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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파랑길

남파랑길12. 통영의 바다 그리고 옛 길

통영에서의 사흘째, 통영을 벗어나 고성으로 넘어가는 남파랑길 29코스에 들어섰다. 안정에서 시작하여 죽림 신시가지를 거쳐 견내량에서 1박을 하고, 그리고 또 꼬박 1박 2일을 통영시내에서 보낸 셈이다. 남파랑길 코스에는 빠져있지만 통영을 이해하고 즐기는데 빠져서는 안 되는 한산도와 미륵산 정상에도 다녀왔다.

충무교 교각에는 전혁림의 통영항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짙은 코발트블루톤의 그림은 판데목 빠른 물살과 잘 어울린다고 느껴졌다. 동양 최초로 건설된 해저터널이 충무교 바다 밑에 있었다. 이 지역은 좁고 얕은 바다였었다. 임진왜란 때 패해 도주하던 일본 수군이 해로가 있는 줄 알고 왔다가 배가 나갈 수 없게 되자 얕은 바다를 파서 도망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수도 없이 죽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여기서 유래하여 '판 곳'이란 의미의 '판데목' 지명이 생겼고, 일제 강점기 때 그 위를 밟고 지나지 못하도록 다리를 없애고 운하를 팠다는 속설이 있었다.

경상국립대학교 통영캠퍼스를 지나 얕은 고개를 넘자 하얀 부표가 줄지어 둥둥 떠있는 바다가 나타났다. 바다의 목장인 굴 양식장이었다. 굴 주산지 통영의 모습이 비로소 눈앞에 펼쳐졌다. 거친 바다의 이미지는 전혀 느낄 수 없었고, 아늑하고 평온한 느낌을 주었다. 호수처럼 잔잔하고 청정한 지역인 통영은 굴 양식지로서 최적지라고 한다. 우리나라 굴 생산량의 70% 이상이 이곳 통영을 중심으로 고성, 거제지역에서 나온다고 한다.

목가적 느낌마저 주는 바다 양식장과는 달리 어촌 마을은 황폐한 느낌이 들었다. 곳곳에 굴 껍데기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시꺼멓게 곰팡이 끼고 죽은 해초류가 볼썽사납게 덕지덕지 붙은 굴 양식용 부표가 방치되어 있었다. 굴 수확 후 버려진 굴껍데기 그리고 수명을 다한 부표 처리가 골칫거리였다. 굴껍데기를 이용해 화력발전소에서 공해물질을 줄이는 역할을 하는 석회석을 생산하는 연구가 상당히 진척되고 있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싶었다.

길옆으로 새빨간 주황색 플라스틱통이 쌓여 있었다. 작업하는 사람에게 이게 뭐냐고 물었더니, 친환경 굴 양식용 부표라고 했다. 반영구적이라고도 했다. 그러면서 환경오염원이었던 스티로폼 부표는 수거해 재활용하고 있다고 했다. 스티로폼 굴 양식장 부표를 플라스틱 부표로 점차적으로 교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굴 양식장에는 흰 스티로폼 부표 사이로 교체된 주황색 부표가 선명했다.

교체된 후 굴 양식장의 모습은 어떨까. 넓고 푸른 바다 위에 펼쳐지는 주황의 카드섹션이 연상되었다. 방치된 굴껍데기가 수거되어 깨끗해진 어촌 마을, 그리고 주황으로 수를 놓은 듯한 아름다운 굴 양식장. 어촌과 바다 풍경이 내 상상 이상으로 깨끗해지고 아름다워졌으면 좋겠다.

통영의 서쪽 해안은 의외로 한적했다. 바닷가라면 흔히 보이는 횟집도 눈에 띄지 않았고, 음식점도 보이지 않았다. 도로에는 다니는 차량도 드물었고, 인적도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통영 시내와 그리 멀지 않은 곳인데, 이상하리 만큼 한적했다. 전망 좋은 곳에 자리 잡은 카페에 들러 설빙수에 냉커피를 시켜 마시면서 잠시 쉬었다.

한적한 농어촌 휴양마을인 대평마을에서 통영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투숙객은 우리 둘 뿐이었다. 휴일에는 가족단위로 찾는 사람이 제법 된다고 했다. 하지만 문을 연 식당이 한 곳도 없어 펜션 주인 차를 타고 통영시내로 나가 저녁 식사를 하고 돌아왔다. 다음날 아침 일찍 바다 냄새 진한 공기를 맡으며 길을 나섰다. 아직 문을 열기 전인 북신만 바다 카페를 지나고 원문고개를 너머 죽림 신시가지로 갔다. 아파트 단지 편의점에서 간단하게 빵과 요구르트로 아침 요기를 하고 친구와 헤어졌다. 친구는 볼 일이 있어 먼저 집으로 가고 나는 계속해서 걸었다.

