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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파랑길

남파랑길8. 봄이 오는 고성의 산야

새벽 고성시장은 너무 이른 탓인지 썰렁했다. 청소차 소리만 요란할 뿐 문을 연 가게는 거의 없었다. 혹시 아침 식사를 할 수 있는 식당이 있을까 두리번거리다 불이 켜진 떡집 두 곳을 발견했다. 콩고물 찰떡과 팥고물 찰떡 한 팩씩 샀다. 고성시장을 빠져나오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방앗간도 보였다. 고성 사람들은 유달리 떡을 좋아하나?

마침 쉼터가 있는 교회가 있어 들어갔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유서 깊은 고성교회였다. 마당에는 100주년 기념석이 세워져 있었고, 쉼터는 깨끗했다. 교회 뜰에 들어오니 마음도 느긋해지고 편안해지는 듯했다. 나무의자에 앉아 콩고물 찰떡을 천천히 음미하며 오늘 걸을 길을 그려보았다.

수남회전교차로에서 남파랑길 리본을 만났고, 곧이어 대독누리길로 들어섰다. 대독누리길은 대독천 둑길을 따라 조성된 친환경 생태체험 공간이었다. 거리는 왕복 12km에 달했고, 주변은 대부분 논밭이었다. 가로수 가지는 벌써 봄기운을 받아 붉은빛이 감돌았고, 누렇게 빛바랜 마른풀사이로 군데군데 봄 풀이 새파란 새 잎을 내밀고 있었다. 마르고 키 큰 물억새가 천川 바닥을 뒤덮고 있었다. 보통 물 흐름을 좋게 하려고 바닥 풀을 제거하고 정비하는데, 여기는 친환경 생태공간을 조성하기 위해서인지 자연상태 그대로 억새숲이 강바닥을 덮고 있었다.

누리길 가로수는 나무의 모양이나 껍질의 형태로 봐서 이팝나무였다. 걷다 보면 숱하게, 식상할 정도로 자주 만나는 가로수가 왕벚나무인데... 대독누리길은 5월 봄이면 하얀 이팝나무 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10월 가을이면 물억새가 하얗게 물결치는 아름다운 풍경이 그려졌다.

주변의 논밭은 빈 들이었고 어쩌다 보리밭을 볼 수 있었다. 이번 트레킹에서 봄보리가 파릇하게 자란 청보리 들판을 보리라 상상했었는데, 보리밭은 찾기가 힘들 정도였다. 남부지방에는 1년 중 벼와 보리를 번갈아 키우는 2 모작을 한다는 말은 옛 말이 된 듯했다. 보리농사는 일손에 비해 경제성이 없어 점차 사라진 것일까.

길가 과수원에서 일하는 농부를 만났다. '수고하십니다. 무슨 나무예요.' 하고 물었더니, 무화과나무라고 했다. 무화과나무 과수원은 처음 봤기에 눈에 설었다. 은퇴 후 체리농장을 하고 있는 직장 후배가 언뜻 생각나서 귀농해 체리농사를 많이 하는 거 같은데 어떻게 무화과를 선택했냐고 물었더니, 체리는 열과裂果가 많이 생겨 상품화율이 떨어져 무화과를 선택했다고 했다. 35년 다니던 직장에서 은퇴하고 4년 전에 고향으로 귀농했고, 작년에는 300만 원 소득이 있었고, 앞으로 연간 2,500만 원정도 수익을 예상한다고 했다. 은퇴 후 고향을 지키고 어느 정도 수익도 거둘 수 있다니 부러운 생각도 들었다. 

대독누리길이 끝나고 남파랑길은 또다시 차로로 연결되었다. 쌩쌩 자동차 소음을 들으며 걷다 보니 휴게소가 나타났고, 문을 연 중국집이 보였다. 시간은 11시, 점심을 먹기엔 이른 시간이라 어쩌지 생각하다가 출발할 때 예정했던 식당에 전화를 걸었더니 식당 주인이 허리가 아파 영업을 안 한다고 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해물짬뽕에 고량주 작은 병 하나를 시켰다. 너른 들이 있고 풍요로운 바다가 있는 고장답게 해물짬뽕은 해산물과 농산물로 푸짐했다.

'문수암 입구까지 구간은 위험하니 차량을 이용하기 바랍니다'라는 안내판이 나타났다. 홀로 걷는 나에겐 달리 방법이 없었기에 터벅터벅 걸었다. 그런데 아스팔트 포장도로는 계속 오르막이었고, 너무 지루하고 힘들었다. 그나마 날이 덥지 않은 때라 다행이었지만 여름에는 정말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수암 입구에 도착해서 지도를 살펴보니 차라리  포장도로로 걷는 것보다 무선저수지 부근에서 등산로를 따라 문수암을 지나 올라오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파랑길은 또다시 임도를 따라가도록 안내하고 있었지만 수태산 정상으로 가는 등산로를 택했다. 거리도 단축할뿐더러 오늘 목적지 학동마을과 남해바다를 보면서 걷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등산로는 사람 다닌 흔적이 많고 또렷했다. 수태산 정상은 575m, 문수암 입구에서 넉넉잡고 20분이면 올라갈 수 있었다. 흐린 날씨라 전망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하지만 새침 도도하게 꽃이 핀 얼레지 군락지를 만났고, 아직 아침저녁으로 쌀쌀한데도 먼저 핀 남산제비꽃과 진달래꽃도 반가웠다.

수태재를 지나 학동 돌담길 마을에 오후 3시쯤 도착했다.

남파랑길31코스(16.6km) 남파랑길32코스 일부(12.2km) (총 28.8km)
<고성 시장(간편조식) - 고성교회 - 수하회전교차로 - 대독누리길 - 짜장박사(중식) - 부포사거리 - 무선저수지 - 수태산 - 수태재 - 학동마을>
3.25일 6시 30분 -16시 30분(총 10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