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호동의 아침 바다는 고요했다. 바다는 항아리처럼 움푹 들어와 있었고 맞은편 얕은 산 아래 선소 유적지가 있었다. 바깥 바다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숨은 자리에 돌아앉아 있었다. 이곳에서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때 거북선을 건조하고 수리한 굴강, 무기를 만든 대장간, 배를 정박한 곳으로 추정되는 계선주 등의 유적이 보존되어 있었다.
아침 기온은 좀 쌀쌀하기까지 했다. 일기예보를 보니 어제보다 낮 최고기온이 8도나 떨어진다고 했다. 한 여름보다 더 더웠던 어제와는 완전 딴판이었다. 하늘엔 구름이 많이 끼었고, 그 구름 사이로 옅은 아침노을이 스며들고 있었다.
소호항을 지나자 나무데크길이 나타났다. 그 나무데크길에서 바라보는 아침 바다는 섬들로 둘려 쌓인 큰 호수 같았다. 잔잔한 바다, 시원한 바람 그리고 기분 좋은 데크길. 선물 같은 풍경길이었다. 고요한 아침에 멋진 풍광을 바라보며 걸으니 몸도 마음도 가벼워지는 듯했다. 어제는 덥기도 했고 좀 들뜬 기분이었는데, 오늘은 마음도 차분해지고 온몸에는 걷는 즐거움이 지릿하게 전해져 왔다.
1시간쯤 해안길을 기분 좋게 걷다가 바다와 작별했다. 완만한 오르막 찻길을 오르자 조금 전과는 다른 농촌 풍경이 펼쳐졌다. 고무마밭이 나타났고, 옥수수밭에는 따가운 햇볕을 받아 옥수수가 익어가고 있었다. 풍경은 도시 여수에서 농촌 여수로 완전히 바뀌었다.
'정주고∼덤주고∼
옥수수 하면 할머니장터! 어서 오십시오'
플래카드가 걸린 삼거리 천막 가건물 장터에서 할머니들이 옥수수를 팔고 있었다.
호기심에서 얘기를 걸어보니 이곳에서 19년째 장사를 하고 있고, 하루 매상은 비밀이라고 했다. 표정으로 봐서는 장사 재미가 쏠쏠한 것 같았다. 옥수수가 끝물이라 세 사람만 나왔는데, 한창 때는 20명쯤 전을 벌려 장터가 꽉 찬다고 했다. 사고 싶었는데, 택배는 하지 않는다고 해서 아쉬운 작별인사를 했다.
스쿨버스를 기다리는 어린 학생들을 만났고, 은행나무 밑 풀밭에서 떨어진 은행 열매를 줍는 할머니 두 분도 보았다. 수로에서 소시지 같은 꽃을 달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부들도 보았고, 한적한 포구 마을도 지났다. 전봇대와 나란히 뻗어 있는 시골길을 돌아 지나자 벽화를 예쁘게 그린 마을이 나타났고, 언덕배기에 할머니 세 분이 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넸더니 오라고 손짓을 했다. 좀 쉬어 갈까, 하는 마음에서 갔더니 마시던 소주를 한잔 가득 내밀았다. 감사한 마음으로 잔을 받았고, 배낭에서 귤 세 개를 꺼내 드렸다.
할머니들은 어르신 일자리사업인 마을길 잡초 제거 작업을 막 마친 뒤, 소주 1병을 놓고 얘기 꽃을 피우고 있는 중이었다. 최근 도보 여행을 하면서 어디를 가나 참 깨끗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마을길 가꾸기에 참여하신 어르신들의 역할이 큰 것 같았다. 할머니들은 소일거리도 갖고 용돈벌이도 할 수 있어 좋다고 했다.
젊은이들이 떠나고 어르신들만 남은 농촌, 일에 인이 밴 할머니들은 옥수수를 팔고, 은행 열매를 줍고, 마을 가꾸기에도 빠지지 않았다. 살아 계실 때 '놀면 좀이 쑤신다'라고 하신 어머니의 말씀이 불현듯 떠올랐다.
