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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파랑길

남파랑길28. 열애처럼 소설비가 내린 장흥

국도 18번 도로, 남부관광로 낮은 고갯길에서 보성과 작별을 고하고 장흥땅에 들어섰다. 

그리고 좁은 마을길을 벗어나자 수문해수욕장이 나왔고, 곧이어 장흥 키조개 거리가 나타났다. 대체로 차분하게 느껴졌던 보성과는 달리 장흥땅에서는 갯마을의 역동성이 진하게 느껴졌다. 커다란 키조개 조형물이 서있었고, 곳곳에 키조개 식당이 영업을 하고 있었다. 장흥산 키조개는 조개껍질 빛깔이 황금색을 띠고, 아연 마그네슘 단백질 아미노산 등 필수 영양소가 풍부하여 우윳빛으로 우려낸 국물은 정력에도 탁월하다고 소개하고 있었다.

 

수문항을 지나고 정남진종려거리 조성탑을 지나자 아담한 해수욕장이 나타났고, 해수욕장 소나무 숲길에 '시가 있는 여닫이 바닷가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었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한승원이 이곳 율산마을에 정착한 후 쓴 시를 새긴 시비가 해변산책로를 따라 세워져 있었다. 장흥 출신인 한승원은 자신의 젊은 날 체험을 바탕으로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이곳 명물인 '키조개'는 많은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옛날 율산 마을의 한 총각이 별 총총한 밤에 여닫이 연안 모래밭에 엎드려 천관산에 주석하는 보살님께 비손했다.

"제 사랑하는 여인이 병들어 있는데 어떤 약을 써도 낮지 않습니다. 그 여인을 살려 주십시오" 

"사향노루 암수가 사랑할 때 나는 향기를 풍기는 연꽃잎을 따다가 먹이면 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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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닫이 바다에서 나는 바지락과 키조개가 연꽃이니라."

                                                                                                                                                    -연꽃바다 이야기

 

 

장재교 삼거리에서 남파랑길은 오른편 내륙으로 만을 따라가도록 안내하고 있었으나, 장재교를 넘어가는 길을 택했다. 거리는 상당히 단축되었다. 오늘 목적지인 회진항에 해 떨어지기 전에 도착하기 위해 선택한 궁여지책이었다. 도로는 잘 닦여 있었고, 인도도 제대로 갖추어져 있었다.

 

가지 않은 길쪽 바다는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가 있었고, 그 안쪽으로 나지막한 산들이 병풍처럼 감싸고 있었다. 내해는 잔잔하고 고요했다. 먼 산들은 흐린 해무에 더 흐릿해져 마치 엷은 막 뒤편 무대에서 춤추는 여인들의 춤사위처럼 넘실넘실 흘렸다.

 

장재도 남쪽 다리를 건너자 정남진이라고 크게 새긴 자연석 마을 표지석이 나타났다. 원래 마을이름은 남포마을이었는데 주민들이 인문, 지리, 역사적 자료 등에 근거하여 개칭하였다고 설명하고 있었다. 영화 '축제'의 촬영장이기도 하며, 해돋이와 달맞이 명소이며, 득량만 석화구이 맛은 전국 최고라고 안내문에는 자랑하고 있었다. 

 

왼쪽으로는 갯벌이 계속 이어졌고 그 너머 멀리 바다건너로는 고흥반도가 계속 따라왔다. 남쪽으로는 교회종처럼 생긴 뾰족한 산이 길을 안내하듯 계속 앞장섰다. 

 

 

정오쯤, 굴구이 식당 간판이 보이는 바닷가 마을에 도착했다. 삼삼오오로 식당을 찾는 사람들이 보이는 것으로 봐서 꽤 유명세가 있는 식당촌인 듯했다. 어디로 갈까 기웃거리다 손님이 많은 식당에 들어갔다. 그런데 굴구이 식당은 한 사람이 이용할 수 없는 구조였다. 화덕위 철판에 굴을 구워 먹는 구조였는데, 굴을 바구니 단위로 팔았고 식당 안을 둘려보니 네 사람 이상이 화덕 주변에 앉아 먹고 있었다. 난감했다. 어쩌지 하고 메뉴판을 보니 후식용 굴떡국이 있어 혹시 후식만 팔 수 없냐고 애원하듯 물었더니 고맙게도 빈자리로 안내했다. 진한 굴향이 나는 떡국은 입에 맞았다. 연꽃잎향이 난다는 장흥 키조개 국물 떡국은 아니었지만 굴떡국을 한 그릇 비우고 나니 기운이 돋는 것 같았다.

