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0시쯤 순천역에 도착했다. 순천역에는 벌써 3번째다. 광양구간과 여수 구간 트레킹 때는 귀가 역이었고, 이번에는 시작 역이 되었다. 역전 식당에서 이른 점심을 먹고 택시를 타고 남파랑길 62코스 시작점인 화포로 갔다. 내 또래인 택시기사는 얘기하기를 좋아하는 분이었다. 이것저것 나에게 물어봤고, 동료기사 얘기며, 아들 얘기며, 군대 얘기까지 쉴 새 없이 얘기했다. 틈새를 잡아 여행 정보를 얻을 겸 말을 걸어보려고 해도 쉽지 않았다.
화포는 조용하고 아담한 바닷가 마을이었다. 썰물 때인지 마을 앞 갯벌은 물기로 뻔득거리며 점점 멀어져 가는 듯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사람의 그림자는 눈에 띄지 않았다.
이곳의 갯벌은 여자만 갯벌과는 다른 느낌을 주었다. 너른 갯벌에 촘촘하게 대나무 막대가 꽂혀 있었다. 줄 맞추어 있는 모습이 무척 기하학적이었다. 갯벌 위에 영역을 표시한 논밭 같기도 했고, 어떻게 보면 검은 갯벌을 캠버스 삼아 그린 추상화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자세히 보니 막대와 막대 사이에는 그물이 처져 있고, 모서리 끝에는 원통형 그물이 매어져 있었다. 밀물 때 들어온 고기가 썰물 때 그물에 갇히도록 설치한 고기잡이 그물같았다. 그래도 궁금해서 알아보니 칠게를 잡는 그물망이었다. 넓은 뻘밭에 가득 설치된 규모로 봐서는 갯벌 위에 사람들이 북적댈 만도 한데, 텅 빈 것을 보니 고기잡이 물 때가 지난 것 같았다.
썬크림을 바르지 않고 들어가야 전신 머드의 효과를 충분히 누릴 수 있습니다.
특히 아이들에게는 아토피 피부 효과가 있습니다.
정오 무렵에 거차마을에 도착했다. 이 마을에서는 5월부터 10월까지 갯벌 체험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뻘배를 체험할 수 있고 짱뚱어, 칠게, 갯고동을 잡을 수 있었다. 이곳 뻘은 매우 부드러워 피부에 효과가 좋다고 선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10월의 하순, 날씨마저 쌀쌀해진 탓인지 체험장도 텅 비어 있었다.
남파랑길은 갯벌을 따라 계속 이어졌다. 내川를 만나면 논길로 삥 돌아가서 마을을 만나기도 했지만 또다시 갯벌을 숙명처럼 만났다. 간척지 방조제 위를 지나는 길은 직선이었고, 길었다. 그 풍경은 너무나도 단조로웠다. 갯벌, 평소 자주 접할 수 없는 좀 색다른 풍경이기에 호기심 품고 왔는데, 점점 지루해졌다.
오전에 쌀쌀했던 날씨도 더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무 그늘이 없어 마땅히 쉴 곳도 없었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거의 3시간이 다되었을 무렵 농협창고 옆 그늘에서 배낭을 내리고 주저앉아 휴식을 취했다. 신발도 벗고 양말도 벗어 고생한 발에게 자유를 주었다.
뙈약볕을 맞으며 짱뚱어 잡이를 하는 사람을 보았다. 걷는 내내 갯벌에서 만난 유일한 사람이었다. 막걸리 1병을 옆에 둔 것을 보니 전문적인 짱뚱어 잡이 어부는 아닌 듯했다. 무료함을 달래려고 나온 듯싶었다. 한참을 서서 지켜봤지만 빈 낚싯대만 던졌다 당겼다, 계속 실패만 하고 있었다.
'권태와 지겨움이 나의 텃밭이다'
아침 KTX을 타고 오면서 모니터 화면에서 본 장면이 갑자기 떠올랐다. 데뷔 45주년을 맞은 산울림 김창완이 '어떤 사람도 내보다 더 지겹게 사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면서 한 말이었다. 김창완의 뛰어난 노래는 견딜 수 없는 따분함에서 오는 일탈적 몸부림의 창조물 인지도 모르겠다.
남아메리카 파타고니아 트레킹 여행 중 비행기에서 끝없이 너른 대평원 팜파스를 내려다보고 저곳은 '수평의 감옥' 같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끝없이 이어지는 검은 갯벌에서도 갑자기 권태와 지겨움이 엄습하기 시작했고 점점 감옥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나온 길은 오르내리막이 거의 없는 평탄한 길이었는데도 유달리 힘들었다.
드디어 순천만에서 벌교만으로 들어섰다. 풍경은 별반 달라진 것이 없었다. 하지만 적당한 거리마다 벤치가 놓여 있어 지친 몸과 마음에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는 듯했다. 오리나무 한그루가 알맞게 그늘을 만들어 준 벤치에 앉았다. 태양은 서서히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고 바람도 점점 세져, 바람막이 재킷을 입어야 할 정도로 날씨도 바뀌었다.
기역자로 꺾인 방조제를 돌아서자 벌교읍내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젠 여정도 얼마 남지 않았다. 걷기 편하게 뻘밭 위로 나무데크길이 놓여 있었다. 산책을 하는 벌교 사람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서쪽 하늘에 걸린 해는 오히려 따갑게 얼굴로 파고들었다. 햇살을 가려줄 나무 한 그루 없는 해안 방죽길은 여전히 멀게만 느껴졌다.
불현듯 순천만과 벌교만 남파랑길은 수행자의 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도 가도 눈에 들어오는 검은 뻘밭 그리고 길고 긴 직선의 방죽길. 이름 붙이자면 '갯벌 순례길'이라고 해야겠다.
