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5시 30분쯤 길을 나섰다. 이른 새벽임에도 날은 훤했다. 지도 앱에는 남파랑길이 삼천포대교 서쪽 인도로 안내하고 있었으나, 동쪽 인도를 따라 걸었다. 아침 일출을 보기 위해서였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삼천포대교에는 간간히 소형 트럭만이 지나가고 적막했다. 초양대교를 지나고 늑도대교를 지날 무렵 붉은 아침해가 바다에 길게 그림자를 비추기 시작했다. 삼천포와 남해를 잇는 다리는 삼천포대교, 초양대교, 늑도대교, 창선대교 4개였다.
창선대교를 건너자마자 창선치안센터 앞에서 건널목을 건너 본격적으로 남파랑길 남해구간 트레킹 길에 들어섰다. 숲길을 지나자 한적한 어촌이 나타났다. 부드러운 아침 햇살을 받은 마을은 안온했고 잔잔한 바다는 평화로웠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나무가 있어 가보니 왕후박나무였다. 후박나무의 변이종으로 수령이 500살이나 되고, 밑동에서 가지가 11개나 뻗어 났고, 높이가 10m에 달하는 나무였다.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신성하게 여기고 마을의 평안과 풍어를 기원하는 제사를 매년 지낸다고 했다.
임도로 들어섰다. 숲이 울창하고 완만했다. 일찍 일어난 새소리도 듣기 좋았고, 꽃향기며 풀내음도 향기로웠고, 풋풋한 숲 냄새도 기분 좋았다. 무엇보다 임도에 그늘이 져 걷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아마 오전이 아니라 오후에 걸었다면 뜨거운 햇볕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시 3번 국도 옆 당항마을로 내려왔다. 시간은 오전 9시, 아침을 거르고 3시간 30분가량 걸었다. 목도 마르고 허기도 졌다. 마침 유자 빵카페가 있어 갔더니 아쉽게도 10시부터 영업을 한다는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지도 앱에는 마트가 있는 걸로 돼 있어 찾아갔더니 장사를 그만둔 지는 오래된 듯했다.
다시 임도를 걸어 11쯤 창선면 소재지에 도착했다. 그리고 눈에 띄는 카페에 들어갔다. 여기서 이번 트레킹에 동행할 친구 두 명을 만났다. 한 친구는 국립대학 교수로 근무하다가 퇴직 후 남해 마을재생사업 민간전문가로 활동하고 있고, 또 한 친구는 가끔 등산과 여행을 같이 하는 친구다. 눈꽃빙수와 음료수를 시켰더니 좀 늦더라도 양해해 달라고 부탁했다. 젊은 사장 부부는 문을 연지 일주일 됐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초보들이라 조금 느립니다'라고 쓴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돼지국밥집에서 막걸리를 곁들여 점심을 든든하게 먹고 본격적으로 트레킹에 나섰다. 오늘 걸을 지역은 고사리재배지역으로 한적한 농어촌이다. 마트도 없고, 식당은 한 곳 있으나 6월부터 10월까지 하모 철에만 한시적으로 운영한다고 했다. 숙소는 펜션 한 곳이 있어 미리 예약을 했다. 끼니는 숙소에서 직접 해 먹을 수밖에 없어, 하나로마트에서 간편 조리음식과 김치 등을 사서 베냥에 넣었다.
고사리는 남해 창선도의 대표적인 농업 특산품이다. 작은 섬에서 전국 생산량의 30%를 생산한다고 하니 놀라움을 넘어 신비롭기까지 할 정도다. 20여 년 전 창선도에서 고사리를 많이 키운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참 궁금했었다.
야트막한 산이 온통 고사리밭이었다. 아니 벌거숭이 붉은 민둥산처럼 보였다. 우리나라 어디를 가나 숲이 울창한데, 이채롭고 황량한 느낌마저 주었다. 이런 풍경은 고사리 새싹이 나는 봄철이라는 계절적 요인에 기인한 것 같았다. 고사리 채취가 끝나고 고사리 푸른 잎이 돋아나면 고사리밭은 푸른 초원처럼 보일 것 같았다. 그 풍경은 지금의 모습과도 사뭇 다를 것 같았다. 아름다운 남해 바다 그리고 초록의 고사리 밭, 이색적이고 멋진 풍경이 연상되었다.
전망 좋은 곳에 전망대를 설치하고 있었다. 고사리 모양을 형상화한 듯한 흰색 조형물과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벤치가 조성되고 있었다. 같이 동행하는 친구가 심혈을 기울여 수행하는 프로젝트였다. 설치 공사가 끝나고 주변 조경 공사까지 끝나면 고사리 밭의 명소가 될 듯했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서 휴식을 취하고, 멋진 풍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핫한 장소가 될 것으로 보였다.
3월부터 6월까지 고사리밭길 탐방은 사전 예약제로 운영하고 있었다. 탐방센터에 알아보니 고사리 밭주인들과 그런 조건으로 계약을 맺었다고 했다. 사전 지식 없이 온 여행자에겐 아쉬운 조건이지만, 고사리를 심고 가꾸는 농부의 입장에서 보면 이해 못 할 바도 아니었다. 고사리 전망대까지 설치하고 있으니, 앞으로 고사리밭 풍경을 좀 더 자유롭게 탐방할 수 있는 방안이 마련되기를 기대한다.