 

식당을 나오자 바닷가 빨랫줄에 목장갑이 가지런히 포물선을 그리며 걸려 있었다. 굴구이 식당에서 손님이 굴을 까서 먹을 때 사용했던 장갑을 세탁해서 걸어둔 것이었다. 그 풍경이 너무나 이색적이고 아름다웠다. 마치 하늘과 갯벌을 배경으로 붉게 물든 연꽃잎을 걸어 둔 것 같았다.   

 

굴구이 식당촌을 벗어나 다리를 건너고 직선으로 쭉 뻗은 간척지 논 가운데 길을 지나  바닷가로 나오니 다시 갯벌이 나타났다. 길가에는 4륜바이크가 줄지어 주차해 있었고, 뻘밭에는 할머니들이 굴을 캐고 있었다. 마침 채취작업을 끝낸 분이 계셔 내려가서 말을 걸었더니 생굴을 까서 자연산이라고 먹어보라고 권했다. 엉겁결에 받아먹었다. 짭조름하고 단맛이 느껴졌다. 고마운 마음에 채취한 굴자루를 4륜바이크까지 옮겨 드렸다. 

 

삼산방조제에 들어섰다. 끝이 가물가물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었다. 그 거리가 무려 3km나 되었다. 오른쪽 저류지 너머로는 넓은 들이 펼쳐졌고, 왼편 바다에는 김양식장이 마치 밭처럼 펼쳐져 있었다. 이윽고 얕은 구릉산 위에 있는 정남진전망대에 올랐다. 득량만의 푸른 바다가 그림처럼 펼쳐졌다. 동쪽으로는 고흥반도가 멀지 않은 곳에 있었고, 소록도와 거금도를 잇는 거금대교 그리고 녹동까지 또렷하게 보였다. 남으로는 섬들이 마치 바다에 떠 있는 듯했다. 그날따라 하늘과 바다는 구분이 안될 정도로 청과 남 동색이었다. 그 하늘과 바다에 묻힌 섬들은 마치 신선이 산다는 선경 같았다.

 

또다시 긴 방조제를 지나 찻길을 오르자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가 먼저 눈에 띄는 마을이 나타났다. 신상(신덕) 마을이었다. 그리고 은행나무 바로 아래로 몇 걸음을 더 가자 독립자금헌성기념탑이 우뚝 솟아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마을 사람들 모두가 독립자금 모금에 참여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탑이었다.

 

지나가는 나그네여 발을 멈추고 우리 선인들의 꿋꿋한 발걸음을 읽으십시오.....

일제의 혹독한 탄압과 착취, 그 무지막지한 총칼의 세월 혀를 깨물면서 보리고개 배고픔 속에서도 허리띠 졸라매고  한줌두줌 좀도리쌀을 모으고 논밭을 팔고 눈물로 마련한 금반지 은반지를 빼고 고추알 바람 속에서 건진 김 한속두속 모아 상해로 보냈습니다.....

                                                                                                                                                     <독립자금헌성기념탑>

 

신덕마을은 소설가 한승원의 고향마을이었다. 마을길 담에는 소설가를 기리는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마을 뒤 한재고개에는 '한승원 소설문학길'이 조성되어 있었다. 신덕마을은 옛날 덕도라는 섬이었다. 한재고개로는 패배한 동학군이 다리 절고 넘어왔고, 3.1 운동 때는 태극기 들고 넘었고,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자금을 품고 넘었고, 625 때는 인민군과 경찰이 번갈아 넘었다고 했다. 신덕마을과 한재고개는 한 많은 근현대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곳이었다. 배고픈 어린 시절과 치기 어린 젊은 시절을 보낸  한승원에게 이곳 고향의 전설과 역사 그리고 풍경은 그의 소설세계의 자궁이 된 듯했다.  

 

오후 늦게 회진에 도착하여 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 일찍 편의점에서 간편식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또다시 길에 올랐다.

