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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파랑길

남파랑길19. 광양숲에서 순천왜성 가는 길

광양에서 둘째 날 아침 6시, 여명의 아침이었고 짧은 옷을 입기에는 좀 쌀쌀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벌써 계절의 변화가 느껴졌다. 하기야 입추를 지난 지 벌써 일주일은 지났으니.
 
남파랑길은 8차선 차로를 따라 자전거길과 함께 조성된 인도를 따라 이어졌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거리에 사람은 드물었지만, 차들은 무서운 속도로 굉음을 뿜으며 달리고 있었다. 멀리 이순신 대교가 마치 하늘에 걸려있는 듯 보였고, 해안에는 대형 크레인이 거인처럼 서있었다. 산업도시 광양의 스카이라인은 마치 거인국의 서커스 무대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시끄러운 도로를 한참을 가다가 임도로 꺾어 들었다. 숲으로 우거진 도로로 들어서자 비로소 복잡한 도심을 벗어났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임도 초입은 가팔랐지만 이내 순해졌다. 광양 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평탄한 곳에 배낭을 내리고 자리를 잡았다. 아침에 편의점에서 산 추억의 크림빵과 플레인 요거트 그리고 어제께 길거리에서 산 배로 느긋하게 아침 요기를 달랬다.
 
임도는 산허리 등고선을 따라 평탄하게 계속 이어졌다. 도로 관리도 잘되어 있었다. 오른편으로는 나이 어린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고, 왼편으로는 종가시나무 가로수가 줄 서 있었다. 종가시나무는 늘푸른 참나무 종류로 남부지방에 자라는 나무다. 의외로 어린 소나무 숲이 참신하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많은 소나무를 봤지만 어린 소나무를 본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울창해진 숲에서 어린 소나무는 잘 자랄 수 없다. 빛이 있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어린 소나무는 어두운 숲 속에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숲이 울창해지면 역설적으로 소나무는 경쟁에 밀려 숲에서 점차 쫓겨나고 만다.
 
고개를 넘자 한 무리 사람들이 보였다. 가까이 가서 보니 길로 뻗어 나오는 칡넝쿨을 제거하고 있었다. 왕성하게 자라는 칡 줄기를 제거하고 땅속 칡뿌리에 제초제를 주입하고 있었다. 
 

사라실예술촌에서 버스를 타고 점심때가 지나 광양읍에 도착했다. 한 때 광양의 중심지였던 곳이다. 동광양과 통합하여 광양시로 승격한 후에는 그 중심 기능이 동광양 지역으로 넘어간 것 같았다. 하지만 광양은 오랜 역사를 간직한 곳이며, 읍내 곳곳에는 그 흔적이 남아 있었다.
 
먼저 찾은 곳은 유당공원이었다. 이곳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이팝나무와 광양읍수가 있었다. 광양읍수란 광양 마을숲이라는 뜻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500년 전, 당시 현감이었던 박세후가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고, 풍수지리적으로 허한 기운을 보강하기 위해 조성하였다고 했다. 광양읍수는 방풍림防風林이자 비보림裨補林이었던 것이다. 광양읍수는 일제강점기 때 많이 훼손되었고, 지금은 유당공원과 교차로 맞은편에 읍민들의 휴식 숲으로 남아 있었다.  
 
광양읍수에는 이팝나무 팽나무 푸조나무 느티나무 왕버들 등 500살이 훨씬 넘은 노거수들이 많았다. 그중 이팝나무는 줄을 처서 보호하고 있었고, 특이한 모양의 푸조나무와 왕버들이 눈길을 끌었다. 푸조나무는 팽나무와 4촌으로 소금기가 섞인 바닷바람에 강해 해안가 방풍림으로 많이 심는 나무다. 바람을 이겨 내기 위해 수형이 둥근 유선형으로 만들어지고 밑둥치 부근에 넓적한 판근板根이 발달하는데, 그 모양이 특이하고 아름답다. 이곳 푸조나무는 세월의 훈장을 나무둥치에 멋지게 새기고 있었다. 왕버들도 세월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한 듯 온몸에 상처를 입고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흉하다기보다 영광스럽게 보였다. 옛사람들은 나무를 그냥 심은 것이 아니라 쓰임새에 풍류의 멋을 더해 심은 것 같았다. 안동 도산서원 앞마당에 별 쓸모도 없는 왕버들을 왜 심었을까, 궁금했었는데 그 까닭을 알 것만 같았다.     
 

