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2.11. 토>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13시간, 지루한 비행 끝에 현지시간 오후 5시에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했다.
작년 말부터 프랑크푸르트에 근무하는 며느리에게 6살 손녀를 데려다주고 9주 동안 함께 살면서 정착을 돕기 위해서였다.
<2.18. 토> 안개, 흐림
독일에 온 지 일주일 째 되는 날 아침, 고맙게도 교포인 집주인으로 부터 등산을 가지 않겠냐고 연락이 왔다. 차를 타고 30분쯤 가서 등산을 시작했다. 등산로에는 활엽수 낙엽이 쌓여 있었는데, 대왕참나무 잎이 유난히 눈에 많이 띄었다. 손기정 선수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 금메달을 따고 기념으로 받은 화분의 나무가 대왕참나무다. 이 나무 화분으로 일장기를 가렸었다.
비가 조금 내리기 시작했고, 안개 자욱했고, 춥고 음산했다. 길에는 군데군데 얼음이 아직 남아 있었다. 안개에 잠긴 숲은 신비롭기까지 했다. 나무둥치에는 내 키높이만큼 녹색 스타킹을 신은 것처럼 이끼가 끼어 있었다. 아마 습한 날씨 탓인 듯했다. 거리는 약 4km, 산높이는 879m. 프랑크푸르트에서 제일 높은 산 beltberg 정상까지 올랐다.
최근 나무처럼 살자, 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나무는 주어진 환경에서 스스로 광합성을 하여 자기 생명을 유지하고, 산소를 배출하여 뭇 생명이 살 수 있도록 돕고, 죽어서도 만물의 토대가 되는 흙이 된다고 생각했다. 자기 자신에게 충실한 삶이 생태계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독일 산림전문가 페터 볼레벤이 쓴 '나무수업'이란 책을 보니 그렇지 않았다. 나무는 땅속 곰팡이 등 균류와 공동체를 구성하고, 광합성으로 생산한 당류의 최대 3분의 1까지 공동체에 제공한다고 했다. 그리하여 균류로부터 숲의 정보를 제공받고, 중금속을 여과하는 서비스도 받는다고 했다. 생태계에서는 독불장군처럼 살 수는 없는 것인가 보다.
<2,20. 월> 쾌청
오랜만에 맑고 푸른 하늘을 보았다. 창문으로 보는 일출광경도 아름다웠다. 푸른 하늘에 비행기들이 흰 구름을 만들며 마치 에어쇼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릴 때 논둑에서 메뚜기 잡으면서 본 비행기구름이었다. 공기가 맑아 볼 수 있는 신기한 풍경이었다.
손녀는 독일국제학교 첫 등교를 했다. 오빠와 언니들만 탄 셔틀버스를 보고 타지 않겠다고 떼를 써 엄마가 출근길에 데려다줬다.
오후 2시 30분부터 메인스트리트에서 가장행렬이 벌어진다고 해서 가보았다. 특이한 복장을 한 사람, 어린아이 손을 잡고 가는 가족들... 길에는 이미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다. 드디어 음악대가 먼저 지나가고 요란스러운 치장을 한 대형 트랙터가 서서히 다가왔다. 흥겨운 음악에 춤을 추고 맥주를 마시고, 어린이를 향해 사탕을 마구 뿌리면서 지나갔다. 축제 퍼레이드는 한참동안 이어졌다. 알고 보니 사순절을 앞둔 사육제 축제였다. 학교에서 돌아온 손녀에게 축제 사탕을 한 움큼 줬더니, 시큰둥했다.
<2.23. 목> 가는 비, 흐림
드디어 남파랑길 책 프롤로그를 썼다. 아내에게 보여주고 컨펌도 받았다. 그리고 책에 들어갈 내용도 확정했다. 이미 써 놓은 원고에 프롤로그, (에피소드 여행) 키르기스스탄 텐산산맥, (에필로그 1) 프랑크푸르트 9주 살기, (에필로그 2) 거제도 봄 여행, (부록) 트레킹 회차별 일정 등을 추가하기로 했다. '거제도 봄여행'은 한국에 돌아가서 쓰고, 원고 수정 등은 여기서 모두 완료할 참이다.
<2.25. 토> 새벽 비 온 후 맑음, 오후 흐리고 눈
가족들은 생활용품을 사기 위해 이케아에 가고 혼자 집에 남았다. 점심때가 훨씬 지나서 오겠다고 했다. 이국 객지에서 나 홀로 호젓한 시간을 갖게 된 셈이다.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꺼내 땅콩을 안주로 한중한閑中閑에 빠졌다. 유튜브로 '세노야' 노래를 듣고, 요즘 다시 뜨고 있는 영화 '헤어질 결심'의 주제곡 '안개'를 연속해서 들었다. 거실 통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에 멍하게 빠져 들었다. 유선형 구릉 숲 아래 마을 풍경은 꿈결 같았다.
