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에서 둘째 날 오후, 햇살은 강렬했지만 바람은 시원했다. 죽방렴을 곁눈질하며 넓은 갯벌을 지나고, 나지막한 고개를 넘어 방천 뚝을 따라 이어진 들길로 들어섰다. 지족해협과 창선도는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났고, 남해 본섬 트레킹 길에 본격적으로 올라섰다.
5월의 농촌은 의외로 한가로웠다. 마늘 수확을 하는 농부의 모습도 보였지만 적막감마저 느껴졌다. 아직 본격적인 농사철이 아니라서 그런가? 하지만 물을 가득 가둔 논에서는 모내기 농번기를 앞둔 정중동의 농촌 분위기가 느껴졌다. 길가에 오디가 다닥다닥 오지게 달린 야생 뽕나무가 눈에 띄었다. 까맣게 익은 오디를 따서 친구들에게 주었더니, 그 단맛에 놀라워했다. 아직 덜 여문 붉은색 오디는 시큼한 맛이 났다. 어릴 적 참 많이도 따먹던 오디다. 갑자기 추억 속 어릴 적 시골 풍경 속으로 들어온 듯했다.
향긋한 향기가 나서 둘려보니 담장을 덮고 있는 덩굴식물 꽃에서 풍겨 났다. 낯선 꽃이라 신기해하고 있는데, 친구가 백화등 꽃이라고 했다. 백화등은 남부 지방에 자생하는 상록 덩굴식물이다. 삼천포 각산 등산로 옆 산사 돌담에서도 봤고, 남해에서도 몇 차례 본 적이 있는 꽃이었다. 산비탈에 하얗게 핀 찔레꽃도 향기를 뿜고 있었고, 밭둑 멀구슬나무 보라색 꽃에서도 진한 향기가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5월의 남해는 기분 좋은 향기에 젖어 있었다. 쾨쾨하고 구린 거름 익는 냄새마저 코에 익어서 그런지 반가웠다.
온몸으로 봄을 느끼고 즐기며 걷다가 작은 고갯길을 넘으니 또 다른 남해의 풍경이 눈앞에 나타났다. 툭 터인 바다와 마을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숲. 지금까지 봐온 좁고 잔잔한 바다와 어촌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게다가 산 중턱을 따라 형성된 유럽풍의 붉은 지붕 마을은 이색적이었다. 바닷가 어촌은 물건리 마을이었고, 산 중턱 마을은 독일마을이었다.
바다와 어촌 사이에 아름다운 숲이 보였다. '물건리 방조어부림'이라는 다소 생소한 이름이 붙은 숲이었다. 바닷물이 넘치는 것을 막아 농지와 마을을 보호하고, 물고기가 살기에 알맞은 숲으로 인공 조림한 것이었다. 17세기에 만들어진 이 숲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었다. 한 때 숲의 나무 일부를 훼손했다가 폭풍 피해를 크게 입었고, '숲을 해치면 마을이 망한다'라는 말이 전해지면서 지금까지 신성시하고 있다고 한다.
숲은 너무 멋졌다. 거의 1km에 달하는 숲 속에는 팽나무, 푸조나무, 참느릅나무, 말채나무, 상수리나무, 느티나무, 이팝나무, 무환자나무, 후박나무 등 다양한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었다. 숲이 주는 풍성함과 아늑함은 단연 으뜸이었다. 나무마다 이름표가 달려 있어 숲 생태 학습장으로도 손색이 없어 보였다.
