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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파랑길

남파랑길22. 순천만의 초가을 풍경

순천만 와온 마을에 도착했다. 시간은 오후 3시쯤이었다. 지난 8월 순천왜성에서 순천역까지 택시를 타고 가면서 택시기사에게 순천에서 추천하고 싶은 곳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와온마을 일몰과 칠면초를 꼭 보라'는 말을 듣고 마음에 새기고 있던 곳이었다. 마침 시간도 여유, 적절하게 도착했다. 

 

나즈막한 산아래 마을이 형성돼 있었고, 앞으로는 너른 갯벌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마을 유래비를 보니, 뒷산이 소가 누워 있는 형상이라 하여 '누울 와臥'와 '따뜻할 온溫'자로 와온臥溫이라 이름 지었다고 했다. 

 

일단 숙소를 먼저 구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마침 마트가 있어 들어가 아이스크림 1개와 캔맥주 1캔을 사고 여사장에게 잠잘 숙소를 소개해줄 수 있냐고 물었더니, 어딘가 전화를 걸더니 일몰한옥 민박집을 소개해줬다. 걸어오다가 민박집 안내 간판이 보여 전화를 했더니 받지 않아 오늘 숙소를 구하지 못하면 어쩌냐 걱정이 됐었는데, 한 시름 놓게 되었다. 

 

민박집은 잘 지은 ㄷ자 기와집이었다. 순천만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여주인은 방을 청소하고 있었다. 마루에 걸터앉아 캔맥주를 마시면서 자연스레 대화가 이루어졌다. 오늘 저녁 손님은 나 혼자뿐이라고 했다. 원래 살림집으로 지었는데 자식들 다 내 보내고 민박집으로 운영한다고 했다. 그리고 일몰이 아름다운 포인트와 칠면초 군락지 위치를 알려줬고, 며칠 전 직접 찍은 멋진 일몰 사진까지 보여 주면서 오늘도 바람이 좀 있어 일몰이 아름다울 거라고 기대감을 높혔다. 그리고 고맙게도 저녁식사를 할 식당까지 소개해줘 예약을 했다.  

  

먼저 칠면초 군락지로 갔다. 거리는 예상보다 훨씬 멀었다. 멀리서도 붉은 칠면초 군락지가 또렷하게 보였다. 푸른 가을 하늘 아래 누런 갈대밭과 검은 갯벌이 있고, 그 갈대밭과 갯벌 사이에 붉은 칠면초 군락이 가늘고 길게 뻗어 있었다. 그 풍경은 마치 아름다운 파스텔톤 채색 풍경화를 보는 듯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칠면초 군락지는 꽤 넓었다. 다른 식물은 전혀 섞여 있지 않고 칠면초만 무리지어 살고 있고 있었다. 칠면초는 갯벌에 사는 염생식물로 칠면조처럼 색이 변한다고 해서 이름 지어졌고, 처음에는 녹색을 띠다가 점차 붉은색으로 변한다고 한다. 온통 붉은색 일색인 칠면초를 보니 지금이 일 년 중 가장 보기 좋은 때인 것 같았다. 칠면초의 색감은 보는 각도에 따라, 햇살이 비치는 광도에 따라 달리 느껴졌다. 칠면초의 색감에 반해 해가 얼추 서산에 걸릴 무렵까지 머물다가, 일몰 광경을 보기 위해 서둘러 자리를 떴다.

 

빠른 걸음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벌써 많은 사람들이 일몰전망대에서 일몰을 기다리고 있었다. 민박집 여주인이 알려준 일몰 포인트는 민박집에서 가까운 솔섬 부근이었지만, 칠면초 군락지에서 너무 오래 있다 보니 시간상 그곳에서 일몰을 볼 수밖에 없었다. 아쉽게도 그렇게 멋진 일몰은 아니었다. 하지만 까만 뻘밭 너머 바다를 붉게 물들이고 장엄하게 산마루를 넘어가는 석양은 충분히 인상적이었다. 

 

예약한 식당은 '해반'이라는 음식점이었다. 테이블이 몇 개 안 되는 작은 식당이었지만 깔끔했다. 먼저 고구마 맛탕이 애피타이저로 나왔다. 식감이며 조청의 단맛이 깜짝 놀랄 정도로 내 입에 맞았다. 잃어버렸던 맛을 느끼는 것 같았다. 이어서 차례로 나온 밥, 국, 김치, 두부지짐, 애호박찜 그리고 굵은소금 뿌려 구운 갈치요리에 계속 탄복하며 먹었다. 무의식의 밑바닥에 잠겨버린 엄마의 맛이 끄집어내어 지는 듯했다. 식당의 여사장은 전통 한국음식 전문가였다. 식당을 운영하면서 강연도 다니고 있었다. 낮에는 문을 닫을 때가 많다고 했다. 그래서 주로 예약 손님만 받는데, 바로 옆자리 두 분 손님도 순천에서 온 예약 손님이라고 했다. 음식에 좀 무심한 내가 운 좋게도 사치스러운 맛 여행을 덤으로 했다.  

 

와온 마을의 아침 풍경은 고요했다. 은은하게 아침 하늘이 밝아왔고, 그 하늘에 부드러운 솜털 구름이 덮여 있었다. 바닷물이 물려 난 뻘밭 위에 덩그러니 빈 배가 매여있었다. 마치 휴식의 시간, 휴식의 공간에 잠겨있는 듯했다. 몸과 마음에도 평화로움이 느껴졌다.