오후 늦게, 적량마을 미리 예약해논 펜션에 도착했다. 젊은 사장이 반갑게 우리를 맞이했다. 펜션은 깔끔했고, 앞바다에는 요트가 정박해 있었다. 서울에서 IT기업에 근무하다 내려왔다고 했는데, 밝은 표정으로 봐서 이곳 생활에 만족해하는 것 같았다. 요트는 자신의 소유며, 아직 영업허가가 나지 않아 숙박객에게 무료로 서비스한다고 했다. 펜션 테라스에서 준비해 온 식자재로 간편 요리를 하고, 소주를 곁들여 남해 밤바다에 취했다.
다음날 아침 6시 아침해가 펜션 테라스에 비칠 때쯤, 아침밥을 대충 때우고 출발했다. 아침해를 등지고 어촌마을을 지나고, 숲 가꾸기 사업으로 잡목이 제거된 소나무 숲을 지났다. 산뜻한 아침 공기 속에 친구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여유롭게 걸었다. 작년에 해파랑길을 완주하고 책을 낸 후 많은 친구들에게 나의 도보 여행이 알려졌고, 올해 남파랑길을 걷는다고 하니 동행을 원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지난 4월 통영구간에서는 한 명이 동행했고, 이번에는 두 명의 친구가 동행하게 되었다. 남해 마을재생사업 민간전문가로 참여하고 있는 친구는 직접 걸으면서 남해의 풍광을 느끼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친구들은 4박 5일 일정 중에 2박 3일만 동행했다.
11시쯤 지족에 도착했다. 지족에서 보는 바다와 땅의 풍경은 가장 남해스런 풍경이란 생각이 들었다. 죽방렴, 붉은 황토밭 그리고 뙤약볕 아래 마늘. 왜 남해에서 최고의 죽방멸치가 나오고, 고품질의 마늘과 고사리가 나오는지 풍경을 보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창선면 지족에서 창선교를 건너면 삼동면 지족이다. 물회를 먹을까, 멸치 쌈밥을 먹을까 망설이다가 들어간 멸치쌈밥집 여사장에게 들으니 두 지족을 창지족과 남지족으로 구분해서 부른다고 했다. 쌈밥은 푸짐했다. 단지 가격이 좀 비싸다는 것이 흠이었다. 친구로부터 남해에 관한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들었다. 삼동면사무소 건물을 신축하는데, 건물 앞 향나무 두 그루를 살리도록 설계한 것을 자랑삼아 얘기했다. 실제로 삼동면사무소에 가서 보니 건물 입구에 있는 향나무 두 그루는 쌍둥이처럼 닮았고, 절을 지키는 사천왕처럼 늠름하게 느껴졌다.
뭐니 뭐니 해도 지족해협 명물은 죽방렴이었다. 좁고 물살 빠른 해협에 23개나 설치돼 있다고 했다. 죽방렴은 지족해협의 빠른 물살을 이용해 고기를 잡는 전통어업 방식이다. 물목에 조류가 흐르는 방향과 거꾸로 대나무 발을 세워 고기를 가두고 물이 빠지는 썰물 때 죽방렴 안에 들어가 그물 쪽대로 고기를 잡는 방식이다. 멸치가 주로 잡히지만 갈치, 학꽁치, 도다리, 문어 등도 잡힌다고 한다. 실제로 고기잡이를 체험할 수 있는 죽방렴 체험장도 있었다.
죽방렴 체험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갯벌 체험장을 만났다. 이용객은 아무도 없었고, 젊은 청년이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무료함을 달래고 있었다. 마침 음료수도 팔고 있어 생수도 사고 냉커피도 마시면서 휴식을 취했다. 왜 이리 이용객이 없냐고 물었더니 대체로 평일에는 이용객이 드물고 휴일에는 100명이 넘는다고 했다. 곧 코로나 시국이 끝나고 방학철이 되면 이용객이 늘어나고 바빠질 거라고 했다. 그랬으면 좋겠다.
남해에는 젊은 사람들이 있었다.
카페를 운영하는 젊은 부부, 펜션을 경영하는 젊은이 그리고 갯벌체험장을 연 청년. 그들에게 행운을 빈다.
남파랑길36코스(17.5km), 남파랑길37코스(15.4km), 남파랑길38코스(12.0km), 남파랑길39코스 일부(2.0km) (총 46.9km)
* 남해바래길 본선 3코스, 4코스, 5코스, 6코스 일부
<삼천포항 - 삼천포대교 - 창선치안센터 - 단항마을 - 당항마을 - 적곡저수지 - 창선면사무소(중식) - 식포마을회관 - 고사리전망대 - 가인리마을회관 - 적량마을(박,석식,조식) - 추도 - 삼동면사무소(중식) - 전도마을회관>
5.18일 5시 30분 - 17시, 5.19일 6시 - 12시 (총 17시간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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