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고흥땅에 들어섰다. 풍경은 확 바뀌었다. 여전히 왼편 바닷가로는 갯벌이 이어졌지만, 오른편으로는 넓은 들이 보였고 꽤 큰 호수도 만났다. 방조제를 지나자 작은 포구가 나타났고, 수문식당이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망설임도 없이 들어갔다. 손님은 계속 들어와 빈자리를 채웠다. 알고 보니 TV 백반기행에서도 나온 적이 있는 유명 맛집이었다. 막걸리 한 병에 낙지탕탕이 비빔밥을 시켜, 막걸리는 반 병만 마시고 비빔밥은 맛있게 다 비웠다. 그리고 자판기에서 믹스커피를 뽑아 천천히 음미하고 길을 나섰다.
눈앞에 배낭을 메고 걷는 두 사람이 보였다. 빠른 걸음으로 따라붙어 얘기를 나눠보니 나처럼 남파랑길을 걷는 보도 여행자로 친구지간이었다. 남파랑길에서도, 해파랑길에서도 친구와 함께 걸은 적은 있지만 낯선 사람을 만나 걷기는 처음이었다. 놀라운 것은 나이가 77세로 큰 형님 뻘이었고, 벌써 나흘째 걷는다고 했다. 그 연세에, 그 체력과 그 용기가 감탄스러웠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계획 없이 무대뽀로 걷는다는 것이었다. 나도 사전에 정보를 많이 찾아보는 것은 아니지만 어디에 자고, 어디서 먹을 것인가를 대충 정하고 출발하는데 이 분들은 그냥 걷고 있었다. 자유로운 여행객이란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 고생 많이 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닌게 아니라 하루에 40km를 걸은 적도 있었고, 왼 종일 굶고 걸은 적도 있었다고 했다. 그땐 너무 허기져 음식 구걸까지 했었는데 실패했고, 마음씨 좋은 여자가 건네준 감 2개가 떫었지만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더라고 했다.
남파랑길 여행에서 제일 곤란한 점은 숙소와 식사 해결이었다. 도착한 장소에 숙소가 없어 택시나 버스를 타고 되돌아가기도 했고, 식당이 없어 24시간 편의점에서 아침 끼니를 해결하거나 점심꺼리를 사서 가기도 했다.
특히 고흥 구간에서 일정 짜기가 난감했다. 걸을 거리도 멀고, 숙소와 음식점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첫째 날은 남파랑길 64코스 종점인 독대마을까지는 가야 할 것 같았는데, 그곳에는 숙소는 있지만 음식점이 없었다. 둘째 날은 여러 가지 사정을 감안할 때 고흥 우주발사전망대까지는 가야 했는데, 그곳도 식사를 해결할 수 없었다. 그리고 거리도 만만찮게 다 30km를 훌쩍 넘었다. 궁여지책으로 찾은 묘안이 남파랑길을 벗어나 과역면 소재지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그곳 마트에서 둘째 날 점심과 저녁 그리고 셋째 날 아침꺼리를 사서 가기로 했었다. 그리고 걷다가 피곤하거나 너무 늦어지면 택시나 노선버스를 이용하기로 했었다.
이런 나의 계획을 이 분들에게 얘기했더니 기꺼이 반기며 나와 동행하겠다고 했다. 저녁때 과역 모텔에서 서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들길을 계속 걸었다. 갯벌만 계속 보고 걸은 어제의 순천만과 벌교만 남파랑길과는 전혀 다른 농촌의 10월 풍경 속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여기도 길은 대부분 직선이었다. 바다를 간척해 만든 너른 평야였다. 이런 너른 평야를 가진 고흥은 참 풍요롭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누렇게 익은 벼논에는 한창 가을걷이 중이었다. 그런데 눈에 띄는 사람은 없었고, 수확 콤바인 1대만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 콤바인이 지나간 논에는 빈 볏짚만 남았고, 그리고 네모 반듯한 벼논이 남았다. 가을 들판 하면 느껴지는 수확의 기쁨에 들뜬 왁자지껄한 모습은 전혀 없고, 목수가 외롭게 황금빛 들판을 큰 대패로 다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옛날 같으면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다'는 바쁜 철일 터인데, 이제는 콤바인 1대가 가을걷이를 여유롭게 하고 있었다. 농촌의 가을은 고요한 침묵 속에 묵묵히 돌아가고 있었다.
