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도 안 돼서 눈이 떠졌다. 어젯밤에 많이 마신 술 탓인지 목이 많이 말랐고, 머리도 조금 지근지근했다.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뒤척거리다 새벽 공기나 마실까 하고 나왔더니 하늘에 별이 총총 내려다보고 있었다. 밤하늘만 보면 제일 먼저 찾는 북두칠성과 북극성은 산에 가려 보이지 않았고 서쪽 하늘에 삼태성이 또렷하게 보였다. 삼태성은 시계가 없던 어릴 적 밤 시각을 알려주는 별이기도 했었다.
요즘은 별을 보기가 참 쉽지 않다. 공기가 맑지 않은 탓도 있을 것이고, 너무 많은 인공의 불빛도 그 원인일 것이다. 어릴 적 본 밤하늘 별들이 생각나 때 묻지 않은 자연 속으로 여행할 때면 으레 밤하늘을 쳐다보곤 했는데, 운 나쁜 탓인지 신통찮았다. 남미의 파타고니아에서도, 바이칼의 알혼섬에서도, 키르기스스탄 텐산산맥에서도 또렷한 밤하늘 별을 보지 못했었는데, 고흥반도 남단에서 눈에 익은 추억의 별자리를 보게 되다니 반가웠다.
햇반으로 흰 죽을 끓어 쓰린 위를 달랬다. 그리고 전날 마음씨 고운 아주머니로부터 얻은 고구마 2개를 삶아 1개는 내 배낭에 넣고, 나머지 고구마 1개와 남은 햇반과 라면을 옆 방 형님들에게 건네주고 나 홀로 길을 나섰다.
아침 공기는 좀 쌀쌀했지만 기분은 오히려 좋았다. 등 뒤로는 아침해가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다. 텅 빈 우주발사전망대로 들어서니 '통일운동의 성지'라고 새긴 한반도를 닮은 커다란 자연석이 우뚝 서있었다. 뭐지 하는 마음으로 가까이 가서 보니, 2008년 8월 우리나라 최초로 고흥에서 통일기금 모으기 운동을 전개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기념탑이었다.
우주발사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잿빛 갯벌 바다가 아닌, 푸른 바다였다. 바로 아래에는 제법 너른 모래사장을 가진 남열해돋이 해수욕장이 있었다. 요 며칠 동안 봐온 뻘밭 바다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 흰모래사장 바다 풍경이었다. 해수욕장은 오토캠핑과 야영도 할 수 있도록 준비돼 있었고 깨끗하게 관리돼 있었다. 이른 아침임에도 화장실까지 깨끗하게 청소돼 있어 깜짝 놀랐다. 매스컴에서 오토캠핑장 화장실이 지저분하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는데, 이곳은 달랐다.
남파랑길은 남열 마을길을 지나 산자락 해변가 지방도로를 따라 이어졌다. 툭 터인 남쪽으로는 쭉 맑고 깨끗한 푸른 바다였다. 남해 바다에서 흔히 봐온 양식용 부표도 눈에 그렇게 띄지 않았다. 단지 아침 해무가 옅게 끼어 있어 멀리 섬들이 옅게 실루엣처럼 보이는 것이 아쉬웠다.
작은 교회가 유난히 눈에 띄는 양화마을 앞을 지나고, 양남면 소재지 어귀에서 제방 위로 난 농로로 걸었다. 농로에서는 깊어가는 농촌의 가을 정취가 물씬 느껴졌다. 빈 들길 따라 전봇대가 일렬로 줄 서있었고, 길가에는 누렇게 탈색한 익은 강아지 풀, 바람에 은빛 춤을 추는 억새 꽃 그리고 노오란 향기를 풍기며 인사하는 산국이 여행자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농로 끝자락, 방조제에서 여자 세분을 만났다. 양남면 소재지에 사시는 분들로 아침 나들이 나와 수다를 떨고 있었다. 고맙게도, 해안가를 따라 사도 마을까지 길이 잘 나있고 사도에 가면 짜장면을 먹으라고 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방조제를 지나 해안 산길로 들어섰다.