숲을 떠나기가 아쉬워 두리번거리는데, 숲 바로 앞에 펜션이 보였다. 좀 이르기는 해도 숙소를 여기로 정하기로 하고 전화를 걸었더니 펜션 주인은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있다고 하면서, 열쇠 위치를 알려주었다. 길 맞은편 독일 빵집에서 점장이 권하는 빵과 음료수 그리고 '광부의 노래'라는 지맥주를 샀다. 그리고 친구들과 숲이 보이는 펜션 테라스에 앉아 맥주를 마시면서 즐거운 수다에 빠졌다. 해가 떨어져 어둠이 내릴 때까지 여독도 잊은 채 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다음날 새벽 다시 방조어부림 둘러보고 트레킹 길을 나섰다. 텅 빈 마을 거리, 적막감속에 공기는 상쾌했다. 물건리 마을 위쪽 상가거리를 지나 독일마을로 갔다. 1960년대 광부와 간호사로 독일에 파견되었던 사람들이 고국으로 돌아와서 살 수 있도록 조성한 독일풍의 마을이었다. 괴테하우스, 프랑크푸르트, 하이델베르크... 집 앞에는 파독의 집이란 넓적한 명패에 집 이름, 사는 사람과 간단한 소개글이 적혀 있었다. 노후 귀국 생활을 안정적으로 할 수 있도록 민박이 허용되어 펜션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우리의 산업화 시대에 중요한 역할을 한 독일 파견 광부와 간호사들에게 고국에 돌아와 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더불어 관광객을 유치하고자 했던 남해군의 창조적 아이디어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독일마을 위 고갯마루, 독일광장을 지나 완만한 내리막길 아스팔트 도로를 걸었다. 일찍 일어난 새들이 길동무가 되어 주었다. 애완견을 데리고 산책 갔다 돌아오는 여성과 가벼운 목례를 했다. 기분 좋고 상쾌한 아침, 길 옆에 베어놓은 풀 마르는 냄새마저 후각 세포를 깨웠다.
예로부터 화천은 봄이 되면 피었던 꽃이 물에 떨어져 흘렸다고 하여 꽃내라고 불렀습니다.
사시사철 꽃이 피는 자연환경을 예찬했던 유배객들이 남긴 유배문학이 전해지는
화천을 따라 걸으면서 아름다움과 문학의 정취를 느껴 보세요.
화천을 따라 화천별곡길이 잘 정비되어 있었다. 화천은 남해의 명산 금산에서 발원하는 제법 큰 개울이었다. 풀을 뜯어먹다가 낯선 사람이 신기하다는 듯 빤히 쳐다보는 염소들도 만났고, 꽃송이채 뚝뚝 떨어져 있는 하얀 때죽나무 꽃길도 지났다. 기암괴석이 아름다운 개울 옆에 조성된 공원에서 쉬기도 했다. 골짜기는 길었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갈수록 넓어졌다. 어촌이 많은 남해에서 보기 힘든 산골 별유천지였다. 한양에서 먼 섬, 남해로 유배 온 선비들이 찾았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골짜기 안에는 제법 너른 들이 있었다. 밭에는 보라색 꽃이 핀 자색감자가 수확을 앞두고 있었고, 무논에는 이양기가 느릿느릿 모내기를 하고 있었다. 막 모내기가 끝난 논에는 하늘과 산이 내려앉아 있었고, 그 뒤로 마을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한적하고 정겨운 느낌을 주는 농촌 풍경이었다. 마을 이름은 내산內山이었다. 산속에 있는 마을, 너무 직설적인 동네이름이라는 느낌과 함께 애잔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분교는 이미 폐교가 되었고,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카페로 운영되고 있었다.
내산 마을을 지나자 내산 저수지가 나타났다. 그리고 전망이 좋은 자리에 '바람흔적 미술관'이 있었다. 좀 쉬어 갈 겸 미술관에 들렀더니 문은 닫혀 있고, 여성 두 분이 잔디밭 의자에 앉아 있다가 자리를 비켜 주었다. 고맙다는 인사말과 함께 물건리에서 걸어왔고 상주해수욕장까지 걸어갈 예정이라고 하니 놀랐고, 아침도 먹지 못했다고 하니 더 놀라면서 싸가지고 온 음식을 몽땅 건네주었다. 삶은 계란, 떡, 커피 그리고 초콜릿. 초췌해진 우리 모습에서 모성애를 느낀 것일까. 두 분은 농촌 노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건강 강사였는데, 코로나 시국에 쉬다가 지방선거 임시 홍보요원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했다. 사람 만나기 힘든 외진 곳에서 고마운 의인을 만난 셈이었다.
