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남파랑길

남파랑길32. 풍요로운 섬, 완도

완도 원동 버스터미널 부근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본격적인 완도 트레킹에 나섰다. 전날 다소 이른 시간에 트레킹을 종료했기에 충분히 휴식도 취했다. 아침식사는 기사식당에서 백반으로 해결했다.

바다에는 짙은 아침 해무가 끼었고, 하늘도 두터운 구름이 덮고 있었다. 바다 건너 해남땅은 형체만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흐릿했다. 멀리 보이는 섬들은 꿈틀꿈틀 귀여운 애벌레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뿌연 찜통 속 몽실몽실 찐빵처럼 보이기도 했다. 바닷물은 물려나 뻘밭이 넓게 형성돼 있었고, 방조제위에는 아침 고요만이 내려앉아 있었다. 풍경에서는 외롭고 쓸쓸함보다는 포근함이 느껴졌다. 방조제 위 풀들이 도드라지게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아침이라 그런가 싶어 살펴보니 다른 지역 풀에 비해 유난히 붉은빛이 더했다. 갯벌 붉은 염초처럼 소금기 많은 해풍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그런가 싶었다. 역시 붉은빛이 도는 논둑 저편 마을 언저리로는 아침 흰 연기가 나지막하게 깔려 퍼지고 있었다.

이틀간 꼬박 완도섬을 일주 트레킹할 예정이었다. 돌이켜 보니 완도는 보길도를 가고 청산도를 갈 때 잠시 경유지로서 들린 적은 있으나 본격적으로 여행을 한 적은 없었다. 그러기에 궁금함이 더 일어났는지도 모르겠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빠뜨리지 않고 유심히 관찰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냥 길가에 나란히 서있는 팽나무와 멀구슬나무도 신기하게 보였다. 5월, 봄이면 팽나무는 연초록 잎을 피워 여학생처럼 단정한 단발머리를 할 것이고, 멀구슬나무는 귀부인처럼 보라색 꽃으로 장식하고 향기마저 진하게 피울 것이다. 부자연스러울 것 같은 두 나무가 어떤 이색적인 풍경을 만들어낼지도 궁금했다.

'일반쓰레기는 소각 안 돼요. ㅠㅠ. 바다에 사는 생물 일동'
붉은 페인트로 쓴 바다생물들의 호소도 인상적이었다. 바닷물은 만조 때인지 어느새 발밑까지 다가와 있었다. 바닷물이 거의 길 높이까지 차 오른 바닷길 모퉁이를 돌아서니, 검은 햇볕차단 그물망으로 겹겹이 감싼 건물이 줄지어 있었다. 뭔가 궁금해서 기웃거려도 인기척은 없었고, 모터소리만 요란했다. 추측컨대 전복 치패생산 양식장 같았다.

신라 흥덕왕 3년(828년) 장보고는 서남해안의 중심지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적을 소탕했다.....
이후 한국과 중국, 일본을 연결하는 장대한 해상항로를 개척하였으며,
청해진을 본거지로 중국과 일본을 잇는 중계무역을 실시하였고,
이슬람 세계와도 교역한 아시아 최초의 민간 기업인이자 세계적인 무역왕이었다.

-완도 청해진 유적


장군샘에는 마을 아낙네들이 막 김장 배추절임을 끝내고 뒷 마무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통일신라시대 청해진이 설치된 이후 마을 주민과 병사 가족들의 식수와 빨레터로 사용되었던 샘이었다. 샘 맞은편 섬이 청해진이 있었던 장도라는 섬이었다. 섬은 나무데크로 만든 다리로 연결되어 있었다.

나무다리를 건너 제일 먼저 만난 안내문은 '목책'이었다. 1959년 9월 한반도를 강타한 태풍 사라 때, 갯벌 속에 묻혀 있던 목책이 드러났다고 했다. 그 목책을 탄소연대 측정한 결과 장보고가 활약했던 시기의 것으로 밝혀져 청해진 본영의 실체가 밝혀졌다고 했다. 아쉽게도 바닷물이 너무 차올라 목책 현장을 직접 볼 수는 없었다.

1991년부터 10년에 걸친 발굴결과를 토대로 출입문인 성문, 관측소인 고대, 토성 등이 복원되었다. 고대와 토성 위에 올라 보니 청해진은 완도의 또 다른 섬인 거문도와 신지도에 의해 완벽하게 감춰진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청해진은 중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무역 요충지이면서 자연재해와 해적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최적의 전략 요충지였다.

동백나무 숲 속에 사당이 있었다. 입구에는 출입을 막는 금줄이 쳐져 있었고, 관리가 잘 되어 있었다. 이곳 사당에는 장보고, 송징, 정년, 혜일 4분을 모시고 매년 정월 대보름에 당제를 올린다고 했다. 원래 이 사당에는 송징이란 사람을 주신으로 모셨는데, 30여 년 전 장보고를 연구한 사람이 장보고가 주신인데 엉뚱한 신을 주신으로 모셔왔다고 해 바꾸었다고 했다.

