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종합버스터미널에 10시 30분쯤 도착했다. 9월 중순 날씨치고는 너무 더웠다. 일기예보는 한반도를 비껴 일본 열도를 따라 올라간 태풍이 더운 열기를 몰고 올라온 탓이라고 했다. 하지만 태풍이 지나간 덕분인지 하늘은 맑고 푸른 전형적인 가을 하늘이었다. 길 건너편에 '내가 조선의 국밥이다' 상당히 자극적인 문구를 내건 식당이 보였다. 아직 점심을 먹기엔 이른 시간이었지만 육교를 건너 국밥집에 들어갔다. 식당에는 식사 중인 사람들이 있었고, 내 뒤로도 몇 분이 더 들어왔다. 든든히 배를 채운 후, 본격적인 트레킹에 나섰다.
남파랑길 안내 리본을 만나 완만한 오름길 차도를 따라 걷고, 아파트 단지를 지나니 여수엑스포역이 나타났다. 드디어 여수에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맞은편으로 엑스포 건물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중앙통로로 들어서자 커다란 목각인형이 큰 눈을 뜨고 무언가 응시하는 듯한 자세로 앉아있었다. 안내판을 보니 이름은 '연안이'. 엑스포의 주제인 '살아있는 바다, 숨 쉬는 연안'에서 이름을 따왔으며 왜적과 왜구를 물리쳤다는 여수 설화 속의 인물 '오돌이'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마리오네트 인형으로 엑스포 기간 중에는 크레인 지게차의 도움을 받아 인형극처럼 움직였다고 하는데, 앉아 있은 지 오래된 것 같았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니 길 옆 몇 군데 점포를 빼고는 텅 비어 있었다.
밝고 단란한 모습의 '해변의 가족들' 조형물을 지나자 엑스포광장이 나타났고, 바로 앞이 바다였다. 바다 위로는 수상 보트가 빠르게 물보라를 일으키며 달리고 있었고, 그 너머로 오동도 섬이 누워 있었다. 녹색의 오동도 섬은 마치 귀여운 호랑나비 애벌레가 꿈틀대는 것처럼 느껴졌다.
오동도 섬 진입로 앞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태풍으로 인해 닫혔던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태풍은 이미 한반도를 벗어났지만 출입통제 해제는 오후 1시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30분은 더 기다려야 했다. 오동도는 남파랑길 코스에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오동도 섬에서 보는 여수는 아름다웠다. 엑스포 공연장인 대형 원형의 빅오(BIG-O)는 여수의 시그니쳐처럼 보였다. 나지막한 산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여수는 활력이 넘치는 휴양도시처럼 느껴졌다.
빠른 걸음으로 오동도를 다녀와서 가파른 나무계단을 힘겹게 올랐다. 여수 앞바다가 잘 보이는 나무계단과 카페 앞 나무 울타리에는 소망을 쓴 나무 하트가 빼곡히 달려 있었다. 참 많이도 달려 있었다.
'오늘 엽서는 내년 1월 5일경 배달됩니다'
여수의 추억과 미래의 소망을 배달해 주는 낭만 우체통도 앙증맞았다. 소망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오후 2시, 한낮의 날씨 치고는 너무 더웠다.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곳이었지만 바람도 불지 않았다. 너무 힘들어 나무 그늘 아래 배낭을 내리고 쉬다가 카페에 들어갔다. 시원한 아이스티를 마시니 살 것만 같았다.
해상 케이블카 정류장을 지나 자산공원으로 올라갔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늠름하게 여수 앞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성웅 이순신 동상 기단에 '민족의 태양'이란 좀 생소한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3개의 횃불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현충탑도 디자인은 특별하지 않았지만 이색적으로 느껴졌다.
'#여수밤바다 #낭만포차'
컨테이너 포장마차는 문이 닫혀 있었고, 포차 광장은 텅 비어 있었다. 아직 밤이 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밤이 되면 어떤 모습일까. 바로 머리 위로 거북선대교의 조명이 빛나고, 시원한 바닷바람에 파도소리가 밀려오고, 젊음의 열기로 가득 차게 되는 포차 광장은 충분히 낭만적일 것 같았다. '여수 밤바다'라는 노래가 많은 젊은이들을 설레게 하는 기폭제가 되었겠지만, '#여수밤바다 #낭만포차' 컨셉은 여수를 낭만의 도시로 만든 일등공신이 아닌가 싶었다. 붉은 립스틱 색감의 하멜등대도 여수 밤바다를 아름답게 꾸미는 예쁜 장식 같았다.
