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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파랑길

남파랑길9. 학동 돌담마을과 상족암 공룡 발자국

오후 3시쯤 학동마을에 도착했다. 운치 있는 돌담 너머 소담스럽게 핀 백목련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깨끗하고 조용한 돌담길을 지나 오늘 하룻밤을 묵기로 한 최영덕 씨 고가으로 갔다. 대문이 잠겨 있어 핸드폰으로 전화를 했더니 안주인이 골목 저쪽에서 바쁜 걸음으로 다가와 인사를 했다. 숙박 손님이 나 혼자뿐이라 좋은 방으로 업그레이드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천천히 집 구경도 하라고 했다. 내가 잘 방은 사랑채에서 가장 좋은 방, 사랑방이었다. 방은 넓지는 않았지만 널찍한 대청마루가 있고 샛문을 열면 동상東床이 있는 전형적인 지체 높은 옛 선비의 생활공간이었다.

넓적 돌에 황토를 발라 쌓은 정원 담장은 운치가 있었다. 고즈넉한 운치에 절묘하게 어울리는 오래된 동백나무에서 이 집의 역사와 품격이 전해져 왔다. 선홍빛 붉게 피다가 뚝뚝 송이채로 떨어진 동백꽃, 지조와 비장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사랑채에서 여성들의 공간인 안채로 들어가려면 내외벽을 지나야 했고, 뒤뜰 우물의 덮개도 두꺼운 화강암으로 정성 들여 만들어져 있었다. 전형적인 반가班家의 기품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마을 돌담길에서 만난 동네 사람이 반갑게 인사를 하며 마을회관으로 나를 안내했다. 마을 이장님이셨다. 풍채가 좋으신 이장님께서는 손수 정리한 자료를 보여 주면서 찬찬히 학동마을의 내력과 명성을 얘기해 주었다.

지금으로부터 350여 년 전, 입향조入鄕祖께서 하늘에서 학이 내려와 알을 품는 기이한 꿈을 꾸고 황무지였던 이곳을 찾아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했다. 조선시대 처가입향妻家入鄕이 아닌 개척입향開拓入鄕의 전형적인 사례 같았다. 그 후 많은 인물이 나고 부를 축적하여 서부경남의 대표적인 반촌班村이 되었다고 했다. 이 마을에는 근현대에도 자랑할 만한 인물들이 많았다. 일제에 의한 한일병합이 강행된 후 의분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은 분이 계셨으며, 여성교육에 헌신하신 분도 계셨고, 부자가 국회의원을 지낸 가문도 있었다. 한 때 100 가구가 넘었었는데, 지금은 40여 가구가 마을을 지키고 있다고 했다.

새벽, 빗소리에 눈이 떠졌다. 주룩주룩, 뚜둑뚜둑... 제법 요란스럽게 들려왔다. 기와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 마당에 떨어지는 빗소리, 나뭇잎에 떨어지는 빗소리, 낙숫물 소리... 다양한 빗소리는 마치 비의 합주처럼 들렸다. 샛문을 열고 동상에 나가 앉았다. 비에 젖은 새벽 정원에는 어스름 어둠이 남아있었고 새빨간 동백꽃은 더욱 고혹적이었다.

고택의 안주인으로부터 아침식사가 준비됐다고 연락이 왔다. 안채 마루에는 정갈하게 아침상이 차려져 있었다. 살찐 도다리에 봄 햇쑥으로 끓인 도다리 쑥국, 이곳 마을에서 재배했다는 취나물과 시금치나물, 노릇노릇 구운 부추전 등등. 뜨내기 여행객에는 과분한 최고의 아침 밥상이었다.


얕은 바다에 굴 양식장이 보였다. 깊은 물에서 키우는 수하식 양식이 아니라 썰물 때는 물이 빠져 햇볕을 쬘 수 있는 고착식 양식장이었다. 홍가리비와 개체굴을 직접 생산해서 판다는 플래카드도 눈에 띄었다. 개체굴이 뭔가 궁금해서 인터넷을 찾아보니 생식기능이 제거된 굴이었다. 마치 씨 없는 수박과 같은 육종굴이었다. 생육이 빨라 일반굴보다 3배나 크고 독성이 없다고 한다. 특히 이곳에 생산된 개체굴은 햇볕을 받고 자라 맛이 뛰어나다고 소문이 나 있었다.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가리비 더미와 부표 더미가 눈길을 끌었다. 바닷가에 어지럽게 방치되어 있는 볼썽사나운 풍경을 많이 봤었는데, 사진을 찍어 보니 예쁜 작품 같았다.

솔섬을 돌아 나오니 아름다운 고성의 해안과 바다가 펼쳐졌다. 시루떡처럼 층층 쌓여있는 해안 절벽 그리고 넓게 펼쳐져 있는 반석 해변. 수천만 년 동안 층층이 쌓이고 쌓인 퇴적층이 뜨거운 열과 강한 압력을 받아 만들어진 퇴적변성암 지대였다. 학동마을의 예쁜 돌담도 이런 얇고 반반한 퇴적변성암을 캐서 쌓은 것이었다.

해안가 암석 반석 위에 공룡발자국이 있었다. 거대 초식공룡의 발자국, 두 발로 걷는 육식 공룡의 발자국, 하늘을 나는 익룡의 발자국... 2,000여 군데에 걸쳐 발견되고 있는데, 미국의 콜로라도, 아르헨티나의 파타고니아와 함께 세계 3대 공룡발자국 화석이라고 한다. 또한 공룡이 진흙을 밟고 놀았던 흔적이 고스란히 화석으로 남아 있는 곳도 있었다. 그 옛날 고성은 공룡의 놀이터였으며 지상 낙원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았다.

뭐니 뭐니 해도 이곳 해안의 백미는 상족암床足岩이었다. 상의 다리같이 생겼다고 붙여진 이름이었다. 마치 고서점의 책더미처럼 보이기도 했다. 파도에 깎인 해식 동굴 속으로 사람이 들어갈 수도 있었다.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퇴적암 바위 덩어리가 오랜 세월 파도에 깎이고 깎여 만들어진 자연의 걸작품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상족암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해변길을 따라 공룡 발자국과 해안 바위 절경을 구경할 수 있도록 해안누리길이 놓여 있었다. 맥전포항에서 덕명항까지 3.5km, 평탄한 길이라서 힘들이지 않고 걸을 수 있었다. 바로 인근에는 공룡박물관도 있었다. 가족과 함께 편안하게 멋진 풍광을 즐기면서 공룡도 배울 수 있는, 뛰어난 명승지이자 손색없는 체험 학습장이었다.

남파랑길 33코스는 하이면사무소 앞 신덕사거리에서 끝났다.
고맙게도 직장 후배가, 하루 전에 올린 내 SNS 계정을 통해 고성지역을 여행한다는 사실을 안 사람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찾아왔다. 만난 적도 없는 후배인데, 고맙고 좋았다. 오랜만에 직장 후배와 함께 싱싱한 회에 소주까지 얼떨떨 기분좋게 마셨다.


남파랑길32코스일부(2.0km), 남파랑길33코스(18.0km) (총 20.0km)
<학동마을 - 임포항(석식) - 학동마을(박, 조식) - 하일면사무소 - 솔섬 - 동화어촌체험마을 - 맥전포항 - 공룡화석 - 상족암 - 덕명항(중식) - 하이면사무소>
3.26일 08시 - 15시 (총 7시간)
* 3.25일 오후 3시에 학동마을에 도착, 숙소를 정한 후 임포항까지 가서 저녁 식사를 하고 학동마을로 돌아옴
* 3.26일 하이면에서 삼천포로 이동 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