장보고는 신라 조정에서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리고 청해진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송징은 고려시대 몽골군에게 쫓긴 삼별초의 장수였는데, 그가 완도에 주둔하면서 주민들에게 선정을 베풀었고 주민들이 그를 잊지 못하고 신으로 모셨다는 설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장보고와 송징이 동일인물이라는 설도 있었다. 장보고 그리고 청해진은 기록에도 존재하는 찬란하고 아픈 역사적 사실이다. 하지만 완도는 공도정책으로 빈 섬이 되기도 했고 유배지로서 오랫동안 잊혔기에 역사적 사실과 민간에서 전해오는 설화 사이에 혼란이 발생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아담한 마을을 지나고 작은 포구를 지나 고개를 넘으니 신축 아파트공사가 한창이었다. 점심시간을 훌쩍 넘긴 오후 1시가 넘어 도착한 완도는 활기가 넘쳤다. 어판장을 지나자 거리에는 전복 직판장 그리고 전복 식당 간판이 즐비하게 걸려 있었다. 다른 지역에서는 쓸쓸하고 허전한 느낌이 들었었는데, 완도는 달랐다. 읍내뿐만 아니라 면지역에서도 집을 짓고 수리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기웃기웃 식당을 살피다가 생선구이 백반집에서 점심을 먹고, 숙소를 잡아 휴식을 취한 뒤, 빈 몸으로 다시 트레킹에 나섰다.
 
완도타워 전망대에 올랐다. 모노레일을 타고 갈 수도 있었지만 걸어서 올랐다. 완도항이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연안부두에는 제주도 가는 연락선이 정박해 있었고, 주도섬이 심장처럼 완도항 가운데 박혀 있었다. 상록활엽수가 잘 보존되어 있는 주도 섬은 식물생태연구에 중요한 가치가 있어 천년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는 곳이었다.

완도타워 뒤편으로는 '섬자리 숲길'이 조성되어 있었다. 해송 숲 사이로는 언뜻언뜻 바다가 보였고, 잔잔한 만에는 뗏목처럼 보이는 검은 물체가 줄지어 떠있었다. 마치 대피해 있는 작은 선박이거나 작전을 기다리는 작은 전선 같기도 했다. 이들은 전복 양식장이었다. 통영 앞바다 백색 굴 양식장과는 다른 흑색 바다 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전복 양식장은 해안을 따라 계속 검은 섬처럼 떠있었다.

해가 서편 바다로 떨어지자 어둠은 생각보다 빨리 온누리를 덮쳐왔다. 버스 정류장에서 완도항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렸지만 오지 않았다. 이미 노선버스는 떨어진 듯했다. 카카오택시로 콜을 불렸지만 대꾸하는 택시는 없었고, 인터넷 검색으로 찾은 택시회사 서너 군데 전화를 한 끝에 겨우 택시를 부를 수 있었다. 하마터면 1시간 이상 어둠 속에서 찻길을 걸을 뻔했다. 갑자기 얼큰한 해물잠뽕이 먹고 싶어 택시기사에게 부탁해 중국집 앞에서 내렸다. 좀 늦은 시간이었지만 중국집에는 제법 손님이 있었다. 해물이 듬뿍 들어간 짬뽕에 이과두주 1병을 시켜 여독을 풀었다. 완도의 밤거리는 음식점, 술집 등 불빛으로 밝았다. 완도는 풍요로운 곳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다음날 숲 속 임도를 따라 걸어 부꾸지라는 곳에서 산길로 접어들었다. 부꾸지는 해안경비대가 있었던 곳 같았으며, 산길은 경비대원들이 다녔던 참호가 아닌가 싶었다. 잎이 떨어진 나무 사이로는 푸른 바다가 넓게 펼쳐졌고, 여전히 검은 전복양식장이 둥둥 떠있었다. 갯내음이 묻어있는 아침 공기는 상큼했고, 바스락 낙엽 밟는 소리도 상쾌했다. 침입자가 나타났다고 짹짹거리는 새소리마저 반갑게 들려왔다. 낙엽활엽수와 상록활엽수가 적당히 어우러진 산길은 남도의 늦가을 풍경을 멋지게 연출하고 있었다.

구계등이란 바닷가에 도착했다. 몽글몽글한 몽돌이 제법 넓은 해변에 깔려 있었고, 느티나무 한그루가 잎을 모두 떨군 채 나목으로 서 있었다. 크고 작은 몽돌이 모여 아홉 개의 계단을 만들었다고 이름 붙여진 '구계등'은 아름다워 통일신라시대 황실의 녹원으로 지정되었다고 했다. 보길도 예송리, 울산 주전해변, 거제도 학동해변 등 많은 몽돌해변을 보았지만 이곳 구계등의 몽돌이 크기나 색깔면에서 단연 돋보였다. 느티나무는 2012년 태풍피해를 입어 수세가 많이 약화됐었는데, 뿌리에 황토를 덮어주고 수간주사를 주입하는 등 복원 노력을 한 결과 옛 모습을 많이 회복하였다고 했다.

