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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파랑길

남파랑길18. 섬진강 제방길 따라 동광양까지

 

하동 송림 앞 재첩국밥 집에서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송림 앞 로터리를 지나 섬진교 북쪽 인도로 걸었다. 어제 보지 못한 섬진교 북쪽 섬진강 풍경을 보기 위해서였다. 하동읍 건너편으로 매실마을로 유명한 광양 다압마을이 보였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재첩잡이 배는 정박되어 있었다. 섬진강은 온통 청색 물감을 부어놓은 듯 파랬다. 하동과 광양의 경계이자 전남과 경남의 경계인 섬진강은 무심히 흐르고 있었다.  
 
'젊은 교육도시 광양, 아이 양육하기 좋은 광양' 캐치프레이즈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지방 도시가 겪고 있는 인구감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충이 엿보였다. 
 
어제와 달리 섬진강을 따라 하구 쪽으로 걸어 내려갔다. 2차선 포장 도롯가에 만들어진 나무데크길을 얼마쯤 걸으니 제방길이 나타났다. 보행자길은 제방 위로 난 국토종주 섬진강 자전거길과 병행하여 이어져 있었다. 길은 평탄하고 걷기 좋았다. 하지만 태양을 막을 그늘이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중천으로 떠오른 태양은 따가웠다. 해파랑길을 걸을 때 장맛비와 더위로 고생한 적이 있어 7월은 피했건만 8월 따가운 햇살도 견디기 힘들었다.  
 
자외선을 차단하기 위해 얼굴을 감싼 머프를 벗고 우산을 양산 대신으로 썼다. 태양을 피하는 것만으로도 걷기에 한결 수월해졌다. 미풍이 얼굴과 목덜미를 타고 들어왔고, 이마에 맺힌 땀까지 식혀줬다.
 

 

왼편으로는 넓은 들이 펼쳐지고 오른편으로는 넓은 고수부지가 형성되어 있었다. 들에는 수확을 끝낸 빈 비닐하우스가 햇볕 아래 눈 부셨고, 고수부지에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간혹 자전거 라이더를 만나기도 했지만 빈 들, 빈 강둑은 인적 없는 적막강산이었다.
 
자연은 정중동, 쉼이 없었다. 달맞이꽃은 밤을 새워 노오란 꽃을 피워 반가웠고, 나팔꽃은 누구보다 일찍 남색 꽃으로 단장하고 어린애처럼 방긋 웃고 있어 고마웠다. 억새풀과 칡넝쿨이 무성한 고수부지에도 수크렁이 훌쩍 키를 키워 영롱한 빛깔의 꽃을 피우고 있었다. 
 
섬진강 자전거길, 하늘의 강
바다와 하늘이 만나는 섬진강, 마음의 편지를 보내는 곳 
 
유난히 큰 빨간 우체통이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화장실이었다.   
여행으로 쌓인 피로는 배설하고 여행의 즐거운 마음을 전해 달라는 뜻인가. 생뚱맞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기발한 발상이란 생각도 들었다. 
 

점심때 섬진강 하구 망덕포구에 도착했다. 길가 가드레일에 앉은 갈매기는 가까이 가도 날아가지 않았다. 이미 사람들과 친숙해진 듯했다. 백합요리를 먹으러 간 적이 있는 음식점에 들렸더니 벌써 전어회와 전어 구이 음식을 팔고 있었다. 하지만 손님이 많아 오래 기다려야 한다고 해서 그냥 나왔다.
 
도로 옆에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이 있었다. 이리저리 사진을 찍고 있는데 해설하시는 여성분이 와서 설명을 해주었다.
 
윤동주 시인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시집을 육필로 3부를 작성하여 1부를 후배인 정병욱에게 주었다... 일제에 의해 학도병으로 끌러가게 된 정병욱은 시집을 어머니에 맡겼고, 어머니는 마루밑 항아리에 고이 감춰두었다. 학도병에서 살아 돌아온 정병욱은 해방 후인 1948년 1월 30일 유고집으로 출간하였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고,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북간도 순수 청년, 윤동주의 시집.
하마터면 세상에 빛을 볼 수 없을 뻔했던 이 시집이 남쪽 섬진강 하구에서 이렇게 되살아났다. 오늘날 전 국민이 애송하고 있는 민족시인 윤동주의 시는 이런 기구한 역정을 거쳐 우리 앞에 기적처럼 나타나게 된 것이었다. 
 