길 안내판을 보니 이 길은 고흥 마중길 1코스와 겹치고 있었다. 해창만 공원에서 통일발원지 공원까지 섬과 섬을 잇는 정겨운 역사 탐방길이라고 설명하고 있었다. 거리는 17.7km로, 드넓은 바다를 막아 옥토로 일군 간척지, 임진왜란 당시 전라좌수영의 전략요충지였던 사도 그리고 환상적인 해돋이와 해안경관을 자랑하는 남열해돋이 해수욕장과 통일발원지 공원 등 3구간으로 조성돼 있었다. 3구간 길은 이미 걸어왔고 2구간과 1구간을 역순으로 걷고 있었다.
길은 바다로 내려온 산자락을 따라 조성된 평탄한 흙길이었다. 길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꾸밈없는 가을 풍경이었다. 길옆에는 가을 풀들이 지멋대로 가을 햇살을 만끽하고 있었고, 얕은 산과 산사이로 들어온 바다는 평화로웠다. 혼자 걷는 여행자에게 쓸쓸함과 아늑함을 동시에 주는 호젓한 풍경이었다.
길 가운데 듬성듬성 풀이 자란 곳에 퍼질러 앉았다. 띠잔디, 그렁, 질경이 그리고 이름 모를 풀들은 사람들이 많이 다닌 곳을 피해 길 한가운데에서 끈질긴 생명을 이어가고 있었다. 신발을 벗어 발에게도 자유를 줬다. 물을 마시고, 아침에 삶아 가지고 온 고구마로 허한 배도 달랬다. 그리고 새소리를 들으며, 맑은 공기를 마시며, 푸른 하늘과 바다를 바라보기도 하며 넋 놓아 앉아 있었다.
산모퉁이를 돌아 해안길로 들어서니 멀리 어촌 마을이 보였다. 사도마을이었다. 마을에 들어서자 바닷가 쪽으로는 검은 차양막을 친 비닐하우스가 쭉 늘어서 있었다. 굴이나 해산물을 까고 분류하는 곳으로 보였다. 사도 마을은 해안가 마을로서는 제법 규모도 크고 역사도 오래된 마을이었다. 고려말부터 왜구의 침입을 막던 방어 거점지였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좌수영 다음으로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12시가 조금 지날 즈음에 식당을 만났다. 보통 때 같았으면 생각할 것도 없이 들어갔을 터인데, 양남방조제에서 나들이 나온 여인들로부터 '사도에 가면 짜장면을 먹어보라'는 말을 듣고 인터넷 지도 앱으로 검색했더니 중국집이 해창만방조안에 있었기에 그냥 지나쳤다. 해창만방조제는 길고 길었다. 자그마치 3,464m였다. 배고픔을 참고 견디며 중국집을 찾아갔더니 맥빠지게스리 문이 닫혀 있었다. 그 실망감, 허탈감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인터넷 검색을 하면서 착각한 것이었다. 원망스럽게도 해창만방조제 오기 전에 지나친 그 식당이 가고자 했던 식당이었다. 다행히 바로 인근에 일반 음식이 있어 점심은 해결했지만, 남파랑길에서 짜장면을 먹어보겠다는 기대는 무참히 깨져버렸다.
다시 바다는 얕아져 뻘밭이 보이기 시작했고, 얕은 바다에는 물고기를 가둬 잡는 독살처럼 보이는 돌담이 군데군데 물 밖으로 보이기도 했다. 바다 가운데 양식장에서 작업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마침 방조제에 걸터앉아 있는 사람이 있어 무슨 작업하는 분들이냐고 물었더니, 파래 포자를 붙이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이 지역은 김과 파래를 많이 생산하고 품질이 전국 최고라고 자랑했다.