회진은 이 지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곳이며, 유서 깊은 마을이었다. 조선 성종 때 회령진성이 축조되었으며, 수군만호가 주둔하여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던 군사 요충지였다. 임진왜란 때 백의종군하던 이순신 장군이 진주 운곡에서 삼도수군통제사로 제수받고 이곳에서 취임한 후, 12척의 전선을 정비하고 군량미를 확보하여 명량해전 대승을 거둔 발진기지 역할을 한 곳이기도 했다. 

 

시외버스터미널 맞은편 나무계단을 올라가니 회령진성이었다. 뒤쪽으로는 천관산이 넓은 품으로 버티고 있고, 앞쪽으로는 득량만이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성은 대부분 훼손되고 성곽 일부만 남아 있고, 옛 성터에는 민가가 들어앉아 있었다. 

 

회진면 진목마을은 우리나라 문학의 거장인 이청준이 태어난 곳이기도 했다. 회진면 신덕마을이 고향인 동갑내기 한승원과 함께 회진을 작품배경으로 한 소설을 많이 발표하였다. '이청준 소설문학길'은 회진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출발하여 그의 생가를 거쳐 그의 묘소에서 끝난다. 

 

바닷가에 멋진 소나무 몇 그루가 서있고, 그 앞에 예쁜 목조건물이 있었다. 깨진 유리창, 꽉 닫친 문...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었다. 영화 '천년학' 촬영용으로 지은 세트장이었다. '천년학'은 이청준의 소설 '선학동 나그네'를 원작으로 임권택 감독이 그의 100번째 작품으로 제작한 영화이다. 거장 소설가와 거장 영화감독이 콜라보로 만든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여자가 마침내 소리를 시작하고 있었다.....

사립에 기대어 눈을 감고 가만히 여자의 소리를 듣고 있자니 사내의 머릿속에서 오랫동안 잊혀 온 옛날의 그 비상학이 서서히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여자의 소리가 길게 이어져 나갈수록 선학동은 다시 옛날의 포구로 바닷물이 차오르고 한 마리 선학이 그곳을 끝없이 노닐기 시작했다.

<선학동나그네>  

 

그 옛날 포구였던 선학동은 간척지 들로 변했다. 포구에 바닷물이 들어오면 선학동 뒷산이 한 마리 학이 되어 날아오르는 듯 비쳤었는데, 그 풍경도 사라졌다. 눈먼 소리꾼 여자는 옛날 그 풍경을 그리며 소리를 했고, 소리꾼 여자를 찾던 사내는 여자의 소리를 듣고 다시 선학이 노니는 선학동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이청준 소설길'은 득량만과 선학동 들판이 내려다 보이는 선학동마을 뒤편으로 이어졌다. 지난여름 소금을 뿌린 듯 하얗게 꽃피었을 메밀밭은 수확이 끝났고, 붉은 황토색 빈밭으로 변해 있었다. 뒷산 쉼터 오두막에서 오랫동안 선학동을 바라보다 고개를 넘었다. 이청준의 생애와 소설에 관해 설명한 안내판을 읽으면서 넘었다. 그중 하나에서 이 글의 제목을 땄다.

 

'열애처럼 소설의 비가 내리는 땅' 장흥 

 

이청준의 생가 마을, 진목마을 거쳐  덕촌 간척지 들판으로 나갔다. 들판은 너르고 넓었다. 그 들판에서는 간난이 아니라 풍요가 느껴졌다. 많은 것이 변하고 변했다. 무심코 들판을 걷다가 길을  놓치고 말았다. 뻔히 앞이 보이는 빈 들에서 우습게도 길을 놓쳐 헛걸음을 했다. 그런데 들판의 구획이 너무 넓어 그 헛걸음한 거리가 한참이었다. 

 

남파랑길 78코스 일부(9.0km), 장재도길(6.0km), 남파랑길 79코스(20.2km), 남파랑길 80코스 일부(10.0km) (총 45.2km)

<전일리팽나무숲 - 장흥키조개거리 - 여닫이바닷가 - 장재교 - 정남진대교 - 남포마을 - 굴구이마을(중식) - 정남진전망대 - 한승원생가(신상)마을 - 회진항(석식, 박, 간편조식) - 천년학세트장 - 이청준생가마을(진목) - 덕촌간척지들>

* 장재교 앞 삼거리에서 남파랑길을 벗어나  819번 도로를 따라 장재도 방향으로 갔음.

11.21일 7시 30분 - 17시 30분, 11.22일 07시 30분 - 11시 (총 13시간 3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