아름다운 현수교인 거북선대교 그리고 그 위 하늘 속을 유유히 나는 케이블카를 뒤로 하고 바닷가를 따라 걸어 이순신광장에 도착했다. 여수에는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곳이 참 많다는 느낌이 들었다.
광장 중앙에는 또 이순신 장군 동상이 서있었고, 그 앞에 검은 돌에 새긴 충무공 찬가비가 세워져 있었다. 이은상 시인이 쓴 시로 '영원히 꺼지지 않는 민족의 태양이여'라는 시구가 있었다. 자산공원 이순신 장군의 기단석에 쓰인 '민족의 태양'이란 말이 이 시에서 따온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성웅 이순신'에서 '민족의 태양'으로 신격화된 듯했다.
광장 로터리를 돌아 진남관을 찾아 올라갔다. 진남관은 전라좌수영의 객사로 현존하는 국내 최대 단층 목조건물로 국보로 지정된 건물이었다. 그런데 진남관은 해체 복원 중, 가림건물이 세워져 있어 볼 수 없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채 한산한 상가거리를 지나 해안길로 다시 돌아왔다. 완만한 오르막 찻길 옆 몇 그루 나무 숲 속에 나무 벤치가 있어 들어갔다. 바로 옆 찻길에서는 차들의 소음이 들려오고, 바로 아래 작은 조선소에서는 귀를 찢는 듯한 기계소리가 들려왔다. 평소 같았으면 피해 지나쳤을 곳이었지만 더위에 너무 지친 상태였기에 고마운 마음으로 땀을 식히고 물을 마시고 오랫동안 휴식을 취했다.
작은 포구를 지나고 어촌 마을을 돌아 나오자 영당지라는 기와집이 나타났다. 문이 잠겨 있어 들어갈 수는 없었다. 풍어를 기원하는 일종의 해신당이었다. 한 때 철거되었다가, 향토민속보존회가 영당풍어제를 재현하면서 복원되었다고 안내판에 쓰여 있었다. 동해바다 해파랑길에서는 곳곳에서 해신당을 보았었는데, 남해바다 남파랑길에서는 처음으로 보는 해신당이었다.
어선들이 끝도 없이 부두에 정박해 있었다. 지금까지 봐온 아기자기한 여수 바다 풍경과는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여수는 남해바다의 중요한 어항이었다. 낭만도시 여수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여수에서 돈 자랑하지 마라.' 오래전에 시중에 떠돌았던 말도 여수 어항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부둣길은 걷기에 너무 불편했다. 나무 한 그루 없는 시멘트 길은 열을 받아 뜨거웠고, 몸은 점점 지쳐 녹아내리는 듯했다.
오후 5시쯤, 여수 어항이 끝나는 지점에서 여천 공단에 있는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SOS를 쳤다. 그리고 아들 차를 타고 여수시청이 있는 소호동으로 갔다. 소호동은 음식점, 술집, 노래방이 즐비했고, 오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아들이 아는 횟집에 갔더니 이미 손님들로 꽉 차 빈자리가 없었고, 또 다른 집에 가서는 겨우 홀에 마련된 자리를 잡았다. 다들 불황이라 아우성인데 여수의 밤은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저녁 식사를 하고 아들을 따라 여천공단 야경을 보려 갔다. 아들이 짓고 있는 CNT 공장을 차 안에서 눈대중으로 둘려봤다. 아들은 자기 책임하에 짓고 있는 현장을 나에게 보여 주고 싶었던 것 같았다. 굴뚝, 저장탱크, 둥근 돔... 대낮처럼 환하게 밝힌 공장 건물과 시설물의 불빛들은 마치 야경의 경연을 보는 듯했다. 여천공단 야경의 정수는 여수와 광양을 잇는 이순신대교에서 보는 것이었다. 여천공단의 야경, 전혀 생각지도 못했는데 내가 본 어떤 야경보다 멋있고 환상적이었다. 낭만 도시 여수 밤바다의 또 하나 숨겨진 비경이었다.
남파랑길54코스(7.3km), 오동도(2.0km), 남파랑길 55코스 일부(13.6km) (총 22.9km)
<여수종합터미널(중식) - 여수세계박람회장 - 오동도 - 자산공원 - 여수낭만포차거리 - 이순신공원 - 여수영당지 - 국동어항 - (승용차) - 소호동(석식) - 여천공단(승용차) - 선소(박, 조식)>
2022.9.9.19일 10시30분∼17시30분 (7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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