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화면 소재지에서는 좀 불편한 하룻밤을 보냈다. 모텔도 낡았고, 아래층 노래방에서 부르는 노랫소리에 잠도 설쳤다. 아침 6시, 찌뿌둥한 몸으로 모텔을 빠져나왔더니 바로 옆 건물에 영업을 하는 식당이 있었다. 벌써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이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다. 전어구이와 배추 된장국이 곁들인 백반은 입맛에 맞았으나 양이 너무 많아 남겼다. 그리고 길 건너 마트에 들러 사과 1개, 빵 2개, 요구르트 1병 그리고 물 2병을 샀다. 작은 면소재지 마을에서 24시간 편의점이 아닌 일반 마트가 아침 일찍 문을 연 것도 신기했다. 도화면 사람들은 하루를 유난히 일찍 시작하는가.
번듯하게 자리 잡고 있는 면사무소 앞을 지나 마을 끝자락에서 도화 성당을 만났다. 성당은 단정했고, 단아함과 신성함이 느껴졌다. 도화성당은 고흥성당, 녹동성당, 소록도2번지 성당으로 이어지는 30km에 달하는 도보 성지순례길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들길로 들어섰다. 등 뒤로 막 떠오른 햇빛에 길게 늘어난 내 그림자를 앞세우고 산뜻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유랑하듯 천천히 걸었다. 공장처럼 잘 지은 축사도 지나고, 대형 키위 비닐하우스 단지도 지나고, 늦가을 아침 이슬을 맞고 있는 만생종 골짝 벼논을 지나 임도로 들어섰다.
길 옆 덤불 숲속을 따라 작은 새들이 재잘거리며 나를 안내하듯 앞서 날아갔다. 칡넝쿨이 점령한 버려진듯한 유자 밭에서 유자 1개를 땄다. 향기가 진하고 상큼했다. 손톱으로 톡톡 유자껍질에 상처를 내어 진한 향기를 맡아보기도 하고, 한 손으로 저글링을 하기도 하며 걸었다. 상큼한 아침 숲 속 공기가 더 상큼하게 느껴졌다.
숲길 임도는 완만하고 길었다. 구불구불 등고선을 따라 난 임도를 한참 걸어, 저 모퉁이만 지나면 고개이겠지 하고 가보면 또 구불구불 임도가 나타났다. 7시 30분에 걷기 시작한 임도길, 9시가 지나서야 고갯마루 철쭉공원에 도착했다. 철쭉공원에서는 천등산으로 갈 수 있는 등산로가 연결돼 있었고, 고흥 앞바다 그리고 거금도가 눈앞에 펼쳐졌다. 무엇보다 깜짝 놀란 것은 깨끗한 화장실이었다. 어떻게 이른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먼 임도 고갯마루 화장실이 이렇게 깨끗하게 관리될 수 있다는 것이 놀랍고 의아스럽기까지 했다.
임도를 따라 내려오는 길에 유기농 명인이 키우는 유자밭을 만났고, 개량한우 명인이 키우는 축사도 지났다. 고흥의 명물인 유자가 짙은 초록의 상록수인 유자나무에 황금보석처럼 주렁주렁 박혀 있었고, 축사 옆길을 지날 때는 기분 나쁜 역겨운 축분 냄새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명인이 키우고, 사육하는 농장과 축사는 뭔가 달라도 다른 것 같았다.
간척지 방조제에 들어섰다. 방조제 긴 길 따라 하얀 억새꽃이 바닷바람에 춤추고 있었다. 낯선 이방인인 나를 환영하는 사람들이 흔드는 깃발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높은 언덕 같은 얕은 산을 오르니 넓은 간척지 농지가 보이는 곳에 '오마간척 한센인 추모공원'이 나타났다.
이곳 오마간척지 조성사업은 1962년 보사부 주관하에 소록도 음성 나환자들의 정착 목적으로 그 해 6월 1일 자로 정부로부터 사업인가를 득하여 시작되었다.
이에 따라 당시 소록도 원생을 주체(당시 병원장, 조창원)로 방조제 축조를 위하여 '오마도 개척단'을 창설하였으며, 방조제 축조공사는 그 해 7월 10일 착공하여 1964년 6월 56.7%의 공정 상태에서 본 사업을 보사부에서 전라남도로 이관하였다.