'이곳부터 약 8km 구간은 중간 탈출로 없는 임도입니다.
일몰시간 전후 진입을 삼가세요'
친절한 안내 입간판을 뒤로하고 내산저수지를 삥 돌아 임도로 들어섰다. 산세를 따라 닦은 임도는 구불구불 완만한 오르막이라 힘들지는 않았다. 구름이 끼인 하늘은 그렇게 따갑지 않아 다행이다 싶었다.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은 온통 신록의 바다였다. 활엽수의 숲 라인은 물결치듯 부드러웠고, 침엽수의 숲 라인은 잘 훈련받은 경비병처럼 꼿꼿했다. 오른편으로는 금산의 바위산이 보이기도 했다. 5월의 숲은 좋았다. 봄 숲의 푸르름에서 발산하는 생명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졌다.
고갯마루에 올라서니 목재 더미가 곳곳에 쌓여 있었다. 간벌을 한 편백나무 목재였다. 일대는 온통 편백나무 숲이었다. 그리고 조금 더 내려가자 편백나무 휴양림 갈림길이 나타났다. 임도는 편백나무 숲 사이로 이어졌다. 편백나무 피톤치드 향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기분도 산뜻해지고, 발걸음도 가벼워졌다. 완만한 내리막길을 내려가니 전망대가 나타났고, 안개구름 속에 바다 풍경이 흐릿하게 보였다. 제법 숲길을 걸었음에도 숲이 끝나자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하 몽돌해변을 지나, 오후 1시쯤 상주해수욕장에 도착했다. 그리고 우선 눈에 띄는 식당에 들어갔다. 주 메뉴는 멸치 무침과 멸치 쌈밥이었지만, 친구가 원하는 볼락 매운탕을 시켰다. 그런데 먼저 멸치 무침이 나왔다. 의아해하고 있는데, 잘못 나왔다고 하면서 다시 가져갔다. 그리고 조금 지나 몸이 불편해 보이는 여성 분이 매운탕과 멸치무침을 카트에 담아 왔다. 식당 여사장이었다. 지족과 물건리에서 멸치 음식을 많이 먹어봐서 안 먹어도 된다고 했더니, 양념 맛이 다르다면서 그냥 먹어보라고 했다. 음식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게 느껴졌다. 3년 전 음식점에 불이 난 후, 정신적 충격을 받아 앓아 누었었는데 다시 식당일을 하니 좋아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상주해수욕장 자랑을 많이 했다. 상주에는 3층 이상 건물이 없다고 했다. 건물이 높으면 건물에 바람이 부딪쳐 모래가 쓸려가 백사장이 좁아지는데 상주해수욕장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고 했다. 이런 상주해수욕장이 좋아 다시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식당을 나와서 상주해수욕장을 보니 기시감이 강하게 느껴졌다. 젊은 20대 때 본 잠재의식 속 상주해수욕장 풍경이 다시 떠올랐던가 보다.
남파랑길39코스 일부(7.9km), 남파랑길40코스(16.2km), 남파랑길41코스 일부(4.0km) (총 28.1km)
* 남해바래길 본선 6코스 일부, 본선 7코스, 본선 9코스 일부
<전도마을회관 - 남해유스타운 - 마동천마을회관 - 물건리방조어부림(박,석식) - 독일마을 - 화천 - 내산마을 - 내산저수지 - 남해편백휴양림갈림길 - 천하몽돌해변 - 상주해수욕장(중식)>
5.19일 12시 - 16시, 5.20일 6시 - 12시 (총 12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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