얕은 구릉지 밭에서 일하는 농부들을 만났다. 오후의 가을 햇살 아래 머리에 수건을 두른 여자와 모자를 쓰고 선글라스까지 쓴 남자가 자투리 밭을 다듬고 있었다. 금슬 좋은 중노년의 부부로 보였다. '가을 마늘 심을 거예요'라고 인사를 건넸더니 양파를 심을 거라고 했다. 조금 지나자 또 머리에 수건을 두른 여자가 고구마를 캐고 있었다. 지나는 길에 인사말을 건넸더니, 반갑게 대꾸 인사를 하며 고구마 두 개를 집어 주었다. 작은 마음 씀씀이가 너무 고마웠고, 마음까지 울꺽해졌다.
독대마을 앞 정류소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과역면 소재지로 갔다. 모텔에서 사워를 하고 인근 기사식당으로 갔더니 오늘 만난 두 분이 먼저 와서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합석을 해 내일 일정을 얘기하고 있는데, 서빙하는 여자가 아는 체를 했다. 내일 저녁 묵기로 한 우주전망대 펜션 여주인이었다. 몇 차례 전화로 들은 내 목소리를 용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여행으로는 처음 오는 좁지 않은 고흥 땅에서 우연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기막힌 인연이었다. 두 사람이 잘 방 한 개를 더 예약하고 방값을 통장으로 입금해줬다. 그리고 술자리 중에 잠시 일어나 인근 농협 하나로마트에 가서 햇반, 라면, 김치, 소주 두병, 막걸리 한 통 등등을 사서 펜션 여주인에게 좀 갖다 달라고 부탁했다. 먹거리를 배낭에 지고 가는 것은 무거워 걱정됐었는데, 속시원하게 해결되었다. 사실 과역에서 하룻밤을 자고 먹거리를 사서 가기로 한 것도 펜션 여사장의 어드바이스가 결정적이었다.
두 사람은 외모, 성격면에서 전혀 다르면서 묘하게 죽이 맞는 것 같았다. 산티아고를 함께 걸었고, 해파랑길도 완주했고 남파랑길에 도전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등산 마니아였고, 한 사람은 티격태격 딴지를 걸면서도 기꺼이 동행을 하는 모습에서 진한 우정이 느껴졌다. 나도 2년 전에 해파랑길을 걷고 책을 냈다고 했더니 민망하게도 작가라고 불려줬다.
다음날 아침 6시, 전 날 저녁을 먹은 식당에 가서 또 아침 식사를 하고 과역시장으로 가서 아침 시장도 구경하고 점심용 떡을 샀다. 떡집은 일반 고객에게 떡을 팔지는 않았기에 떡을 주문한 사람에게 부탁하여 인절미 떡 만원 어치를 샀더니 세 사람이 한 끼 식사로 충분히 먹고도 남을 분량이었다.
택시를 불러 타고 남파랑길 코스로 다시 갔다. 젊은 택시 기사는 친절했다. 과역이 면치고 꽤 크더라고 했더니, 인근 4개 면의 중심 면 역할을 하고 있어 시장도 크고 교통도 편리하다고 했다. 농토도 넓어 돈이 많겠다고 했더니, 농사짓는 사람은 바다 양식하는 사람에 비하면 쨉도 안된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팔영산의 유래며 고흥의 이곳저곳 얘기를 들려주며 고흥 홍보 역할도 톡톡히 했다.
남파랑길 길안내 리본을 만나 택시에서 내렸다. 어제 마지막으로 걸은 지점에서 상당한 거리, 4km쯤 스킵하였다. 좀 편하게 걷고 싶기도 했고, 오늘 여정중에 그리 높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산을 하나 넘어야 하는 곳이 있었기에 무리하고 싶지는 않았다. 일행 중 한 분은 좀 아쉬워하는 기색이 보였지만 한 분은 기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풍경은 어제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차도를 걷고, 농로를 따라 걸었다. 어제 본 간척지보다 더 넓은 간척 평야로 이어진 남파랑길은 아득하게 멀게 느껴졌다. 빈 논에는 흰색 비닐로 포장한 소 사료용 볏짚 더미가 곳곳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팔영산이 보이기 시작했다. 옹기종기 모여있는 8개의 산 봉오리는 공룡의 등 돌기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걸어도 걸어도 팔영산은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계속 따라오고 있었다. 고흥 출신 지인이 만날 때마다 고흥에 가거든 팔영산 등산을 꼭 해보라고 권했었는데, 여건상 할 수 없었고 다음에 꼭 다시 오겠다고 팔영산을 바라보고 약속했다.