밤을 새우고 아침 6시에, 지난밤 모텔 주인이 알려준 식당에 가서 아침을 먹었다. 벌써 식당에는 손님들로 빈자리가 몇 개 없었다. 바로 인근 수산시장에도 환한 불빛 아래 꼬막이며 낙지며 생선 전이 벌어져 있었다. 벌교의 하루는 이렇게 일찍 시작하고 있었다. 벌교천을 따라 읍내 투어에 나섰다. 제일 먼저 만난 것은 이 지역 유명인사들을 소개한 안내판이었다. 독립운동가이자 대종교의 창시자인 나철, 태백산맥의 저자 조정래 그리고 음악가, 문학가, 기업인 등등.
벌교는 꼬막과 소설 태백산맥의 고을이었다. 강변을 따라 태백산맥 책 표지 엠블렘이 설치돼 있었고, 태백산맥 거리가 조성돼 있었고, 태백산맥의 등장인물을 상호로 한 꼬막식당들이 줄지어 있었다. 소화의 집, 소화다리, 김범우의 집, 청년단, 경찰서 등등 태백산맥의 주요 무대를 탐방하는 '소설 태백산맥 문화기행길'도 조성돼 있었다.
소화다리를 건너 벌교읍내 거리를 걷다가 남파랑길로 들어섰다. 벌교천은 갯벌 사이로 물길을 만들어 바다로 흘러들고 있었다. 정중동 꼿꼿한 자세로 무언가 응시하고 있는 듯한 두 마리 황새도 눈길을 끌었다. 넓어진 천변에는 갈대가 아침 바람에 일렁거리고, 길게 이어진 나무데크길 끝 하늘에는 아침노을이 옅게 물들고 있었다. 구름마저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풍경은 고요하고 평온했다.
하지만 되돌아본 벌교 모습에는 뭔가 아쉬움이 남았다. '벌교에서 주먹 자랑하지 마라', '소설 태백산맥의 무대'. 얘기로만 듣고 책으로 봤던 지난날 어둡고 비극적인 모습이 자꾸만 오브랩 되었다. 실제로 벌교 거리에는 과거의 이미지가 많이 투영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주변의 도시는 낭만도시 여수, 국가정원 순천 등 새로운 도시 이미지를 형성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갯벌, 갈대밭, 꼬막, 근현대 역사의 무대 등등 멋진 생태환경과 문화콘텐츠를 갖고 있는 벌교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갈대밭을 지나자 다시 갯벌이 나타났다. 듬성듬성 칠면초 군락도 보였다. 꼬막 채취 작업을 마친 빈 뻘배가 지나온 흔적을 갯벌에 남기고 매여 있었다. 그 흔적은 삐뚤삐뚤 막 연필을 잡기 시작한 어린 손녀가 야무지게 그린 선 같았다. 방조제 작은 수로를 따라 흘러내린 개울물이 갯벌 위에 만든 물길은 뱀처럼 구불구불 바다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갯벌에 남겨진 흔적은 아름답고 부드러운 곡선이었다.
자연에는 직선이 없고 곡선만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자연은 더불어 존재하는 것이기에 배려와 타협이 불가피하며, 그 결과는 차이와 다양성이 반영된 곡선이지 않겠는가. 효율을 중시하는 인간만이 직선을 만든다. 직선은 반 자연적이며 폭력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잠시 갯벌을 벗어나 대포리 마을길로 들어섰다. 가을걷이를 끝낸 빈 황토밭도 보였고, 쓰러져 가는 빈 축사 너머로 주렁주렁 주황색 감이 달린 감나무도 보였다. 무엇보다 나를 반갑게 한 것은 약간 구린내 나는 퇴비 익는 냄새였다. 계속 비릿한 갯내음만 맡아 오다가 구리지만 익숙한 냄새를 맡으니 어릴 적 고향집으로 가는 느낌이 들었다.
대포리 마을에서 당산을 만났다. 여수에서 당산을 만나기도 했지만 그곳에는 이순신장군을 모신 사당의 성격이 강한 곳이었고, 마을 수호신을 모신 사당은 남파랑길에서 처음 만났다.
마을의 평안과 풍요를 지켜주신 당할머니, 풍어와 뱃길을 보살펴 주시는 신령한 용왕님네
조상 대대 500여 년 이어 내려오는 우리들의 지극한 정성을 흠양하소서. -대포리 당제 중
갯벌 속으로 축대를 쌓아 만든 도로가 있어 따라 들어갔더니, 방파제로 둘러싸인 작은 포구가 있었다. 포구 안은 바닷물이 빠진 뻘밭이었고, 배 몇 척이 뻘 위에 정박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갯벌을 가까이서 오랫동안 관찰할 수 있었다. 짱뚱어와 칠게가 내 조심조심 걷는 발자국 소리에도 놀라 재빠르게 구멍으로 숨었다. 이틀째 지겹도록 봐온 갯벌은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갯벌은 무수한 생명이 살고 있는 생태계의 보고라고 하지 않던가. 갯벌은 육지에서 오염된 물을 정화하고, 생명활동에 필요한 산소를 공급하는 기능도 뛰어나다고 하지 않던가. 세상의 온갖 색깔이 뒤섞인 짙은 회색의 갯벌에서 뭇 생명의 기운을 느끼며 한동안 쉬었다. 바닷바람마저 시원했다.
남파랑길 62코스(24.9km), 남파랑길 63코스 일부(17.7km) (총 42.6km)
<화포항 - 거차마을 - 구룡역 - 벌교갯벌어촌체험안내센터 - 벌교역(석식, 박, 조식) - 소화다리 - 조정래길 - 대포항 - 죽암방조제>
10.20일 11시 - 19시, 10.21일 6시 - 12시 (총 14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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