남파랑길은 찻길에서 봉화산 등산로로 꺾어 들었다. 얼마쯤 올라가다 보니 임도가 나타났고, 남파랑길은 임도를 따라 이어졌다. 하지만 계속 산길을 따라 올라 봉화산 정상까지 갔다가 다시 반대편 임도로 내려오기로 했다. 임도에서 봉화산 정상까지는 300m로 그리 멀지 않았고, 무엇보다 산 정상에서 여수 앞바다를 조망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소나무, 노간주나무, 신갈나무, 소사나무, 개옻나무, 청미래덩굴...
등산로 주변에는 많은 종류의 잡목이 자라고 있었다. 오래된 숲이 아닌 젊은 숲이었다. 이 산은 이삼십 년 전만 해도 민둥산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에 의한 숲의 훼손이 멈추자 자연스레 여러 종류의 나무가 뿌리를 내려 숲이 형성된 듯했다. 사람 키 두어 배 높이로 자란 나무 사이로 햇볕이 내린 숲길은 아늑했다.
봉화산 정상에는 이름대로 봉화대가 있었다. 남해안에 출몰하는 왜구 침입을 알리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봉화대였다. 해발 372m, 그리 높지는 않았지만 주변에서는 제일 높은 산이었고 사방이 툭 트여 있었다. 동으로는 여수시가지가 멀리 눈에 잡혔고, 그림처럼 펼쳐진 여수 앞바다에 아름다운 섬들이 둥둥 떠 있었다.
안내도를 보니 여수반도, 고돌산반도, 돌산도 그리고 개도 사이의 바다인 가막만이었다. 가막만은 섬으로 완전히 둘려 싸인 호수 같은 내해였다. 고요한 바다는 눈이 시리도록 파랬고, 평화롭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가막만은 하늘을 닮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푸른 바다에 파란 하늘이 내려앉은 듯했다. 서쪽으로는 고흥반도, 여자만까지 볼 수 있었다.
아름다운 가막만 풍경, 못내 아쉬운 마음을 간직한 채 고봉산 정상을 거쳐 임도로 내려와 남파랑길을 만났다. 임도는 평탄했고 걷기에 너무 좋은 길이었다. 새소리를 들으며, 숲의 향기를 맡으며, 가로수로 심은 벚나무에서 초가을의 정취마저 느끼며 도보여행의 즐거움에 푹 빠졌다.
그런데 임도를 빠져나오자 4차선 차도가 나타났고, 차도는 너무 길고 지루했다. 가로수도 없고, 휴식을 취할 쉼터도 없었다. 1시간 이상을 힘겹게 걷다가 마을 느티나무 정자 숲에 도착했다. 시간은 벌써 오후 4시가 넘어 하루 일정을 마무리해야 할 시점이었다. 하지만 인근에는 숙박을 할 곳이 없어 택시를 타고 어젯밤에 머물렀던 선소로 다시 돌아갔다.
다음날 아침 또다시 택시를 타고 가시리 생태공원으로 갔다. 어제 트레킹을 마친 지점으로부터 상당히 긴 거리를 뛰어넘었다. 남파랑길 여수 서쪽 코스는 아름답고 볼거리도 많았으나 도보 여행자에게는 불편한 곳이었다. 적절한 위치에 식당이 없었고, 숙소가 없었다. 궁여지책, 고민 끝에 코스를 단축하기로 한 것이었다.
여자만은 동쪽의 여수반도와 서쪽의 고흥반도에 둘러싸인 바다로
드넓은 갯벌과 구불구불한 리아스식 해안을 자랑한다. 여자만 해넘이는
하늘과 바다를 붉게 채색한 태양이 바다로 사라지는 풍경이 아닌
여자만의 크고 작은 섬 사이로 사라지는 명품 조망이다. -여자만 종합안내문
눈앞에 펼쳐진 바다는 여자만이었다. 그 바다 해안을 따라 갯노을 길, 자전거길 겸 도보 여행길이 잘 닦여 있었다. 명품 노을을 볼 수 있는 해 질 녘은 아니었지만, 아침의 여자만도 충분히 아름답고 감동적이었다. 대부분 길은 평탄한 바닷길이었다. 도보 여행자를 위한 나무 데크길도 군데군데 놓여 있었다. 가끔 자전거 라이더들을 만나기도 했는데, 시원한 바닷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모습이 신나 보였다.