 

텅 빈 해안길을 따라 걸었다. 부지런한 아침 새들만이 길동무가 되어 주었다. 와온 해변 공원을 지나 어제 일몰을 감상한 전망대 앞 시멘트 길을 따라 뻘밭 가운데 있는 빈 건물로 갔다. 주인 없는 빈 뻘배 3척만 말뚝에 매여 있었다. 뻘밭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마치 검은 바다 같았다. 신기하게도 검은 뻘밭 위에 흰 새들이 차렷 자세로 움직이지도 않고 서있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먹이를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 어젯밤부터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인지? 그런데, 그 풍경도 더없이 평화롭게 보였다.

 

다시 칠면초 군락지 옆길을 지나 좀 가파른 산길을 300m쯤 올라가니 용산 전망대가 나타났다. 그리고 눈 아래 순천만이 펼쳐졌다. 순천동천이 S자 곡선을 그리며 순천만으로 흘려 들고, 바다와 강이 만나는 하구 주변 너른 갯벌 밭에 갈대 군락지가 형성되어 있었다. 갈대 군락지는 다양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하트 모양, 땅콩모양, 둥근 원형... 그중 강 서쪽에 형성된 둥근 원형의 군락지가 특히 아름답게 보였다. 검은 갯벌 위에 컴퍼스로 그린 듯 반듯한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저절로 형성된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뛰어난 예술가가 만든 뛰어난 작품 같았다. 

 

그런데, 9월의 순천만에서 가장 돋보이는 색감은 갈대밭이 아니라 너른 황금들판이었다. 의외의 풍경이었다. 선명도가 그리 높지 않은 누런 갈대밭보다는 노랗게 물든 벼논이 훨씬 인상적이었다. 들판 가운데  적색벼를 심어 모자이크 처리한 '대한민국 국가정원 순천만 정원'이란 엠블럼도 눈길을 끌었다.

 

용산전망대를 내려와 비상하는 순천을 형상화한 '비상의 문'을 지나자 온통 갈대밭이었다. 갈대 이삭은 막 붉은빛을 띠고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갈대 하면 상상되는 것이 하얀 이삭이 하늘하늘 바람에 날리는 모습인데, 9월의 갈대는 열매를 달고 있는 가을 곡식 같았다. 보통 11월 초순에 순천만 갈대 축제가 열린다고 하니 아름다움 갈대밭의 진수를 보기에는 아직 이른 때인 것 같았다. 파란 가을 하늘아래 바람에 하늘거리는 멋진 순천만의 갈대 군무를 보지 못함은 못내 아쉬웠다.

 

순천만 갈대군락은 순천만 하구를 중심으로 급격히 팽창하고 있다. 1970년대 이전부터 분포하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그 후 지속적인 성장세를 보이다가 2000년 이후 팽창 속도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순천만 갈대군락 팽창 원인은 간척농지와 상사댐 조성 등으로 인한 수계 변화로 보인다.

순천만의 갈대군락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고 잘 보전되어 있으며, 원형 군락을 유지하면서 팽창하고 있어 경관적, 심미적 가치가 매우 높게 평가되고 있다. 

갈대군락은 홍수조절 기능이 있고, 적조를 막는 정화기능이 뛰어나 순천만의 천연 하수종말처리장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또한 갈대는 어패류의 산란장을 제공하며, 이를 먹이로 하는 철새들의 보금자리 역할을 하고 있다. 순처만 갯벌이 희귀 조류의 서식지가 된 데에는 갈대군락의 역할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순천만 갈대군락 안내문

 

 

 

순천만 갈대밭은 순천만국가정원에 포함되어 있고, 유네스코가 지정한 순천 생물권보전지역에 포함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해안에 위치한 대표적인 연안 습지이며, 세계에서 인정하는 생태환경이다. 생물의 다양성이 풍부하게 보존되어 있으며, 문화적으로도 보전할 가치가 있다고 국내외적으로 인정받은 셈이다.

 

나무데크길을 지나고, 순천만자연생태관을 지나 순천만 갈대길로 들어섰다. 길은 강 뚝을 따라가다가 해안 뚝길로 이어졌다. 뚝길 너머로도 끝없이 너른 갈대밭이 형성되어 있었다. 용산전망대에서 본 그 갈대밭이었다. 이곳 갈대밭의 풍경은 나무데크길 주변 갈대밭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주었다. 나무데크길 주변 갈대밭이 잘 관리된 갈대밭이라면 이곳의 갈대밭은 사람의 손이 안 간 야생의 갈대밭이었다. 

 

도중에 탐조대가 있었고, '흑두루미희망농업단지'라는 간판도 보였다. 이 지역은 겨울철새들이 많이 찾는 지역이었다. 먹이가 풍부한 갯벌이 있고 숨어 살기에 좋은 갈대밭이 있기에, 철새들에게 이보다 좋은 겨울나기 장소는 없을 것이다. 천연기념물이자 순천시 상징새로 지정된 흑두루미는 특별히 보호받고 있었다. 순천시에서 지원하고 농업인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흑두루미가 먹이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들논에 세워져 있던 전봇대까지 제거하였다고 했다.

 

뚝길은 길고 길었다. 왼편으로는 갈대숲이 끝없이 이어지고 오른편으로는 벌판에 벼가 황금빛으로 익어가는 뚝길은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멋진 초가을 풍경 길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갈대밭 앞에 핀 하얀 억새꽃에서 갈대밭에서 못다 느낀 짙은 추정秋情을 느꼈다.

 

 

 

남파랑길 60코스 일부(2.1km), 남파랑길 61코스(13.7km) (총 15.8km)

<두봉교 - 와온(석식, 박, 간편조식) - 칠면초 군락지 - 용산전망대 - 순천만 갈대군락지 - 흑두루미 희망농업단지 - 장산마을 - 화포항>

9.21일 14시 - 15시, 9.22일 6시 - 12시 (총 7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