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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파랑길

남파랑길13. 아름다운 낙조, 삼천포 실안 바다

12시에 삼천포터미널에 도착했다.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아침 8시 첫차를 탔음에도 반나절이 지난 시간이었다. 택시를 타고 다시 고성 하이면사무소 앞 사거리, 남파랑길34코스 시작점으로 갔다.  마침 문을 연 식당이 있어 들어갔다. 식당에는 제법 손님들이 많았고, 나는 구석 자리에 앉아 백반으로 배를 든든하게 채웠다.

 

3월에 남파랑길 고성구간을 걷고 4월에 통영구간 남파랑길을 돈 후, 다시 고성에서 삼천포로 이어지는 남파랑길 순로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출발점에서 500m쯤 걸어 다리 하나를 건너니 바로 삼천포였다. 타고 온 택시기사에게 들으니 삼천포 인구는 4만 명이 안된다고 했다. 한 때 삼천포는 한려수도의 중심 기항지였으며, 서부경남의 관문 항구로서 교통의 요지였다.

 

많은 지방 소도시가 그렇듯 삼천포는 인구가 점차 감소하였고, 사천으로 흡수 통합된 후 행정주소명에서 사라진 도시가 되어버렸다. 그래도 곳곳에는 삼천포라는 이름이 남아 있었고, 나에게는 옛 친구처럼 낯설지 않은 이름이었다.  

 

차량통행이 잦은 77번 국도를 따라 걷다가 남일대 해수욕장으로 꺾어 들었다.  해수욕장은 아담했고, 조용했다. 젊은 부부와 천진난만하게 노는 어린아이 모습에서 평화로움이 느껴졌다. 남일대라는 지명은 신라시대 최치원 선생이 이곳의 맑고 푸른 바다와 하얀 모래사장 그리고 주변의 절경을 보고 '남녘에서 가장 빼어난 경관'이라고 감탄하며 불렸다고 한다.

 

남일대해수욕장에서 해안가를 따라 진널해안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었다.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 쉼터 벤치가 놓여있었고, 그곳에서 보는 바다 풍경은 아름다웠다. 조용하고 아담한 남일대해수욕장, 억겁의 세월 동안 파도에 깎이고 다듬어진 코끼리 바위 그리고 잔잔한 한려수도를 오가는 작은 배들.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5월은 햇살은 뜨거웠지만, 바닷바람은 시원했다. 가끔 바람을 타고 은은하게 풍겨오는 아카시 향기는 여행객에게 주는 5월의 선물이었다. 조금 발걸음을 늦춰 풍경을 느끼며 걷는 중, 귀에 익은 노래가 들려왔다. 그리고 바닷가 바위 위에 구릿빛 소녀상이 눈에 들어왔다. 

 

'삼천포 아가씨'

1960년대 부산, 마산, 충무, 여수를 오가던 연안여객선을 타고 떠난 연인을 그리워하는 노래로 은방울자매가 불려 빅히트를 쳤고, 작은 항구도시를 삼천포를 전국에 알리게 된 노래였다고 했다. 그런데 노랫말은 너무 애절했다. 당시의 시대상황이 반영되었겠지만 기약 없이 바다를 바라보며 앉아있는 소녀의 모습에서는 애달픔이 느껴졌다.

 

오 아름다운 것에 끝내

노래한다는 이 망망함이여

 

아름다운 것을 보면 눈이 먼다고 했던가. 삼천포 앞바다의 아름다움을 차마 글로 표현할 수 없었던 시인의 망망한 마음이 전해져 왔다. 삼천포 출신 시인 박재삼의 시비와 문학관도 노산 공원에서 만날 수 있었다.

 

 

 

 

 

삼천포 신항만 앞길은 나무 한 그루 없는 아스팔트 길이라 5월 뙤약볕을 피할 수 없었다. 이팝나무 가로수는 누렇게 퇴색한 꽃을 머리에 이고 있었고, 길가에는 떨어져 빛바랜 꽃잎들이 군데군데 뭉쳐 있었다. 시원한 느티나무 그늘 아래 모여 얘기꽃을 피우는 노인들의 모습도 보였다. 벌써 봄이 가고 여름이  온 느낌이 들었다.

 

삼천포천을 건너자 팔포음식특화거리가 나타났고, 곧이어 삼천포 수산시장이 나타났다. 현대식 건물로 지어진 수산시장에는 많은 점포가 들어서 있었고, 중앙 통로에는 흥정하는 사람들도 제법 눈에 띄었다. 그리고 주변에는 많은 횟집들이 영업을 하고 있었다. 

