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4시가 지나 진동 광암항에 도착했다. 작은 모래밭 해수욕장이 있었고, 몇 척 어선이 떠있는 항구는 한가로웠다. 오랜만에 바다를 본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진해에서 창원을 거쳐 마산을 지나는 동안, 포장도로나 산길을 주로 걸었지 바다다운 바닷길은 거의 걷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해이어보는 우리나라 최초의 어보다...
방어·꽁치 등 어류 53종과 갑각류 8종, 패류 10여 종이 소개되어 있고...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 안내판이 보였다. 조선 순조 때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이곳으로 귀양 온 김려가 지은 책으로 정약전의 자산어보보다 이른 우리나라 최초의 어보라고 했다. 이상하고 기괴하며 놀랄 만한 물고기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을 보고 채록하였다고도 했다. 진동 바다는 물고기가 살기 좋은 풍성한 바다인 것 같았다. 넓게 자갈뻘밭이 전개되어 있었고, 올망졸망 섬들이 앞바다를 가로막고 있었다. 길가에는 탁송을 기다리는 피조개며 담치 자루가 쌓여 있었다.
진동 중심지 사거리로 갔다. 먼저 식당을 찾아 저녁식사를 하고 숙소를 찾아갈 참이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치킨 집등 배달 음식점만 눈에 띌 뿐 마땅한 식당은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어 좀 외각에 있는 호텔에 방을 정하고 카운터에 밥 먹을 식당 좀 소개해 달라고 했더니, 인근에는 마땅한 식당이 없고 차를 타고 나가야 한다고 했다. 해산물이 풍부한 진동에서 멋진 저녁 식사를 기대했었는데, 아쉽게 됐다. 그나마 다행으로 숙소 가까이 있는 허름한 밥집에서 저녁과 다음날 아침 식사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 식당은 인부들이 찾는 일종의 함바집이었다.
아침 일찍 고현 바닷가에 도착했다. 비릿하고 짠내가 코를 자극했다. 곳곳에 쌓여 있는 바다에서 건져 올린 그물에서 나는 특유의 바닷냄새였다. 고현 어촌계 미더덕 판매장이 있었고, 미더덕 회와 미더덕 덮밥 식당 간판도 눈에 띄었다. 고현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진동 미더덕 주 생산지였다. 미더덕은 물에서 나는 더덕이라고 해서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마침 양지바른 곳에 할머니들이 소일을 하고 있어, '올해 미더덕이 많이 잡히는가 봐요' 했더니 바닷물 온도가 높아 다른 해보다 일찍 수확이 끝났다고 했다. 미더덕은 종패를 뿌리지 않고 그물만 내리면 떠다니던 새끼 미더덕이 그물에 달라붙으며, 오만군데 다 붙는 오만둥이는 미더덕에 비하면 택도 안된다고도 했다.
남파랑길12코스는 삼진의거대로 임아교차로에서 좌회전하여 1002번 지방도로로 이어졌다. 그리고 '한국의 아름다운 길'이라는 입간판도 만났다. 무언가 특별한 아름다움이 있겠지 기대하고 걸었는데 그저 밋밋한 보통의 길이었다. 오히려 이름을 붙인 이유가 궁금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남파랑길은 찻길로 계속 이어졌다. 어제도 걷기에 불편한 구간이 많았었는데, 오늘도 어제와 별반 다르지 않을 거 같았다. 이렇게 찻길을 계속 걸어야 하나, 불편한 마음으로 걷고 있는데 지나던 차가 내 옆에 서더니 '힘내세요' 하며 캔 커피를 건네주었다. 얼떨결에 받았다. 캔 커피는 갓 샀는지 따뜻했다. 아침 일찍부터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에게서 위로의 말을 받아도 되는 건지, 오히려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마침 비어있는 산불 감시초소가 나타나 문을 열고 들어가 호젓하게 나만의 모닝커피를 즐겼다.
고성 동해면으로 넘어가는 동진대교 삼거리를 지나자 바다폭이 좁아졌다. 건너편 마을이 손에 잡힐 듯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당항만으로 들어가는 좁은 바다였다. 바다가 아니라 강하구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호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런 지형을 해협이라 불러야 하나, 바다목이라 불려야 하나. 이곳의 지형이 닭의 목처럼 생겼다고 하여 '닭목' '당목'으로 부르게 되었다는데, 지형을 보니 수긍이 갔다. 하지만 물살은 빠르지 않고 파도도 거의 없었다. 물살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잔잔하고 고요했다.
이곳 주민인 듯한 두 사람이 낚싯대를 던져놓고 환담을 나누고 있었다. 뭐 잡히는 게 있냐고 물었더니 겸연쩍게 웃으면서 노래미 두 마리 낚았다고 했다. 아직 이른 봄, 농어촌이 바빠지기 전 소일거리로 나온 것 같았다.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것은 산호색 돔 지붕으로 예쁘게 단장을 한 해양펜션이었다. 바다 위의 펜션이라니 신기했고, 가족들이나 친구들끼리 한 번 와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포장도로를 따라 시락마을을 지나고 정곡마을을 지나 어선삼거리에서 드디어 마산지역에서 고성지역으로 넘어갔다. 그간 찻길을 따라 계속 걸었고, 길은 도보 여행자에게 친화적이지 않았다. 행정구역이 바뀐 탓인지 기분도 전환되고 몸도 마음도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 도시 풍경을 주로 봐 왔는데, 앞으로는 농촌과 어촌 풍경을 많이 보게 되리라, 기대됐다. 여전히 차도 위를 걸었지만 기분 탓인지 걷기에도 편해졌다.
요트계류장을 지나자 공룡엑스포공원이 나타났다. 평일임에도 주차장에는 승용차가 제법 주차돼 있었다. 그리고 곧이어 당항만 둘레길을 만났다. 검은 돌비석에는 임진왜란 당시 왜선 57척을 격파하고 승전고를 올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해전지인 당항포에 멸사봉공정신을 기리고자 조성하였다고 쓰여 있었다. 입구만 있고 출구가 없이 내륙 깊숙하게 들어온 닭목 같은 당항만의 지형을 잘 이용한 이순신 장군의 뛰어난 전략이 빛을 발한 결과였을 것이다.
당항만 둘레길은 해안을 따라 데크길로 조성되어 있었다. 전망 좋은 중간 쉼터에서 잠시 쉬었다. 발아래로는 맑고 푸른 바닷물이 잔잔한 호수처럼 일렁댔고, 신선한 바닷바람에는 3월 이른 봄기운이 전해져 왔다.
멀리 배둔 마을이 겹겹이 쌓인 산그리메 아래 보였다. 멀고 흐린 날씨 탓에 다소 흐리게 보였지만, 오히려 한 폭의 아름다운 진경산수화를 보는 듯했다. 물결치듯 겹겹이 쌓인 산군들은 화목하게 모여 있는 대가족 같기도 했고, 농꾼들이 흥에 겨워 덩실덩실 농무農舞를 추는 듯도 했다. 마을 앞에 넓게 펼쳐진 바다에서는 넉넉함이, 부드러운 능선의 산군들이 감싸고 있는 마을에서는 아늑함이 느껴졌다. 하룻밤을 지내야 하는 배둔 마을이 고향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남파랑길11코스 일부 8km, 남파랑길12코스 18.2km (총 26.2km)
<광암항 - 진동(석식, 박, 조식) - 고현항 - 임아교차로 - 시락마을(중식) - 당항포 - 배둔(석식, 박) >
3.22일 16시30분 - 17시30분, 3.23일 7시 - 16시 (총 10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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