자동차 캠핑을 하는 두 사람을 만났다. 순천에서 왔다고 했다. 너른 들이 내려다 뵈는 시야가 툭 터인 명당에 자리 잡고 자연을 온전히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부럽기도 하면서 이렇게 외진 곳까지 와서 캠핑을 하는가 하고 의아스럽게 생각했는데, 그들은 이른 아침부터 걷고 있는 우리를 의아스러하는 듯했다. 콤바인을 싣고 오는 트럭을 안내하는 아주머니 한 분도 보았다. 벼 수확을 막 시작하려는 논의 주인 같았다. 너른 들판도 콤바인 한 대면 수확을 할 수 있는 편리한 세상이 되었다. 한가롭게 민물 수로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 중년의 남자도 만났다. 바닷가 사람들은 민물고기는 입에도 대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웬 민물낚시냐고 했더니, 참봉어가 가끔 낚이는데 순천에 계신 장모님이 붕어를 좋아하신다고 했다.
점심때가 되었는데도 간척지 들판 농로에도, 방조제 옆길에도 햇볕만 쨍쨍 내리쬘 뿐 쉴만한 그늘은 없었다. 쉴 곳을 찾다 찾다 차도 옆 그늘진 빈터에서 아침에 준비한 인절미 떡으로 점심을 때우고, 어제 점심때 먹다 남은 막걸리를 조금씩 나눠 마셨다.
울긋불긋 가을색으로 물든 잘 생긴 느티나무 한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지도 앱을 보니 남파랑길 65코스가 끝나고, 66코스가 시작하는 건천마을이었다. 이젠 오늘 종착지도 얼마 남지 않았다. 고개 하나 넘기만 하면 목적지 펜션이었다. 마을 골목길로 들어서자 이집저집에서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돌담에는 수세미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어릴 때는 많이 봤었는데, 최근에는 본 기억이 있는지 가물가물했다. 요즘 천연 설거지 용품으로 수세미가 다시 각광받고 있다는 글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마을 뒤로 임도가 나 있었고, 그 임도를 따라 올라가니 등산로 입구가 나타났다. 등산로는 숲 속으로 이어졌고, 그렇게 경사지지는 않았다. 일행 중 걸음이 느려진 사람에 보조를 맞춰 천천히 걸었다. 붉나무 잎은 유난히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등산로는 흙길이었고, 그 위에 낙엽이 덮여있었다. 스사스사, 나뭇잎이 바람에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스작스작, 나뭇잎 밟는 소리가 아직은 눅눅하게 들렸다. 10월 중추 가을이 익어가는 느낌이 눈뿐만 아니라 온몸 오감으로 전해져왔다.
용암전망대에 섰다. 하늘과 바다의 색은 온통 청색, 너무나 환상적이었다. 요 며칠 동안 잿빛 갯벌과 황금빛 들판만 쭉 봐 오다가 맑은 청색의 하늘과 바다를 보니 신비롭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바다는 하늘을 닮았는데, 더 짙은 쪽빛 남색이었다. 하늘과 바다는 말그대로 청출어람이었다.
고흥반도와 여수반도 사이 바다에 크고 작은 섬들이 솟아올라 있었다. 남해바다 섬 풍경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 이곳이 아닌가 싶었다. 섬들은 다리로 연결되어 있어 고흥반도 남단에서 여수까지 바다를 가로질러 자동차로 갈 수 있도록 돼 있었다. 그 섬들 안쪽 여자만과 순천만 그리고 벌교만, 힘들게 걸었지만 아름다웠던 풍경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그리고 남쪽 저 멀리 바다 건너로 우주선 발사대가 있는 나로도도 보였다.
해 질 녘부터 펜션에서 술판이 벌어졌다. 미리 사놓은 소주 두 병과 막걸리 한 통 정도 마시려고 했는데, 펜션 마당 한 켠 있는 '추억의 포장마차'를 보고 일행 중 한 사람이 발동을 걸었다. 펜션 사장에게 부탁하여 회를 사 오고 술을 더 사 오고, 펜션 사장은 김치며 배추며 매운 고추와 된장을 내놓았다. 내 또래인 펜션 사장은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강원도 양양출신으로 전국 곳곳을 다니다가 어쩌다가 한반도 최남단 고흥반도에 정착했다고 했다. 풍기는 포스가 남달랐다. 사람 얼굴만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도 했다. 내가 오십견을 앓고 있다고 했더니 몇 번 팔을 꽉꽉 주물더니 좋아질 거라고 했고, 정말 통증이 많이 완화되었다.
이번 남파랑길에서는 유달리 많은 사람을 만났다.
남파랑길 63코스 일부(3.0km), 남파랑길 64코스(14.3km), 남파랑길 65코스(24.7km), 남파랑길 66코스(9.2km) 총(51.2km)
<죽암방조제(중식) - 팔영농협망주지소 - 슬향마을회관 - 독대마을 - (마을버스) - 과역(석식, 박, 조식) - (택시) - 독대마을 - 신성삼거리 - 간천마을 - 용암전망대 - 고흥우주발사전망대(석식, 박, 조식>
10.21일 12시 - 18시 30분, 10.22일 7시 - 18시 (총 17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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