 

어시장 골목을 빠져나오자 삼천포대교가 눈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아름다운 바닷가 숲에 눈길과 발길이 끌렸다. 가까이 가서 보니 돌로 둑을 쌓아 항아리처럼 만든 작은 바닷가 성, 대방진 굴항이었다. 왜구의 노략질을 막으려고 조선 후기에 만들었다고 했다. 그런데 규모가 너무 작았다. 군선 한두 척만 들어서도 꽉 찰 것 같았다. 하지만 오래된 느티나무와 팽나무 멋진 숲 그리고 항구 안에 정박해 있는 소형 배들은 너무나 평화롭게 느껴졌다.   

 

삼천포대교 사거리에서 남파랑길 34코스는 끝나고, 35코스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평탄한 해안길은 끝나고 가파른 산길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은은하게 풍겨오는 봄 꽃 향기를 맡으며 울창한 숲길을 걷다 보니 기분도 상쾌해졌다.  산사를 지나고 전망 좋은 곳에서 쉬면서 땀을 식히고 목을 축인 후, 호젓한 산길을 올랐다. 나 홀로 걷는 산길, 숨은 가파지고 힘은 들었지만 기분은 좋았다. 트레킹의 즐거움은 이런 것이리라. 이 즐거움, 걷는 자만이 느낄 수 있는 특권이 아닌가 싶었다. 

 

산 중턱에 돌담이 나타났고, 그 위쪽에 누각도 보였다.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고려 시대에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각산산성이었다. 드디어 해발 408m, 각산 정상에 올랐다. 바닷가에 위치한 산치고는 꽤 높은 편이었다. 산행 시간은 1시간 남짓 걸렸다. 정상에서는 아름다운 삼천포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삼천포와 남해를 잇는 4개의 다리가 세 개의 작은 섬을 중간 기점으로 놓여 있었고, 삼천포대교와 나란히 초양도에서 바다를 가로질러 각산 정상까지 케이블카도 오가고 있었다.

 

등산로에서는 사람을 만날 수 없었는데, 정상에는 평일임에도 멋진 풍경을 배경 삼아 사진을 찍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처럼 걸어 올라오지 않고, 케이블카를 타고 오거나 산 중턱에 있는 휴양림 임도로 차를 타고 온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멋있는 전망대가 도심에서 멀지 않고 쉽게 접근할 수 있다니, 부럽기도 했다. 휴양림 산책로를 통해 하산했다. 쭉쭉 자란 편백나무 숲 속에 오솔길, 야영데크, 숙박동, 어린이 물놀이장 등이 잘 갖춰져 있었다. 휴양림의 이름이 '사천 케이블카 자연 휴양림'인 걸 보니 케이블카 운행과 함께 문을 연 것으로 보였다. 

 

산아래 골짜기로 내려오자 논밭이 나타났고, 모내기 준비를 하는 농부의 모습도 보였다. 물이 채워진 다랑논은 아름다웠고, 다랑논에 비친 하늘과 5월의 녹색숲은 그림 같았다. 

 

실안 마을회관을 지나 실안 바다에 도착했다. 시간은 오후 6시쯤이었다. 때마침 실안 앞바다는 서쪽으로 넘어가는 태양빛을 받아 주홍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서쪽 하늘에는 약간 구름이 끼어 있었는데, 태양이 구름 속에 숨었다 나타났다 할 때마다 바다의 색깔과 느낌이 달라졌다. 작은 섬 그리고 죽방렴은 독특한 풍경을 연출하기 위한 설치 예술품 같았다. 실안 바다 노을이 아름답다는 얘기는 진작 들었었는데, 실제 보니 정신이 아뜩할 정도였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그 아름다움이 슬프게도 느껴졌다. 실안 바다 노을에 취해 한 참을 서서 바라보았다. 편안함이 가득한 실안에서 아름다운 노을에 빠져 눈이 멀 뻔했다.

 

실안實安에서 실안失眼했다.

 

남파랑길34코스(10.2km), 남파랑길35코스(12.7km) (총 22.9km)

<하이면 면사무소(중식) - 남일대해수욕장 - 노산공원 - 삼천포수산시장 - 대방진굴항 - 각산산성 - 각산정상 - 사천케이블카자연휴양림 - 실안마을회관 - 실안바다 - 삼천포항(석식,박)>

5.17일 12시 - 6시 30분 (6시간 30분)

* 각산 정상 하산길에서 길을 잘못 들어 약 2km 단축길로 내려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