수하게 풀어놓으셨다. 한 때는 근방에서 유명한 식당이었는데, 지금은 추억이 그리워 찾는 사람들의 사랑방 같은 식당 같았다. 벽에 붙여 놓은 글들이 눈길을 끌었다.

 

누님 같고 엄니 같은 눈물 난 집

 

택시를 타고 예당평야를 지나 예당방조제로 갔다. 들은 끝없이 넓었다. 넓은 저수지에는 여명의 새벽 구름 낀 하늘이 내려앉아 있었고, 저수지 너머로 들과 마을에는 옅은 새벽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치 묽은 먹으로 그린 한 폭의 수묵화를 보는 듯했다. 

 

방조제는 길고 아득했다. 방조제 바깥쪽 득량만 바다는 호수보다 더 잔잔하고 평온하게 느껴졌다. 어부가 꽂아둔 대나무 막대 사이로 잔물결만이 느리게 일렁이고 있었다. 그 너머로 고기잡이를 끝내고 느긋하게 돌아오는 어선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너머로 고흥반도 얕은 산들이 겹겹 실루엣처럼 멀어져 가고 있었다. 정중동, 하루를 시작하는 득량만 아침 바다 풍경은 더없이 고요했다. 이러한 고요한 풍경을 깨는 것은 바다새였다. 내 발자국 소리에 놀랐는지, 희고 검은 바다새 무리가 푸더덕 날아올라 저만치 앞으로 날아가 앉았다. 발자국 소리를 죽여 살금살금 걸어가도 또 푸더덕 저만치 날아갔다. 그리고 그 후에도 몇 번이나 반복했다. 새들은 낯 선 나를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 장난 놀이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군데군데 짙은 초록색 작물이 자라고 있는 밭이 보였다. 들에는 가을걷이가 끝난 뒤라 맨 흙이 드러나 있었고 산도 가을이 깊어져  누렇게 변했는데, 멀리서 봐도 유달리 푸른 밭이었다. 뭐지? 요즘 잘 심지 않는다고 하는 겨울 보리인가?  궁금증을 갖고 가까이 가서 보니 쪽파였다. 바닷가 언덕배기 쪽파밭은 푸른 바다와 잘 어울려 멋진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보성 하면 떠오르는 녹차밭은 의외로 눈에 띄지 않았고,  쪽파밭이 만든 싱싱한 초록의 풍경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고흥반도에서는 마늘밭을 많이 봤는데, 보성땅에서는 쪽파를 많이 심는 것 같았다. 단일 작물을 집단적으로 재배하는 것이 상품화하여 유통하기에 유리하기 때문에  지역별로 농민들이 같은 종류의 작물을 심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대형 탑차에 소형 트럭으로 싣고 온 쪽파를 옮겨 싣는 모습도 보였다.  

 

고구마 수확이 끝난 밭에서는 중년의 부부가 멀칭재배용으로 썼던 검은 비닐을 걷어내고 있었다. 한 때 농업용 비닐이 제대로 수거되지 않아 농촌 환경오염원으로 골칫거리가 된 적이 있었다. 밭 모퉁이, 농수로에 폐비닐이 쌓여 있기도 했고, 바람에 날려 나뭇가지에 덕지덕지 달려 있기도 했었다. 지금은 그런 모습이 싹 사라졌다. 수확이 끝나면 농부들이 수거하여 마을마다 있는 영농 폐비닐 수집장에 모아두고 있었다.

 

수확이 끝난 마을 앞 들에는 눈길을 사로잡은 것이 또 있었다. 트랙터로 곱게 갈아 놓은 밭이었다. 트랙터가 지나간 흔적은 마치 한 폭의 비구상 그림 같았다. 유능한 농부는 아름다움을 창조하는데도 일가견이 있는 듯했다. 

 

 

 

바닷가에 햇볕을 받아 반짝이는 커다란 조형물이 멀리서도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공룡 두 마리가 서로 머리를 부비고 있는 형상이었다. 인근에는 공룡박물관과 공룡공원이 있었고, 공룡알 화석지도 보존되어 있었다. 약 1억 년 전 득량만 일대는 호수지역으로 공룡 가족이 살던 보금자리였고 놀이터였던 것이다. 특히 해안가 퇴적층에 발견되는 공룡알 화석은 보존상태가 매우 좋으며, 규모면에서도 세계적이라고 했다. 경남 고성의 상족암 부근 공룡 발자국 화석과 함께 이곳의 공룡알 화석은 한반도 남해안 일대가 공룡들이 살기 좋은 낙원이었음을 잘 보여주는 자연사 박물관 같았다.  

