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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파랑길

남파랑길31. 최고의 뷰, 남파랑길85

푸소FUSO(Feeling-up Stress-off)는 농어가에서 머물면서 농어촌의 따뜻한 정서와 땀방울의 가치를 배우는 감성 여행이자 체류형 프로그램입니다.
2015년 5월에 시작된 강진푸소는 학생 위주의 체험 프로그램으로 시작되었지만, 참여자의 만족도가 높아지면서 단계적으로 일반인 대상의 프로그램도 개발·확대하여 강진의 대표 여행상품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시골 할머니 집 같은 정겨운 강진푸소(FO-SO)체험으로 삶의 여유와 따뜻한 정을 담아 가시기 바랍니다.

-강진군청

 

아침밥은 삶은 누룽지 죽에 김치, 젓갈이 간편하게 차려져 나왔다. 평소 아침식사를 간편하게 하는 내 식성에도 맞는 편이었다. 벽에 '푸소체험의 집'이라는 생소한 엠블렘이 붙어 있어 물었더니, 푸소 안내용 책을 보여주며 강진군에서 지정한 학생들의 숙박형 체험 실습장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학생들의 호응이 굉장히 좋다고 자랑했다. 얘기를 듣고 보니 본업은 푸소 체험의 집이고 여행객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것은 부업처럼 여겨졌다. 아무렴 어떤가, 여행객들이 바라는 것은 '바다가 보이는 집'처럼 숙과 식을 모두 해결할 수 있는 집일 것이다. 해파랑길과 남파랑길에서 여행객에게 잠자리와 식사를 함께 제공하는 집은 여기가 처음이었다.

집 앞으로 넓은 갯벌이 쭉 뻗어 있었다. 배낭을 메고 나와 사진을 찍고 있으니, 여주인이 따라 나와 이곳저곳 설명을 해 주었다. 옆에 있는 '호래비섬'은 길이 놓여서 이젠 홀아비섬이 아니고, 저 멀리 보이는 섬은 황금 개불이 잡히는 '복섬'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여기 섬사람들은 다 부자라고 했다.

 

여명의 아침바다는 옅은 붉은빛을 띠며 밝아오고, 고요했다. 빈 뻘밭에는 뻘배가 지나간 흔적만이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벌써 부지런한 어부는 고기잡이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간 것인가.

상쾌한 기분에 가벼운 발걸음으로 얼마쯤 걸어가자 남파랑길 85코스 안내판이 나타났다. 그리고 강진땅이 끝나고 해남땅이 시작되었다. 앞으로 남은 구간은 6개, 완도와 해남구간뿐이다. 사흘만 더 걸으면 드디어 대망의 땅끝 마을에 도착한다. 그간 겪었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무탈하게 계획대로 걸었다는 안도감과 함께 감사함이 느껴졌다.

사내방조제는 길었고 사방이 탁 트여 시야에 막힘이 없었다. 억새 밭 너머 저류지 호수에는 제법 많은 철새들이 옅은 물안개 사이로 둥둥 떠다녔다. 동남쪽으로는 회색 바다 위에 검은 섬들이 해무 속에 흐릿하게 보였고, 서북쪽으로는 산능선이 물결일 듯 흐르고 있었다.

해남 두륜산과 강진 주작산 사이 능선은 거의 일직선처럼 보였다. 그 풍경이 이채롭워 눈길을 끌었다. 마치 두륜산과 주작산이 팽팽히 고무줄을 당겨놓은 듯했다. 감탄하며, 몇 번이나 사진을 찍었으나 그 풍광을 제대로 잡을 수 없었다. 공기 중에 연무가 끼어서 그런가, 너무 거리가 멀어서 그런가. 아무래도 카메라 눈은 사람 눈을 따를 수 없는가 보다.