몽돌해변 뒤편으로는 방풍림이 잘 보전되어 있었다. 300여 년 전에 조성된 숲으로 느티나무, 참나무, 개서어나무, 생달나무 등 온대림과 난대림이 함께 어우러진 독특한 숲이었다. 혼합림인 남해의 물건리 방풍림과 비슷했지만 그 규모나 수종의 다양성면에서 앞서는 것 같았다. 숲 속에는 자연관찰로가 잘 조성되어 있었고, 바다의 풍요와 재해 예방을 기원하는 할머니당이라는 사당이 숲 속에 신비롭게도 터를 잡고 있었다.

방풍림을 나와 나즈막한 산아래 마을을 돌아서자 완도의 진산인 상왕봉이 우람한 자태를 드려냈고, 그 아래로 넓은 들이 형성되어 있었다. 배산임수 양지바른 곳, 누가 봐도 사람살기 좋은 곳이라는 느낌이 들 것 같은 마을이었다. 들을 지나고 개울을 건너 마을로 들어가는 길은 마치 고향으로 들어가는 길처럼 아늑했다. 마을 기운을 보호하는 비보림처럼 보이는 작은 동산 숲을 지나자 화흥초등학교가 나타났다. 골프선수 최경주가 이 학교 출신이었고, 특이하게 졸업생에게 송아지 한 마리를 장학금으로 선물하는 전통이 있었다.

남파랑길은 화흥초등학교 오른편 옆길로 가다가 임도를 따라 올라 상왕봉으로 가도록 안내하고 있었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상왕봉을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고 싶었다. 며칠 평지만 걷다 보니 격하게 등산기분을 내고 싶었던 것 같았다. 화흥초등학교 앞을 지나 마을길로 접어들었다. 마을 끝, 등산로 입구에는 담장에 시비가 세워져 있고 대문에는 태극기가 꽂혀있는 시인의 집이 있었다.

이봉 삼봉 사봉에 오르다
섬들을 바라보면 저절로 힘이 솟구치리니
오봉산 지나 쉼봉, 상황봉에 오르면
그대는 천상의 사람

- 당신의 흔적(문정권)


등산로는 실개천처럼 또렷했다. 소나무 숲을 지나고, 동백나무 숲을 지나고, 소사나무 숲을 지났다. 심장 맥박소리가 코끝까지 거칠게 올라왔다. 산 능선에 올라와 보는 풍경은 힘든 만큼 상쾌하고 시원했다.


해발 644m, 상왕봉 정상.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거의 해발 제로에서 오르다 보니 북한산 오르기만 했다. 지친 탓인지 힘든다는 생각도 들었다. 상왕봉 정상에서는 사방이 눈에 다 들어왔다. 해남 땅끝마을 타워도 보였고, 강진 땅도 보였다. 완도의 여러 섬들도 보였고, 걸어온 청해진 장도 그리고 완도항도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정상 데크에서 한 참을 쉬다가 남파랑길 리본을 따라 전남완도수목원으로 내려왔다. 하산길은 상록활엽수가 빽빽이 자란 숲 속 임도였다. 하지만 가파른 시멘트 포장도로라 걷기에는 편하지 않았다.
 
두 종류의 나무가 눈길을 끌었다. 하나는 수목원 본관 앞에 있는 완도호랑가시나무였고, 또 하나는 수목원 진입로에 새빨간 작은 열매를 주저리주저리 달고 있는 이름도 이상한 이나무였다. 완도호랑가시나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목원, 천리포 수목원을 만든 민병갈(칼 밀러)원장이 완도에서 세계 최초로 발견하여 이름을 붙인 나무라고 했다.

 

오후 늦게 원동에 원점회귀해 돌아오니 고향 친구 3명이 남파랑길 마지막 여정을 함께 하기 위해  도착해 있었다. 반갑고 고마웠다. 오랜만의 만남을 그냥 보낼 수 없어 수소문 끝에 음식점을 찾아 아귀탕에 소주로 회포를 풀었다. 

 

남파랑길 86코스 일부(21.6km), 남파랑길 87코스(18.0km) 남파랑길 88코스(15.8km) (총 55.4km)
<원동(간편조식) - 남산리회관 - 청해진완도유적지 - 완도항(중식, 석식, 박, 조식) - 완도타워 - 부꾸지 - 구계동 - 화흥초등학교 - 심봉 - 쉼봉 - 상왕봉 - 완도수목원 - 원동(석식, 박, 조식)>

11.26일 7시 - 17시, 11.27일 7시간 30분 - 17시 (총 19시간 3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