멀리 고흥반도가 보였고, 넓은 바다가 그 사이에 펼쳐져 있었다. 길 따라 쭉 이어진 너른 갯벌은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고 있었고, 쩌적쩌적 작은 소리가 나서 유심히 살펴보니 짱뚱어들이 갯벌 위를 팔딱팔딱 뛰고 있었다.
갯벌 체험을 하려 온 유아원 어린이들도 만났다. 아직 어려 부모 손을 잡고 한 손에는 작은 바구니를 들고 가는 모습이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아이들이 갯벌체험을 하는 광경을 바라보면서 휴식을 취하고, 편의점에서 사 온 점심을 먹었다. 어제도 편의점 간편 음식으로 점심을 해결했는데, 오늘도 식당을 만날 수 없을 것 같아 미리 준비했다.
오랫동안 해안길을 걷다가 언덕 같은 고개를 넘어 농촌마을로 들어섰다. 마을은 아담했고, 마을 앞으로는 누렇게 익은 벼논과 수확을 끝낸 빈 논이 펼쳐져 있었다. 남파랑길은 마을 앞 농로를 따라 이어졌는데, 그 농로에 노부부가 다정스레 걸어가고 있었다. 그 뒷모습이 너무 아름답고 멋있게 보였다. 가까이 가서 보니 할아버지는 지팡이를 짚고 계셨고, 할머니는 보행용 워커에 의존해 걸으면서 흥얼흥얼 기분 좋게 노래를 부르고 계셨다.
푸른 하늘 향해 하얗게 피어있는 억새꽃에서 가을의 정취가 진하게 느껴졌다. 주렁주렁 달린 감은 가을 햇볕에 익어가고 있었고, 조 이삭은 고개를 숙이고 수확의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계절은 생명의 기운을 발산하는 여름의 푸르름이 아니라 속으로 익어가는 가을의 갈색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생명의 기운이 왕성했던 여름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산과 들에는 결실의 가을 기운으로 충만한 듯했다.
길 옆에는 이름도 좀 고약한 며느리배꼽풀이 예쁜 열매를 맺고 있었다. 줄기에 작은 가시가 많고 꽃도 볼품없어 귀찮은 잡초 정도로 생각했는데, 남빛 보석 같은 열매를 달고 있어 신기했다. 가을에 예쁜 열매를 맺는 식물들이 더러 있다. 그 대표적인 나무로 별모양의 브로치 같은 꽃받침에 짙은 남색 열매를 얹고 있는 누리장나무, 보라색 열매를 송알송알 맺고 있는 작살나무 그리고 쥐 눈 같은 새까만 열매를 달고 있는 쥐똥나무가 있다. 그런데 이들 나무의 이름은 하나같이 열매만큼 예쁘지 않고 생뚱맞다.
포장도로 갈라진 틈새를 비집고 뿌리를 내린 코스모스 분홍빛 꽃도 참 예뼜다.
남파랑길 55코스 일부(2.0km), 남파랑길 56코스(14.7km) 남파랑길 57코스 일부(13.0km), 남파랑길 59코스(8.4km), 남파랑길 60코스 일부(13.0km) (총 51.1km)
* 남파랑길 57코스 일부, 남파랑길 58코스 스킵
<선소(조식) - 소호요트장 - 용주할머니장터 - 나진교차로 - 봉화산 정상(간편중식) - 이목리마을회관 - (택시) - 소호동(석식, 박, 조식) - (택시) -기시리생태공원 - 궁항마을화관 - 장천마을노을쉼터(간편중식) - 봉전마을회관 - 두봉교>
9.20일 6시 - 16시 30분, 9.21일 7시 30분 - 14시 (총 17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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