저 산들을 올랐던 기억도 되살아났다. 대흥사 계곡을 따라 올라가 두륜산 바위 정상에서 바라본 해남과 강진의 너른 들과 강진만 바다. 그리고 오소재에서 능선을 따라 걸어서 주작산과 덕룡산을 힘겹게 넘었던 기억 등등. 특히 주작산의 오른쪽 날개에 해당되는 고무줄처럼 팽팽히 당겨진 능선을 넘을 때 우습도록 힘들었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평지처럼 보이는 능선에 셀 수 없이 많은 작은 봉우리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봉우리를 넘고 넘어 이젠 거의 다 넘었겠지 하는데, 앞서 가던 부산친구가 한 말 '아직 한 거 남았다.'

아침 해가 떠오른 바다의 풍광도 더없이 몽환적이었다. 멀리 수평선은 흐릿해져 푸른 바다와 푸른 하늘 사이 경계가 사라졌다. 섬들은 옅은 해무에 잠겨 있었고, 마치 넓은 호수 같은 바다 위에 떠있는 듯 보였다. 멀리 남쪽으로는 완도 상왕산이 떡 버티고 있었고, 서쪽 멀리는 달마산이 보였고 땅끝마을로 이어지는 낮은 능선도 눈에 잡혔다. 산과 섬들로 둘려 쌓인 잔물결 이는 바다는 너무나 평화롭고 목가적이었다.

긴 방조제를 지나고, 바닷물이 발밑까지 올라온 해안길을 걷고, 초록 싱싱한 배추밭 사이로 난 들길도 걸었다. 양지바른 곳에 자리한 아담한 마을을 먼발치로 보기도 했고, 노둣길에서 갓 잡은 바지락을 씻고 있는 갯마을 아낙네들을 곁눈질하기도 했다. 바닷가 갈대밭 앞에는 6,7십대 사람들이 카메라를 삼각대에 걸어 놓고 무료하게 뭔가를 기다리며 앉아 있었다. 뭘 찍냐고 물었더니 갈대밭에 바닷물이 차오를 때에 맞춰 장노출 사진을 찍는다고 했다. 그러면 우윳빛 몽롱한 바다 풍경 작품이 찍힌다고 했다. 갈대밭 그리고 폐선박이 군데군데 있는 이곳 해남 바닷가가 장노출 사진촬영의 전국 명소라고 했다.

해남은 김장용 겨울배추 주 생산지였다. 밭에는 결구가 잘된 배추가 수확을 기다리고 있었고, 바닷가 절임배추공장에서는 인부들이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웃으며 카메라에 포즈를 취해 주었다. 해남이 절임배추로 유명하게 된 데는 깨끗하고 짠 바닷물로 배추를 절여서 그런 줄 알았는데 그건 오해였고, 천일염을 쓰고 있었다. 배추가 황토땅에서 해풍을 맞고 자라 영양가가 풍부하고 단맛이 나고 식감이 아삭하고 좋다고 했다.

와룡리 마을 앞 바닷가에 짜우락샘이라는 두 개의 용천이 있었다. 갈대밭 사이에 돌을 쌓아 만든 샘인데 반쯤 바닷물에 잠겨 있었다. 이 샘은 누워있는 용의 형국인 마을 산자락 용의 두 눈에 해당하는 자리였는데, 마을 식수원으로 사용하다가 지하수 개발로 방치했었다. 어느 날 지나가던 노인이 '누가 용의 두 눈을 가렸을꼬, 이러니 마을에 변고가 생기지' 하면서 홀연히 떠났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1년 새 젊은 청년 7명이 급사한 것을 두고 한말이라고 생각해 짜우락샘을 복원했다는 전설 같은 얘기가 있었다.

남파랑길 85코스는 뷰가 어느 코스보다 좋았다.
순탄하고 평탄한 길이 이어졌고, 무엇보다 시야를 가리는 장애물이 없었다. 산은 트레킹 길에서 멀리 물려나 있었고, 바다에는 섬들이 적당한 거리에 떨어져 있었다. 가파른 해변길도 없었고, 하늘을 덮은 숲길도 없었다. 하지만 방조제를 걷고 바닷길을 걷고 들길을 걷는 내내 사방팔방이 열려 있어 보는 즐거움이 있었고 걷기에도 편했다.

