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스름 어둠이 내려앉은 저녁 무렵 하동 노량에 도착했다. 비가 줄기차게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쓰고 숙소를 찾았지만 눈에 잘 띄지 않았다. 분명 지도앱에서 본 위치 같은데, 비 오고 어둠 내린 탓인지 분간이 잘 되지 않았다. 바닷가 건물 3층에 여관 간판이 보여 전화를 했더니 받지 않았다. 빗줄기는 더욱 굳세 졌다. 이러다 숙소를 잡지 못하면 어쩌나, 마음도 초조해져 갔다.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다 불이 켜진 식당에 들어갔더니 그곳이 바로 여관을 같이 하고 있는 식당이었다.
6, 7월은 키르기스스탄 텐산 여행을 다녀오느라 건너뛰고 8월부터 다시 시작하는 남파랑길 트레킹, 그 첫 번째 코스가 하동구간이었다. 거리는 27.7km. 금남면 노량에서 시작해서 하동읍에서 끝난다. 하루를 꼬박 걸어야 하는 거리이기에 트레킹 전날 내려와 다음날 일찍 출발할 작정이었다.
다음날 아침 7시, 간밤에 거세게 내렸던 비는 다행히 잦아들었다. 아침 어촌마을은 어젯밤 비 때문인지 사람의 그림자도 뵈지 않았다. 수협의 공판장의 경매장도 텅 비어 있었다. 방파제에는 집게발이 유난히 큰 방게들이 내 발자국 소리에 놀라 재빠르게 도망치고 있었다. 하동 노량과 남해 노량 사이 좁은 해협에는 구름이 낮게 내려와 있었고, 그 구름 아래로 두 개의 현수교가 마치 쌍둥이처럼 걸쳐져 있었다. 비 온 다음날 아침, 선물 같은 풍경이었다.
촬촬촬 콸콸콸.
논도랑에 흐르는 맑은 물소리에 마음마저 청량해지는 듯했다. 농부들에게 가장 듣기 좋은 소리라고 했던가. 개울에도 제법 많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바랭이며 그렁이며 들길 가운데 억세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들풀도 간밤에 내린 비를 흠뻑 맞고 선명하게 초록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텃밭에는 고추가 선홍빛으로 익어갔고, 참깨는 벌써 누르스름하게 익은 열매를 달고 수확을 기다리고 있었고, 맑은 초록의 들깻잎은 친숙한 향기로 여행객을 환영했다. 여름의 뜨거운 햇살과 세찬 비를 맞고도 농작물은 키를 키우고 열매를 맺어 풍성한 결실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락은 주인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이 있지만 들논에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수리시설이 잘 돼 있고 벼농사가 대부분 기계화된 탓도 있겠지만, 백중절 전후 요즘 잠깐 동안이 여름 농한기인 탓도 있는 것 같았다. 눈에 띄는 것은 들 가운데 간간이 보이는 흰 두루미와 논가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논고동, 우렁이었다. 우렁이는 논에 자라는 잡초 제거용으로 뿌려 놓은 것 같았다. 우렁이 덕분인지 대부분 벼논바닥은 말끔했다.
들판은 마치 초록의 고요한 바다 같았다. 평화로움이 느껴졌다. 곱게 자란 벼가 바람이라도 불면 물결일 듯 춤을 췄다. 비 온 다음날 농촌 풍경은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했다. 마침 마을 정자가 있어 배낭을 내려놓고 휴식을 취했다. 정자는 깨끗했다. 넋 놓고 초록 들판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기분 좋은 엔도르핀이 온몸에 퍼지는 듯했다. 아침도 거른 터라 어제 저녁식사 때 먹다 남은 막걸리 반 병에 사과 1개로 요기를 달랬다.
마을길을 걷고, 들길을 걷고, 임도를 걷고, 제방길을 걸었다. 심한 오르내리막이 없는 비교적 평탄한 길이었다. 구름 낀 하늘에 간간이 내리는 비는 걷기에 오히려 좋았다. 그래도 시간이 지날수록 더워졌고 걸음도 무거워졌다. 점점 몸이 지쳐갈 무렵 섬진강이 눈앞에 펼쳐졌다.
섬진강은 언제 보아도 가슴이 뛴다. 섬진강은 어머니처럼 포근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하동이 내 고향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누구나 차를 타고 남해안고속도로를 빠져나와 하동포구터널을 지나면, 눈앞에 나타나는 섬진강과 하동의 모습을 보고 느끼게 되는 감정이 아닐까 싶었다.
섬진강은 강의 본래 모습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강이란 생각이 들었다. 개발의 흔적이 적고 비교적 생태환경이 잘 보전되어 있었다. 주변에 공장 굴뚝 하나 없고, 거대한 하구 땜도 없다. 강물은 호수처럼 잔잔했고, 갈대밭과 대나무 숲도 잘 보존되어 있었다.
섬진강 위쪽으로 보이는 산들은 아름답고 반가웠다. 낮은 산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그 뒤로 더 높은 산들이 겹겹이 둘려 싸고 있었고, 저 멀리 지리산이 너른 품으로 감싸고 있었다. 그 풍경은 종산宗山 지리산 아래 화목하게 모여사는 산들의 동족부락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문득꿈속에서 봤다는 몽유도원이 생각났고, 신선이 산다면 이런 곳이 아니겠는가 싶었다. 섬진강 하구 쪽에서 강변길을 따라 걷는 것은 처음이었다. 걸으면서 보고 느끼는 느낌은 차를 타고 가면서 느꼈던 느낌과는 차원이 또 달랐다.