푸른 들을 지나고, 비닐하우스 사잇길을 지나고, 텅 빈 마을을 나그네처럼 외롭게 걸었다. 8월 중순 오후, 농촌은 거대한 침묵의 공간처럼 느껴졌다. 가끔 볼 수 있었던 두루미마저 더위를 피해 숲으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반갑게도 박주가리가 논둑에 모여 꽃을 피우고 있었다. 박주가리는 꽃은 볼 품 없어도 향기가 매력적이다. 향기가 넓게 퍼지지 않아 그냥 지나치기 쉽지만 가까이서 맡아보면 어떤 고급 향수 못지않다.   
 
마을 앞 느티나무 정자 숲에 잠시 쉬어 갈 겸 들어갔다. 마침내 또래의 마을 사람이 한가롭게 평상에 앉아서 말을 걸어왔다. 무더위에 배낭을 멘 초췌한 내 모습이 안쓰럽게 보였던 모양이다. 19년이나 마을 이장을 했다는 구릿빛 촌부는 그냥 편하게 살면 되지, 뭐 하러 사서 고생을 하나고 힐문하듯 말했다. 다시 길을 나설 때 스쿠터를 타고 떠난 촌부는 세상에 걱정 없는 한량처럼 보였다.
 
마을 앞 들판은 넓었다. 바다를 메워 간척한 땅이었다. 부지런한 농부가 일찍 심은 벼는 벌써 알곡을 달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허수아비가 아닌 허수매가 지키고 있었다. 들길은 끝이 가물가물, 소실점 너머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 뒤로 공장 굴뚝이 보였다. 들판 너머 공장 굴뚝. 불현듯 개발연대의 한 장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촌부의 말에 의하면 이곳 사람들은 땅값이 좋아 다 부자라고 했다.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젊었을 때 가끔 불렸던 곡조를 읊조리며 터덜터덜 걸었다. 
 

오후의 뙤약볕을 강렬했다. 일직선의 방조제 길은 지루했다. 좁은 수로 건너편으로는 공장들이 들어서 있고, 머리 위로 지나가는 도로 위로는 차들이 무섭게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바닷가 다리 밑에는 시원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대여섯 명이 평상 위에서 고성에 삿대질을 하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옆에는 벌써 빈 술병이 나 뒹굴고 있었고, 싸우는 것인지 술을 마시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풍경이었다. 
 
광양 땅을 지나 순천 땅으로 들어섰다. 곧이어 충무사 사당이 나타났다.
이 지역은 정유재란 막바지, 도망치던 왜군들이  마지막으로 저항했던 곳이었다. 이순신 장군이 바닷길을 막고,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 이들을 공격했다. 그 당시 수많은 왜군들이 죽었고, 전쟁폐허가 된 이 지역은 전쟁이 끝나고 100년이 지나서야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 그런데 밤마다 왜귀가 자주 출몰하여 주민들을 괴롭혀, 주민들이 사당을 짓고 충무공의 위패와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자 왜귀들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했다.
 
충무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순천 왜성이 있었다. 정유재란 때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호남 공격을 위한 전진기지 겸 최후 방어기지로 삼기 위해 쌓은 성이었다. 이 성은 우리의 성과는 판연히 다른 형태를 하고 있었다. 이 성을 쌓는데 3개월 걸렸다고 하니, 그 당시 동원되었던 조선의 백성들이 얼마나 많은 고생 하였을까.
 
1598년 이곳에서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과 도망가는 왜군 사이에 마지막 결전이 벌어졌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노량 앞바다로 왜군을 유인하여 대승을 거두었고, 고니시 유키나가는 전투의 혼란을 틈타 도망을 친 곳이기도 하다.
 
 
남파랑길50코스(15.0km), 남파랑길51코스(17.6km) (총 32.6km)
<광양중동근린공원 - 배나무재(간편조식) - 점동마을 - 사라실예술촌 - (버스) - 광양읍(중식) - 신촌마을회관 - 충무사 - 순천왜성 - 율촌면사무소>
8.19일 6시 ∼ 17시 (11시간) 
* 율촌에서 택시를 타고 여수로 가서 KTX 타고 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