배알도 '별헤는 다리'를 건너 광양국가산업단지로 들어섰다. 남파랑길은 수변공원을 지나, 2차선 산업도로 옆으로 자전거길과 함께 조성되어 있었다. 이 길은 걷기에 너무나 힘들었다. 일직선의 차도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뻗었고, 대형트럭이 무섭게 굉음을 내며 달리고 있었으며, 인도에는 햇볕을 가려줄 가로수가 아예 없었다. 인내하고 인내하며 걸었다.
 
내가 본격적으로 도보여행을 시작하게 된 것은 2020년 3월, 해파랑길 트레킹부터다.   
그것은 코로나19와도 관련이 있다. 해외여행이 중단되고, 국내 모임마저 자제하는 분위기에서 갑갑함은 쌓여갔다. 게다가 손녀가 다니는 어린이집마저 문을 닫게 되어 아내는 손녀를 케어해 주기 위해 아들 집으로 가게 되었고, 덩그러니 혼자 남게 된 나는 궁리 끝에 그 돌파구로 해파랑길 트레킹을 가게 된 것이다.
 
걷다 보니 걷는 재미에 푹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내 도보여행 경험을 책으로 내보자는 욕심도 생겼다. 
'걸으면서 우리나라의 아름다움을 보고, 듣고, 느끼고, 상상하고, 표현하자'
이젠 도보여행을 계획하고, 실행하고, 그것을 후기로 쓰는 일련의 과정은 내 삶의 가장 중요한 일상이 되었다. 
 
젊었을 땐 등산과 트레킹은 내가 가장 즐겼던 취미생활이었고, 은퇴 후 한 때 심한 우울증을 앓았을 때는 치료제 역할을 하기도 했었다. 지금은 나의 삶 그 자체이다. 도보여행은 내에게 주어진 생물학적 시간을 장식해 줄 즐거운 행위이자 소중한 의식이기도 하다. 
 
'나에게 산책은 구원이다'
'내가 산책을 사랑하는 가장 큰 이유는 산책에 목적이 없다는 데 있다'
같이 해파랑길을 트레킹 한 적이 있는 친구가  '나는 왜 산책을 하는가'라는 글을 카톡으로 보내주었는데 그 속에 있는 글귀다. 산책에 대한 나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도보여행은 산책과는 차원이 다른 것 같다. 나에게 도보여행은 삶의 목적이 되어 버렸으며, 도보여행을 통해 내 삶이 윤택해진 것 같다.   

  
힘들고 지루한 길을 한 시간 이상 걸었다. 몸은 지쳐가지만 의식은 오히려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도중에 시내버스를 타고 싶은 마음을 꾹꾹 참고 걷고 또 걸었다. 눈앞에 흰 연기를 뿜는 굴뚝들이 나타났다. 포스코였다. 왕복 6차선 도로에는 대형트럭이 무섭게 달리고 있었다.
 
포스코 건물을 지나 삼거리에서 남파랑길 리본이 안내하는 금섬해안길을 포기하고 철조각 공원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금섬해안길은 지금까지 힘들게 걸어온 해안길과 비슷할 것 같아 내키지 않았고, 제철소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마을 가운데 철조각공원에는 금호도 이주민 탑 그리고 적색과 흑색 철조각품이 설치되어 있었다. 사람 인人 자의 이주민 탑은 광양제철 건설로 정든 고향을 떠난 이주민들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뜻이 담겨 새겨져 있는 듯했다. 그늘 아래 벤치에서 꽤 오랫동안 쉬었다. 아파트 단지는 저층이었고, 나무가 많은 쾌적한 환경이었다. 마치 숲 속에 아파트가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런데 쌩쌩 빠르게 달리는 차량 소음이 귀를 멍하게 울렸다. 
 

8월의 늦은 오후도 태양은 따가웠다. 지친 몸을 끌고 오늘의 종착지 중동근린공원에 도착했다. 마침 밀짚모자를 쓴 할아버지가 햇배를 팔고 있어 2개를 샀다. 그리고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햇배를 깎아 먹었더니 달고 물 많은 배 맛에 피로가 가시는 듯했다. 


남파랑길48코스(13.7km), 남파랑길49코스(15.5km) (총 29.2km)
<섬진교 - 진월초등학교 - 윤동주유고보존정병욱생가 - 망덕포구(중식) - 배알도수변공원 - 포스코 - 철조각공원 - 중동근린공원(석식, 박)>
기간 : 2022.8.17일 07∼17시 (총 10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