해창만방조제 안, 저류지호수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 넓은 호수 가운데 태양열 발전 집광판이 끝없이 설치돼 있었고, 계속 공사 중이었다. 긴 방조제를 지나면서 뒤돌아 보니 푸른 바다 양식장 너머 옹기종기 어촌마을 뒤쪽으로 놀랍게도 팔영산이 계속 따라와 있었다.
섬과 섬이 갯벌로 연결돼 있는 어촌을 지나 들길로 들어섰다. 마을 삼거리에 영업 중인 돔 카페가 보여 망설이다가 들어갔다. 칼국수, 라면 등 간편한 식사도 할 수 있는 식당 겸 카페였다. 점심때가 한참 지난 때문인지 손님은 없었다. 고흥의 명물인 유자차를 시키고, 왜 이리 손님이 없어요 했더니 후덕한 여자 사장은 나처럼 찾아오는 손님이 가끔 있다고 했다.
무념무상, 지친 몸을 이끌고 포장도로를 지나고 얕은 임도 고개를 넘었다. 햇볕은 많이 수그러들었다. 산 그림자는 길게 키를 키워 마늘밭을 덮어가고 있었다. 마늘 밭에서 일하던 농부는 4륜 오토바이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마을 어귀, 넓게 가지를 뻗은 느티나무 곁에는 어린 후박나무가 바짝 붙어 있었다. 들일 나갔다가 돌아온 엄마와 마중 나온 딸이 다정스레 포옹하고 있는 것 같았다.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한 10월 말 늦은 오후 농촌의 풍경에서는 포근함과 안온함이 흐르고 있었다.
오후 5시쯤, 남성마을에 도착했다. 아직도 목적지 도화면 소재지까지는 꽤 많은 거리가 남은 곳이었다. 시간상으로 더 이상 걷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아 마을 안 길을 지나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그런데 허둥대다 도화면에 가는 마지막 버스를 놓치고 말았다. 어쩔 수 없어 도화면 소재지 택시를 콜했다.
정류장에서 택시를 기다리며 핸드폰을 보고 있는데, '몸에 병은 없는데 기가 약해서 배를 따뜻하게 해야 합니다'라고 낯선 사람이 중얼거리듯 말을 걸어왔다. 왜소한 몸매였지만 매서운 눈매를 지닌 예사롭지 않은 사람이었다. '저보고 한 말이에요' 물었더니 그렇다고 했다. 어떻게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나고 했더니, 자신은 귀신을 부리는데 귀신이 내 몸속에 들어갔다 와서 알려 준다는 황당한 얘기를 했다. 평소 저혈압기가 있기에 틀린 말은 아니었다. 호기심과 궁금증이 일어 택시가 올 때까지 계속 얘기를 들어봤다. 독을 이용해서 암까지 고칠 수 있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병원에서도 포기하는 죽을병에 걸리면 연락하라면서 명함을 건네주었다.
귀신은 있는가, 혼은 있는가.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고 있었다. 그 생각에서 빠져나오려고 해도 또 그 생각에 허우적 대고 있었다. 낯선 사람이 나에게 한 말은 정말 귀신을 부려 알아낸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경험칙을 그럴싸하게 꾸며 댄 말일까? 낯선 사람은 나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왔고, 전혀 다른 정신세계를 가진 사람임에는 분명했다. 그 우연한 만남은 남파랑길 트레킹에서 이색적인 풍경을 본 것보다 더 이색적인 경험이었다.
남파랑길 66코스 일부(2.0km), 남파랑길 67코스(16.4km), 남파랑길 68코스(20.5km) 총(38.9km)
* 남성리에서 도화까지 약 10km 택시로 이동
<고흥우주발사전망대(조식) - 남열해돋이해수욕장 - 양화마을 - 양사삼거리 - 사도마을 - 해창방조제(중식) - 봉암삼거리 - 남성리 - (택시) - 도화(석식, 박)>
10.23일 6시 30분 - 16시 30분 (총 10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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