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 은모래해수욕장에서 좀 늦은 점심을 먹고 친구들과 헤어졌다. 2박 3일을 친구들과 같이 여행하다가 나 홀로 트레커로 돌아왔다. 목적지는 남파랑길 41코스 종점 원천항으로 잡았다. 거리는 약 15km, 오후 6시 지나서야 도착할 것 같았다.
풍경이 확 바뀌었다. 아침 일찍부터 골짝길을 걷고 산길을 걸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관리된 도로를 걸었었는데, 해안가 숲 속 좁은 오솔길로 들어섰다. 언뜻언뜻 바다가 보였고 세찬 파도소리도 들려왔다. 잡목이 점령한 초소도 보였고, 폐허가 된 건물도 보였다. 오래전 해안경비대가 있다가 철수한 지역 같았다. 걷고 있는 길은 그 당시 초병들이 다녔던 길 같았다. 그런데 너무 한적했다. 오가는 사람도 없었고 마을도 멀찍멀찍 떨어져 있었다.
망망 푸른 바다가 나타났다. 남파랑길을 걸으면서 섬으로 둘려 쌓인 호수 같은 바다만 쭉 봐오다가 시야가 툭 터인 바다를 보니, 해파랑길을 걸으면서 본 동해 바다가 떠올랐다. 같은 남해바다지만 어제와 그제 본 남해 바다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끝이 보이지 않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는 오후의 햇살을 받아 황금빛을 띠기 시작했다.
오후 5시쯤 백련항에 도착했다. 바로 앞에는 삿갓처럼 생긴 작은 유인도 섬이 보였다. 서포 김만중 선생이 유배를 와서 일생을 마친 노도였다. 백련항에서는 노도로 가는 작은 연락선이 운행되고 있었다. 종착지 원천항까지는 1시간 정도 더 걸어야 했다. 인터넷 지도 앱으로 검색을 해보니 게스트하우스가 있어, 전화를 걸어 예약을 하고 길을 재촉했다. 원천 마을은 제법 큰 어촌 겸 해수욕장이었다. 모래사장에는 어린애를 데리고 온 젊은 부부가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있었고, 해변 펜션에는 바비큐 파티를 하는 한 무리 젊은이들도 있었다. 평일에는 잘 볼 수 없었는데, 휴일을 앞둔 금요일 저녁이라 볼 수 있는 풍경이란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꼭두새벽 5시에 게스트하우스를 빠져나왔다. 6명이 잘 수 있는 도미토리형 숙소를 혼자서 썼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여행객을 만나서 이런저런 얘기도 하고 싶었는데 아쉬웠다. 여명 속에 바다는 오히려 선명했다. 바다는 섬 가운데로 깊숙하게 파고 들어와 있었다.
'자연이 살아 숨 쉬는 생명의 섬,
대한민국 국가지정 생태관광지역, 남해 앵강만'
바다는 앵강만이었고, 길은 앵강다숲 길이었다. 앵강만은 넓고 깨끗했다. 한려수도 남해 바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굴이나 멍게를 키우는 흰색 양식장 부표는 눈에 띄지 않았다. 해삼이나 전복 종자를 방류하여 자연 상태에서 키우고 있었다. 이러다 보니 바다도 깨끗하게 유지되고 있는 것 같았다. 갯게, 기수갈고둥, 흰발농게 등 멸종위기종들도 서식하고 있었다. 환경부는 이 지역을 한국 생태관광지역으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보존하고 있었다.
앵강만의 가장 깊숙한 자리에 신전 숲이 있었다. 400여 년 전부터 방풍림으로 조성하여 보호해 온 숲으로 군부대가 주둔하다가 2007년 군부대가 이전한 후 생태환경 관광단지로 재개발하였다고 했다. 숲길, 야생화단지, 수생식물원, 캠핑데크 등등 생태휴양 시설이 갖춰져 있었고, 바래길 탐방소도 있었다.
남파랑길 남해코스는 남해 바래길 코스의 일부다. 남해바래길은 총 20개 코스로 구성된 240km에 달하는 걷기 여행길이다. 남파랑길은 이중 11개 코스, 160km와 겹친다. '바래'라는 말은 남해 어머니들이 가족의 먹거리 마련을 위해 바닷물이 빠지는 물때에 맞춰 갯벌에 나가 파래나 조개, 미역, 고둥 등 해산물을 손수 채취하는 작업을 일컫는 남해 토속어다. 바래길은 2010년 오픈하였고, 2020년 10주년을 맞아 '남해바래길 2.0'으로 리모델링하였다고 했다.