남파랑길 85코스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지금까지 봐온 산과 들 그리고 바다와 별반 다를 바 없었지만 느낌은 달랐다. 그것은 가까이에서 보고 체험하는 아름다움과 멀리서 바라보고 느끼는 아름다움의 차이인 것 같다. 단풍 산행을 하고, 절벽 해안길을 걷고.... 직접 자연 속에 들어가서 체험하는 풍경도 익사이팅하지만, 산과 들과 바다를 바라보고 느끼는 풍경도 가슴 뛰게 멋진 것이다.

'아는 것이 아름답다'
'아름답다'의 어원을 '알다'의 명사형 '알음'으로 보고 한 말이다. 물론 언어학자는 다른 의견을 피력하지만 왠지 끌리는 말이다. 그렇다면 '아름답다'의 반대말은 '모름답다'일지도 모르겠다. 어원의 맞고 그름을 떠나서 오랜 세월 형성된 우리의 농경문화 정서상으로는 공감이 가는 주장 같다. 안정된 농경 정착생활을 하는 부락민들에게 낯선 사람, 낯선 환경은 두려움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특히 말을 타고 침입하는 낯선 유목민들은 공포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동하는 유목민들에게는 새로운 초지는 축복이며, 낯선 사람은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새로운 소식을 전해주는 반가운 손님이었을 것이다. 유목민에게 새로움, 즉 '모름답다'는 오히려 '아름답다'의 동의어가 되고, 그리고 '모르는 것이 아름답다'라는 미적감각의 원형이지 않았나 싶다.

외국 여행에서 느끼는 아름다움은 유목민적인 미적감각이라는 생각이 든다. 보지 못했던 색다른 풍경일수록 더 끌리고 감탄하는 것 같다. 익숙한 아름다움을 느끼고 체험하기 위해 굳이 시간과 비용을 들여 해외여행을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칠레 파타고니아 4박 5일 트레킹에서 최고의 색다른 아름다움에 취했었다. 조륙운동과 조산운동 그리고 빙하에 의해 만들어진 풍경은 감탄을 넘어 경악스러웠었다. 토레스 델 파이네의 세 개의 수직 바위 봉우리 그리고 뿔처럼 생긴 쿠에르노스 바위 산. 토레스 델 파이네는 화강암 덩어리였고, 쿠에르노스는 검은 퇴적암 사이에 아이보리색 화강암이 관입하여 형성된 독특한 바위 덩어리였다. 거의 3,000m 가까이 되는 바위 덩어리가 오랜 세월 깎이고 다듬어져 눈을 의심케 하는 자태를 보여 주고 있었다. 이들 산의 아름다움은 가까이서 보다 멀리 떨어져서 봤을 때 빼어났다. 쿠에르노스는 트레킹을 마치고 돌아오는 호수 위에서였고, 토레스 델 파이네는 돌아오는 버스가 예기치 못한 고장으로 머무르게 된 황량한 들판 위에서였다.

남파랑길에서 느끼는 아름다움과 해외 트레킹에서 느끼는 아름다움의 차이는 익숙함과 색다름의 차이일 것이다.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아기자기한 우리의 자연과 감히 범접할 수 없어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해외 유명한 산과 바다는 느낌에서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색다른 아름다움은 삶에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 하지만 에너지 소모적이라 오랫동안 즐길 수는 없는 것 같다. 익숙한 아름다움에서는 오히려 편안함이 느껴진다. 색다른 아름다움은 감탄을 불려 일으키고, 익숙한 아름다움에서는 감동을 받는다.  색다른 아름다움은 일탈적 아름다움이며, 익숙한 아름다움은 일상적 아름다움이다.

남파랑길 85코스는 최고의 뷰, 세상에서 편안하고 아름다운 코스라는 생각이 내내 들었다. 눈에 익은 익숙한 풍경이면서 바라보면서 느끼는 이색적인 아름다움이 함께 있었다. 그래서 정겹고 편안했고 또한 가슴 뛰었다.

 

남파랑길 85코스(18.2km), 남파랑길 86코스 일부(3.0km) (총 21.2km)
<바다가보이는 집(조식) - 사내방조제 - 짜우락샘 - 오산마을 - 남창정류소(중식) - 완도대교 - 원동버스터미널(석식)>

11.25일 7시 30분 - 15시 (7시간 3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