12시쯤 신방 재첩마을에 도착했다. 재첩 전문 음식점 주차장에는 많은 승용차가 주차하고 있었다. 그중 한 집에 들어갔다. 식당에는 이미 많은 손님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출입문 가까운 자리를 잡고 재첩무침을 시켰다. 음식은 푸짐하게 나왔다. 재첩무침에 재첩국 그리고 대여섯 가지 반찬이 따라 나왔다. 오랜만에 먹어보는 재첩 요리 남김없이 다 먹었다.
트레킹하는 한 무리의 젊은이들을 만났다. 어디서 왔냐고 물었더니, 광주 시내 대학생들로 광복절을 맞아 국토사랑 도보여행을 한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이틀 전이 광복절이었다. 남파랑길 트레킹을 하면서 걷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던가. 기억도 가물한데, 젊은 사람들을 만나니 반갑기도 했고 기특했다. 사오십 명은 돼 보였다. 건장한 척후병처럼 맨 앞에 선 두 사람은 낫을 들고 있었다. 의아해서 물었더니, 길을 덮고 있는 풀과 나무를 제거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이들을 앞질러 얼마가지 못해 칡넝쿨이 덮고 있는 데크길을 만났다. 상당히 오랫동안 사람이 다니지 않은 듯 길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칡넝쿨에 맺힌 빗방울에 바짓가랑이를 흠뻑 적시며 그냥 밟고 통과했다. 대학생들은 사전 답사를 하고 낫을 든 선발자를 둔 듯했다.
지자체에서 관리를 하지 않은 것을 탓해야 할까, 걷는 사람이 없는 것을 아쉬워해야 할까. 도보여행을 하면서 아쉬웠던 것은 식당과 숙소와 제대로 된 길이었다. 여행자가 오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방문하는 여행자가 드문 것도 큰 숙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다운 하동 섬진강길에 더 많은 여행자가 방문하기를 기대한다.
섬진강변길인 재첩로를 따라 걷다가 아름다운 드라이브 길 국도 19번, 섬진강대로로 올라섰다. 신월교차로를 지나고 횡천교를 지나자 하동읍내 모습이 점점 또렷하게 다가왔다. 북쪽 뒤편으로 산이 감싸고 있고 서쪽 편으로 섬진강이 흐르고 남으로는 너른 들이 펼쳐져 있는 하동읍은 풍수를 잘 몰라도 사람 살기 좋은 길지吉地임이 느껴졌다.
강변 습지 데크길을 지나고 대나무 숲길을 지나 체육공원길로 접어들었다. 파크골프장에는 노부부로 보이는 남녀 두 쌍이 공을 치고 있었고, 산책로에도 제법 많은 사람들이 걷고 있었다.
오후 3시 넘어 하동 송림에 도착했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빽빽이 들어서 있는 소나무 숲으로 천연기념물로 보호받고 있었다. 조선 영조 21년(1745)에 당시 도호부사였던 전천상이 섬진강의 강바람과 모래바람의 피해를 막기 위해 소나무 숲을 조성하였다고 했다. 2년 전에 왔을 때는 보호를 위해 반만 개방했었는데, 숲 전체가 개방되어 있었다. 하동 송림은 언제 봐도 멋지다.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곡선미 그리고 갑옷을 입은 듯한 굳건함. 우리나라 소나무의 아름다움이 제대로 느껴졌다. 넓은 섬진강 모래밭과 잘 어우러진 하동 송림은 우리나라 최고의 소나무 숲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소설토지 읍내장터' 하동시장 옆에 숙소를 정했다. 그리고 만나고 싶었던 사람들을 만나 화개장터까지 가서 참게탕을 먹었다. 지난달 7월에 키르기스스탄 텐산산맥 트레킹을 함께 다녀온 여성 두 분 그리고 직장 후배인 농협하동군지 부장이었다. 두 여성은 내 생애 가장 힘들게 다녀온 여행의 동반자였기에 반가웠고, 후배는 오랜만에 보는 것이기에 반가웠다. 그리고 많은 얘기를 나눴다. 바쁜 중에도 마다하지 않고 시간을 내줘서 고마웠다.
다음날 아침도 먹기 전에 하동공원에 올랐다. 부지런한 하동 사람들이 아침 운동을 하고 있었다. 섬진강의 뷰 포인트는 하동공원이었다. 광양 백운산과 하동 형제봉 사이 S자 곡선을 그리며 느리게 흐르는 섬진강은 보고 또 봐도 아름다웠다. 바라보고 있노라니 마음마저 편안해졌다. 섬진강은 잘 보전된 생태하천임이 절로 느껴졌다.
남파랑길 47코스 (27.6km), 하동공원(2.0km) (총(29.6km)
<하동 노량(박, 석식) - 주교천교 - 신방 재첩마을(중식) - 신월습지 - 하동포구 - 하동송림 - 하동장터 - 화개장터(승용차, 석식) - 하동(박, 조식) - 하동공원 - 섬진교>
8. 16일 18시 하동노량, 8. 17일 6시 30분 - 15시 30분, 8. 18일 6시 - 7시 30분 (총 10시간 30분)
*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버스로 진교 이동, 택시로 하동 노량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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