남파랑길 남해구간은 걷기에 편했다. 관리가 잘 되어 있을 뿐더러 적절한 위치에 친절한 길안내 팻말이 꽂혀 있었다. 죽방렴, 고사리밭, 물건리 마을과 독일 마을, 편백림 숲길, 상주 은모래해수욕장... 편안하게 걸으면서 남해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보고 즐길 수 있었다. 아름다운 자연과 오랜 전통을 지닌 유산을 잘 보전하고, 사람들이 찾는 남해를 만들기 위해 아이디어를 내고 개발도 적극적으로 하고 있었다. 보전과 개발의 균형감을 느꼈다. 전국적인 둘레길 열풍 속에서 남해의 바래길은 돋보였다. 도보여행자로서 감사할 따름이다.
남파랑길은 신전숲을 지나 화계마을에서 오른편으로 꺾어 산자락을 타고 가도록 안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냥 해안길을 따라 계속 걸었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궁금증과 아쉬움도 있었지만 형편상 지름길을 택했다. 그런데 얼마 안 가 앵강만의 최고 뷰 포인트를 만났다. 좀 쉬었다 갈까, 하고 방파제를 넘어 해변으로 내려갔더니 기막힌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곳에서 좌우가 절묘하게 대칭된 앵강만의 풍경을 보게 되었다. 그곳은 거대한 항아리처럼 생긴 앵강만의 중심점이었다. 주변은 썩 매력이지 않았지만 전망은 오랫동안 나를 붙잡았다.
앵강만이 잘 보이는 산자락에 미국마을이 있었다. 안내문을 보니 모국에 돌아와 노후생활 보내고자 하는 재미교포를 위해 만들어진 정착마을이라고 했다. 한눈에 봐도 좋은 자리에 마을이 들어섰다는 느낌이 들었다. 길에서 산책을 하는 여성분을 만나 얘기를 해 보니 남편이 은퇴 후 내려와 펜션을 하면서 지낸다고 했다. 표정으로 봐서는 만족해하는 것 같았다. 독일마을과 비슷한 컨셉의 마을이지만 마을 분위기는 달랐다. 독일마을은 상업적이고 여흥의 이미지가 강한데 인데 비해 미국마을은 아담하고 여가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마을 뒤편 수로를 따라 이어진 산책로에서 보는 옅은 안개에 싸인 앵강만과 막 모내기를 끝낸 무논 풍경은 목가적이었다.
바닷가에 눈길을 끄는 것이 있어 내려가 보니 석방렴이었다. 돌로 뚝을 쌓아 고기를 잡는 원시적인 어로방법으로 흔히 독살이라고 부르는데, 남해에서는 지족 죽방렴 명칭에서 차용해서 석방렴이라고 하는 것 같았다. 태풍으로 사라졌던 것을 다시 축조하여 도시인의 체험장과 학생들의 학습장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하트형 모양의 석방렴을 밟고 돌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있다고 했다.
가천 다랭이마을 길 안내목이 나타났다. 파도에 깎인 해안 숲 속을 따라 산책로가 만들어져 있었다. 넓고 푸른 한 바다가 눈앞에 펼쳐지고, 유자나무 밑에는 쉼터 의자가 놓여 있었다. 참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이런 풍경 속을 걸으면 멍해진다. 유체이탈의 행복감에 빠져든다. '난 전혀 부럽지가 않아' 최근 들은 엉뚱한 노랫말이 절로 떠올랐다.
가천 다랭이 마을에는 방문객이 많이 보였다. 흰색 옷을 입은 소녀들은 주황색 지붕 카페 하얀 데이지와 남보라 수레국화 꽃밭에서 푸른 하늘과 바다 그리고 꾸불꾸불 다락논을 배경으로 바쁘게 사진을 찍고 있었다. 10시가 조금 지난 시간, 막 문을 연 식당에 첫 손님으로 들어갔다. 유자 막걸리 1병에 톳멍게비빔밥을 시켜 아침 겸 점심을 때웠다.