 

남파랑길 보성구간은 '보성 생태문화 탐방로'와 겹치고 있었다. 이 길은 잘 보존된 자연생태와 경관이 우수한 해안을 중심으로  차밭, 해수욕장, 유적지 등을 연결하는 탐방로였다. 아스팔트 길을 걸어야 하는 불편함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걸으면서 보는 풍경은 그 불편함을 보상받기에 충분했다. 갈대숲을 지나고, 뻘밭을 지나고, 작은 어촌 마을도 지났다. 그리고 해안가 쪽파 밭 옆길도 지나고, 처음 보는 브로콜리 밭 옆길도 지났다.

 

바닷물이 빠져나간 갯벌에는 사람들이 열심히 뻘밭을 호미로 파고 있었다. 차림새로 봐서 휴양을 온 사람들이 체험 삼아 조개를 깨는 것 같았고, 이곳 어민들이 물 때 맞춰 나와 굴을 따고 낙지를 잡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오후 2시 좀 지나 율포 해수욕장에 도착했다. 좀 이른 시간이지만 여정을 마치기로 했다. 숙소 등 이런저런 사정을 고려하기도 했지만 9박 10일의 긴 여정을 감안하여 무리하지 않고 체력을 비축하기로 했다. 

 

 

다음날 새벽 6시에 숙소에서 나왔다. 마침 문을 연 식당이 있어 아침식사도 든든하게 해결하고 길을 나섰다. 바다는 여명 속에 고요히 잠겨 있었다. 어스름 어둠 속에서도 율포항 수협 공판장에는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고,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새벽이 더 바쁜 사람들이었다.

 

명교해수욕장쯤 왔을 때, 하늘이 바뀌고 바다가 바뀌기 시작했다. 회색톤에 갇혀 있던 천지가 서서히 붉어지더니 온통 붉은색으로 변했다. 구름 낀 날 새벽 바다는 맑은 날 새벽 바다 못지않게 아름답고 이색적이었다. 그 풍경이 신비스럽기도 했고, 한편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유명한 뭉크의 그림 <절규>는 붉게 물든 노을을 보고 공포를 느낀 인물을 묘사했다고 하는데, 온통 핏빛으로 변한 아침 바다를 보니 작가의 그 정서가 이해될 것 같기도 했다.

 

바닷가 팔각정에 배낭을 내리고 한참을 아침 바다 풍경에 빠졌다. 이른 아침임에도 주민 몇 분은 주변 청소를 하고 계셨다. 주변을 둘려보니 마을도 깨끗하고 정감이 느껴졌다.

 

'천연기념물 480호, 보성 전일리 팽나무숲이 400m' 안내판이 나타났다. 남파랑길에서 벗어나 있었지만 가보고 싶었다. 멀리서 봐도 멋진 숲이었다. 수령 400년이 넘는 팽나무 18그루, 푸조나무 1그루가 개울을 따라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멋진 풍채를 풍기며 서있었다. 

 

임진왜란 때 충무공의 막하에서 공을 세운 정경명이 충무공과의 만남을 기념하기 위해 심은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역사적 의미와 더불어 거센 바닷바람을 막는 방풍방조 역할을 하며 매년 당산제를 지내온 당산림으로서 문화적 가치도 크다고 했다.

 

팽나무는 바다가 포구나 마을 어귀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나무이다. 소금기가 많은 바닷가에서 잘 자라기 때문에 남부지방에서는 포구나무라고도 불리는 나무다. 팽나무는 사계절 어느 때나 멋있지만 잎이 떨어진 나목일 때 특히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팽나무의 잔가지는 느티나무에 비해 짧고 섬세하며, 굵은가지는 굴곡과 뒤틀림이 심하다. 그 잔가지와 굵은가지가 빈 하늘에 만들어 내는 선의 아름다움은 가히 예술적이다. 

 

전일리 팽나무는 지나가는 계절이 못내 아쉬워 노랗게 변한 잎을 아직 달고 있었지만 팽나무만이 뿜어내는 아름다움은 숨길 수 없었다. 

 

 

남파랑길 76코스 일부(10.7km), 남파랑길 77코스(12.9km) 남파랑길 78코스 일부(3.0km) (총 26.6km)

<조성 - (버스) - 보성(석식, 박, 조식) - (택시) - 예당방조제 - 득량만 갯벌(간편중식) - 비봉공룡알 화석지 - 율포해수욕장(석식, 박, 조식) - 전일리 팽나무숲>

11.19일 16시 30분 - 18시, 11.20일 7시 - 14시 30분, 11.21일 6시 30분 - 7시 30분 (총 8시간 30분)

* 11.19 조성에서 보성 구간은 버스로만 이동하여 총시간에서 제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