방조제 축조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나환자들의 희생과 노동력이 수반되었으며, 본 사업권의 이관 당시 지선 주민들이 이곳에 나환자들의 정착을 반대함에 따라 나환자들은 방조제 절강 완공을 이루지 못하고 철수하였다.
이후 방조제 절강사업은 전라남도가 완공하였고, 간척지 조성사업은 1988년 12월 30일 고흥군에서 완공하였다.
- 오마간척지 조성 안내문
이번 트레킹 여행에서 소록도를 갈까도 했었는데, 예기치 못한 곳에서 소록도 한센인 관련 추모공원을 만나게 된 셈이었다. 바다를 메워 땅을 만들어, 땅에서 쫓겨난 설움을 떨치고 새로운 삶을 살려고 했던 한센인들의 서러운 역사를 기억하고자 만든 공원이었다. 시멘트로 만들어진 질박한 조형물에서는 그 당시 성치 않은 몸으로 고통과 배고픔을 견디며 힘겹게 작업했던 그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전해오는 듯했다. 하지만 그들은 땅을 갖고자 했던 꿈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한센인의 정착을 주민들이 반대했고, 정치인들이 이를 이용했다.
오호통재라! 오천 원생은 곡하노라!... 여기 그 유래를 적어 만천하에 고하노라
소설 '당신들의 천국' 실제 무대였던 곳이었다. 오래전에 소설을 읽기는 했는데, 그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트레킹을 마치고 돌아와 동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다시 읽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대학 1, 2학년 때 월간 신동아에 연재된 소설을 읽은 것이었다. 한참 사회 부조리에 민감했던 젊은 시절에 읽고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새로 부임한 현역 대령인 병원장은 희망을 잃고 무기력하게 살아가고 있는 원생들에게 삶의 활기를 불어넣고자 하는 선의와 신념을 갖고 축구단을 만들고, 간척사업을 추진한다. 하지만 나환자들의 불신과 저항에 번번이 부딪친다. 살던 땅에서 쫓겨난 나환자들은 일제 강점기 때 소록도를 천국으로 만들겠다는 당시 원장의 말에 감동해 가혹한 채찍을 맞으면서도 노예처럼 혹독하게 일을 했던 끔찍한 과거가 있었기에 쉽게 선의를 믿지 않은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간척사업을 시작했지만 원장은 방조제 절강제를 앞두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소록도 나환자들은 간척사업에서도 쫓겨나고 말았다. 결국 '우리들의 천국'을 만들겠다고 한 간척사업은 '당신들의 천국'으로 뒤바뀌었다.
원장님은 섬사람들과 운명을 같이 하지 못합니다. 언젠가는 이 섬을 떠날 것입니다.
같은 운명을 살 수 없는 사람들 사이의 믿음이 없는 사랑이나 봉사는 한낱 오만한 시혜자로서의 자기도취적인 동정으로 밖에 보일 수가 없습니다.
- 당신들의 천국(소설)
소설 속에서는 나환자들의 천국을 만들겠다는 선의와 신념을 갖고 있는 원장과 이에 지독하게 반대하는 보건과장 그리고 믿음과 사랑 없이는 어떤 일도 할 수 없다는 원로 장로 간의 갈등과 타협이 큰 줄거리다. 병원을 떠난 원장은 5년 뒤 일반인 신분으로 다시 소록도로 돌아온다. 공동운명체가 아니면 믿음이 생길 수 없다는 보건과장의 말을 받아들인 것 같았다. 원장의 그 선택이 감동적이었다.
추모공원은 관리가 안되고 있었다. 안내판은 낡고 오래돼 글씨가 아예 사라졌거나 읽을 수 없을 정도였고, 사진은 빛바래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지경이었다. 이런 현장이 더 서글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젠 '우리들의 천국'도 '당신들의 천국'도 아닌 '기억하고 싶지 않은 천국'이 되어버렸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불치병으로 알려졌던 한센병은 이젠 완치 가능한 병이 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선 2019년 이후 환자가 한 명도 발생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한센인들의 가슴 아픈 역사는 감출 수도 없고, 잊어서도 안될 것이다. 소설책 말미에 한 평론가는 '소설은 세계의 무대를 추구하는 개인의 연대기'라고 했는데, 한센인들의 처절한 아픔으로 얼룩진 오마간척사업은 언제 어디서나 모양을 달리해 되풀이될 수 있는 사건이기에 '오마간척 한센인 추모공원'이 역사적 교훈의 장소로 오랫동안 관리되고 기억되었으면 한다.