사람들이 다랭이 마을을 많이 찾는 이유는 뭘까? 세 번째 방문인데, 그 궁금증은 여전했다. 열악한 자연환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끈기 있게 살아온 삶의 궤적에 대한 경이로움에서 일까. 색다른 풍경에 대한 호기심에서 일까. 아니면 언론을 통해 퍼진 유명세 때문일까. 아무튼 또다시 다랭이 마을 다락논과 바다 풍경을 사진에 담고 발걸음을 옮겼다.
남해에서의 도보여행 4일째 오후, 가천 다랭이마을을 지나자 앵강만도 완전히 벗어나고 또 다른 풍경이 나타났다. 남으로는 망망대해가 펼쳐지고, 서쪽 바다 건너편으로는 여수 돌산도가 보이기 시작했다. 동북쪽 창선에서 시작하여 대칭방향에 있는 서남쪽 끝자락 남면까지 걸어온 셈이었다. 마을은 눈에 띄지 않고, 해안단구 위 전망 좋은 곳은 펜션단지가 들어서 있었다. 이렇게 멀리까지 누가 찾아올까, 괜한 생각을 하며 터덕터덕 걸었다.
해안선을 따라 북쪽방향으로 계속 걸었다. 바다는 내해처럼 잔잔해졌고, 바다 맞은편에 여수 시가지가 건너다 보였다. 거의 남해의 서쪽 끝자락까지 왔다. 거센 파도에 깎여 만들어진 해안단구도 끝나고 평탄한 지형에 자리 잡은 향촌마을과 선구마을이 나타났다. 그리고 아름다운 몽돌 해수욕장을 만났다. 엄지 손가락 크기의 몽돌은 예쁘고 깨끗했다. 상주 은모래해수욕장을 떠난 후 꼬박 하룻만에 만나는 해수욕장 다운 해수욕장이었다.
선구마을은 정감이 가는 어촌 마을이었다. 잔잔한 바다, 몽돌 해수욕장 그리고 서북풍을 막아주는 둔덕 아래 아담한 마을과 붉은 황토밭. 그림에서나 봄직한 어촌 풍경이었다. 골목길을 지나 위쪽으로 올라가니 눈에 익은 숲이 보였다. 오래전 설흘산 정상을 넘어 가천 다랭이 마을로 하산하는 등산한 적이 있는데, 그때 보았던 기억이 났다. 숲 가까운 곳에 설흘산 등산 진입로가 있다.
숲은 쉼터 역할을 하는 정자 숲이면서 마을을 지키는 당산 숲이었다. 가장 오래된 대장 나무는 거의 400년이 된 팽나무였고, 주위에 일곱 그루의 나무를 호위장수처럼 거느리고 있었다. 팽나무 아래에는 새끼로 금줄이 쳐져 있었다. 남해에서 몇 번 봤지만 신기해서 알아보니, 당산나무에 제사를 지내고 밥을 묻는 '밥무덤'이라고 했다. 남파랑길을 걸으면서 의아하게 느낀 것은 동해안과 달리 성황당이 눈에 띄지 않은 것이었다. 바다가 주 생활터전인 남해안에는 왜 성황당이 잘 보이지 않을까. 혹시 밥무덤이 성황당의 흔적이 아닐까. 전도마을, 물건리마을, 화계마을에서도 당산나무 아래 새끼 금줄이 쳐져 있었다.
숲에는 팽나무 여섯 그루와 말채나무 한그루가 있었다. 말채나무는 지네가 싫어하는 나무다. 신성한 공간이자 마을의 쉼터였던 성황숲에 징그러운 지네가 나타나는 것을 막기 위해 말채나무를 심었을 것이다. 경건한 마음으로 선구마을 성황숲 아래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다시 걸음을 재촉하여 남파랑길 43코스가 끝나는 평산마을에서 택시를 타고 남해공용터미널로 가서 귀가했다.
남파랑길 41코스 일부(11.3km), 남파랑길 42코스(17.7km), 남파랑길 43코스(14.0km) (총 43.0km)
* 남해바래길 9 일부, 10, 11 코스
<상주은모래해수욕장 - 백련항 - 원천항(석식, 박) - 신전숲 - 미국마을 - 석방렴 - 가천다랭이마을(중식) - 선구마을 - 평산1리>
5.20일 14시 - 17시 30분, 5. 21일 5시 - 15시 (총 15시간 30분)
* 평산1리에서 택시를 타고 남해 공용버스터미널에서 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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