남파랑길은 산길로 이어졌다. 지도 앱을 보니 봉우리를 2개나 넘어야 하는 꽤 먼 거리였다. 인적 없는 호젓한 산길을 수행하듯 걸었다. 언뜻언뜻 나무 숲 사이로 보이는 바다를 보면서, 시원한 바람에 원기를 보충받으며 걸었다. 산길 옆으로는 풀꽃들이 경쟁하듯 피어나고 있었다. 산벚꽃도 졌고 진달래도 졌지만 4월의 숲은 상쾌하고 향기로웠다.

어느 순간 묘한 향기가 코로 스며들었다. 처음 맡아보는 향기였다. 두리번거리고, 풀꽃 냄새를 맡아봐도 그 정체를 알 수 없었다. 뭘까? 궁금증을 안고 걷는데 또 그 냄새가 후각을 은근히 자극했다. 가장 원초적인 감각이라는 후각은 즉각적으로 반응했고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 정체는 덩굴나무 숲 사이에 앙증맞게 달려 있는 꽃이었다. 처음 보는 꽃이었다. 그런데 잎을 보니 으름덩굴이었다. 으름 열매는 토종 바나나로 불리기도 하는데, 꽃이 이렇게 청초하고 향기마저 사랑스럽다니. 놀랍고 반가웠다. 도대체 으름덩굴이 기다리는 낭군은 누구이기에 이렇게 상큼한 향기를 뿜고 있는 것일까. 벌일까? 나비일까? 한참을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았다. 단언컨대 으름덩굴 꽃 향기는 내가 맡은 꽃 향기 중에 으뜸이었다. 찔레꽃, 인동덩굴꽃, 박주가리꽃, 칡꽃, 쥐똥나무꽃도 향기롭고 매력적이지만, 으름덩굴 꽃 향기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해발 279.1m. 제석봉은 남파랑길에서 50m쯤 옆으로 비켜 있었다. 정상에 서니 통영의 또 다른 모습이 좌우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통영만을 바라보고 형성된 통영의 구시가지가 아니라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온 죽림만과 북신만을 따라 형성된 통영의 신시가지였다. 변화하는 통영의 새로운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조용한 숲길에는 등산객이 쉬어 갈 수 있도록 나무 평상이 놓여 있었고, 성이라고 부르기에는 규모가 작은 돌담도 보였다. 불현듯 지금 걷는 길은 어쩌면 먼 옛날 사람들이 걸었던 옛 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산길을 통해 통영 사람들이 해산물을 이고 지고 고성으로 넘어가 쌀과 보리로 바꿔 다시 되돌아왔을 것이다. 그 옛날 해안가는 갈대가 무성한 황무지여서 사람들이 다니기에는 불편했고, 사람들이 주로 다니는 길은 오히려 산길이었을 것이다. 지금과 달리 산길이 사람 왕래가 잦은 간선도로 역할을 하였을지도 모르겠다.

드디어 산길을 벗어나 한퇴마을로 내려왔다. 약 3시간 정도 산길을 걸었다. 봄날이라지만 더위가 느껴졌다. 자주자주 갈증도 느껴졌다. 그런데 식수도 거의 동났고, 식당을 만날 가망은 없어 보였다. 게다가 햇볕을 피할 길 없는 방천길을 따라 계속 걸어야 했다. 겨우 들판을 벗어나 골짜기 저수지를 만났고, 갈증으로 지쳐갈 무렵 반갑게도 절을 만나 시원하게 갈증을 해소했다.

'통제사의 길'
뜻밖의 안내판을 만났다. 통영을 거의 벗어나는 곳에서 또다시 통영을 떠올리는 길과 마주치게 된 셈이었다. 안내문을 보니 조선 후기 한양을 중심으로 조선 팔도 각 변방을 잇는 10대로가 있었고, 특히 통영과 고성을 잇는 길을 '통제사의 길'이라 불렀다고 했다. 완만한 오르막, 통제사의 길을 따라 한티재에 올랐다. 이제는 고성으로 내려가는 길만 남았다.

느긋한 마음으로 나무 그늘 아래 휴식을 취하는데, 여기저기 잘 자란 쑥이 보였다. 맥가이버칼을 꺼내 쑥을 뜯기 시작했다. 몇 년 전부터 봄이면 아내와 함께 쑥을 뜯어 놨다가 추석 때 송편을 만들어 먹어왔다. 올 추석 때는 손녀들과 함께 지금 뜯은 쑥으로 송편을 만들어 먹어야겠다.

남파랑길29코스(13.6km) 남파랑길30코스(16.3km) (총 29.9km)
<해저터널 - 쉘브르 카페 - 대평마을 - (승용차) - 통영동호(석식) - (택시) - 대평마을(박) - 원문고개 - 죽림신시가 (간편조식) - 발암산정상 - 한퇴마을 - 통제사의 길 - 바다휴게소 - (택시) - 고성버스터미널(중식)
4.18일 12시 - 16시 30분, 4.19일 6시 30분 - 13시(총 11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