다시 긴 방조제로 들어섰다. 오른쪽으로는 수확이 끝난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고, 왼쪽으로는 방조제를 쌓을 돌을 깨서 날랐던 만제도가 바다 가운데 그 형체만 조금 남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로 소록도와 거금도를 잇는 현수교가 에메랄드빛 바다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자연은 무심한가, 그 어디에도 그 슬픔의 흔적은 없고 평화롭게만 느껴졌다.
소록도를 지척 거리로 바라보면서 녹동에 들어섰다. 소록도와 녹동 사이 바다는 깊고 물살 빠른 좁은 해협이었다. 대형 여객선이 빠른 속도로 녹동항으로 들어오고 있었고, 녹동항에는 많은 선박들이 정박해 있었다. 녹동은 천혜의 조건을 갖춘 항구 도시였다. 여객선 부두에서는 인근 도서뿐만 아니라 제주도까지 정기적으로 배가 운항하고 있었다.
번잡한 바닷가를 피해 조용한 마을 안쪽 모텔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일찍 마을 산책에 나섰다. 아침 식사를 할 식당을 찾을 겸, 녹동에 가면 임진왜란 때 순절한 장수를 모신 쌍충사를 찾아보라는 친구의 말이 생각나서였다. 녹동 시장을 지나 부둣가를 한 바퀴 돌아 쌍충사로 갔다. 옛 녹동 성터에 자리 잡은 쌍충사에는 녹동만호로 근무하다 순절한 두 분의 장수를 배향하고 있었다. 그중 한 분은 임진왜란 때 혁혁한 공을 세우고 부산해전 때 몰운대에서 전사한 정운 장군이었다. 남파랑길 몰운대에서 '내 이름 정운과 몰운대의 운이 같은 운인 것을 보면 내가 여기서 죽을 것이다'라는 말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하였다는 정운 장군의 스토리텔링 안내문을 본 기억이 났다.
모텔 인근 분식집에서 라면과 김밥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김밥 1 줄을 점심용으로 사서 배낭에 넣었다.
남파랑길은 바닷길을 버리고 가을걷이가 끝난 들길 그리고 언덕 같은 산길로 바뀌었다. 거의 평지나 진배없는 평탄한 길의 연속이었다.
닷새째 고흥길을 걸으면서 특이하게 느낀 것은 마을 입구에 있는 열녀비와 마을 인근에 있는 산소였다. 다른 지역에 비해 유달리 많이 보였고, 마을 가까이 모여 있었다. 유교적 전통이 상당히 강한 지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나에게도 상당히 이색적인 풍경으로 눈길을 끌었다. 고흥은 씨족 공동체 의식이 유달리 강한 곳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속이 차오른 김장 배추밭을 지나고, 스프링클러가 빙글빙글 물을 뿌리고 있는 마늘밭을 지나고, 얕은 산고개를 넘자 다시 바다가 나타났다. 고흥반도 서쪽 바다 득량만이었다. 멀리 바다 건너로는 장흥과 보성 땅이 눈에 들어왔다. 짙은 남색의 득량만은 지나온 여자만과 순천만과는 다른 느낌을 주었다. 그냥 푸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깨끗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해안길을 따라 걸어 고흥만방조제에서 트레킹을 끝냈다.
도화에서 시작하여 고흥만방조제에서 끝난 이틀간의 여행길에서는 참 많은 풍경을 봤다.
그리고 내가 걸어온 길은 단순한 길이 아니라 선인들의 흔적이 남아있는 역사책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파랑길 69코스(15.7km), 남파랑길 70코스(13.3km), 남파랑길 71코스(21.8km) (총 50.8km)
<도화(조식) - 철쭉공원 - 백석정류장 - 오마간척한센인추모공원 - 녹동항(석식, 박, 조식) - 쌍충사 - 도덕초등학교 - 용동마을회관 - 고흥만방조제공원>
10.24일 6시 30분 - 16시 30분, 10.25일 6시 30분 - 13시 30분 (총 17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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