저녁 때는 '쏠티와 함께' 어린이 뮤지컬을 보려 프랑크푸르트 한마음교회에 갔다. 다가올 4월 우리 부부가 떠난 후, 손녀를 케어하기로 한 분이 티켓을 구매해 초청했다. 손녀를 무척 귀여워했다. 손녀는 90분이 넘는 공연 내내 초롱초롱 재미있어했다. 아내는 아들과 함께 본 뮤지컬을 30년 지나 손녀와 함께 보게 되었다며, 감동했다.
<3.6. 월> 흐리고 비오고 흐림
지난해 12월 중순에 한국에서 부친 이삿짐이 이제서야 왔다. 지난 3월 1일 임시로 거주하던 Kelkheim에서 Liederbach로 이사를 왔지만 이삿짐은 오지 않아 불편한 며칠을 보냈었다. 며느리는 아침부터 이것저것 챙기느라 분주했다. 살집은 3, 4층 복층집인데, 어이없게도 복층 계단으로 침대 매트리스를 옮길 수 없어 방배치 계획이 완전 뒤틀렸다.
우여곡절 끝에 이삿짐 나르기가 끝났다. 대머리에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이삿짐 팀장은 언제까지 살 계획이냐고 물으면서 5년 후면 정년이니 그 안에 도울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부럽게도 독일은 정년이 67세라고 했다.
<3.11. 토> 맑고 청정
독일 며느리집에 온 지 한 달째 되는 날. 사진 몇 컷을 페이스북에 올렸더니 아들집이 아니고 며느님집이냐고 의아해하는 댓글이 달렸다.
그리고 비로소 와이파이와 인터넷이 연결되었다. 이사 온 지 10일 만이다. 한국에서는 이사당일에 연결됐을 터인데 속 터지게 늦었다. 독일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일중 하나가 남파랑길 원고 쓰기와 교정이었는데, 답답하고 멍하고... 폐인이 된 듯했다. 그런데 일요일 교회에서 만난 분에게 얘기했더니, 보통 3개월은 기다려야 하는데 능력 좋은 며느님이라고 오히려 칭찬했다.
<3.15. 수> 함박눈 오고 맑았다 흐렸다 맑음
일주일째 흐리고 비 오고, 오늘 아침에는 함박눈까지 내렸다. 독일은 지금이 우기인 거 같다. 낮에는 개인다는 일기예보를 믿고 기차를 타고 프랑크푸르트 시내로 갔다. 동네 리더바흐역은 시골 간이역 같았다. 역무원은 한 명도 없고, 역사도 없고, 기차표 자동판매기만 비가림 휴게소안에 있었다. 승객도 몇 명 안 되었다.
혼자 좌석을 차지하고 차창밖 스쳐 지나는 풍경을 구경하며 20분쯤 가니, 종착역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에 도착했다. 다양한 인종들로 붐볐다. 우선 화장실을 찾았더니, 1유로를 내야 들어갈 수 있었다.
카이저 거리를 지나 뢰머광장으로 갔다. 학생들을 인솔한 선생님이 열심히 설명을 하고 있었다. 뢰머광장은 프랑크푸르트 중심 상징 광장이었다. 주변에 공원, 괴테 기념관, 성당, 금융가 그리고 라인강의 지류인 마인강이 바로 옆으로 흐르고 있었다. 마인강은 흙탕물이 홍수처럼 유유히 흐르고 유람선과 화물선이 떠 있었다. 다리 위에서 잠시 스쳐 지나가는 비를 맞기도 했다.
광장에는 산수유, 벚꽃이 피고 목련이 꽃망울을 맺고 있었다. 하지만 화사하지 않았다. 우리의 봄은 새신부처럼 화사하게 오는데, 이곳 봄은 새악시처럼 부끄럽게 오는 것 같기도 했다.
<3.19. 일> 흐림
온 가족이 한인교회, 한마음교회에 갔다. 3주 전, 손녀 방과 후 케어를 하기로 한 분의 초청으로 뮤지컬 '솔티와 함께'를 본 것이 계기가 되었다. 가기 싫다고 떼를 쓰던 손녀는 또래의 친구를 4명이나 사궜다고 신나 했다.
'VISION OF DIASPORA'
한마음교회는 프랑크푸르트에 살고 있는 한국인의 신앙 구심체 역할을 하고, 나아가 유럽에 거주하는 한국교회의 디아스포라 플랫폼이 되겠다는 비전을 갖고 있었다. 프랑크푸르트에는 한국인이 5만 명이나 살고 있으며, 유럽에는 한인교회가 300여 개 된다고 한다. 독실한 신자인 아내는 설교를 듣고 많은 위안을 얻는 듯했다.
만나는 한국 사람마다 산마늘, 명이 나물이 많다는 얘기를 했다. 정말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공원 숲 바닥이 온통 초록 명이 나물 밭이었다. 말마따나 명이가 지천으로 깔려있었다. 온 가족이 날을 잡아 명이를 뜯어와 식초장에 담았더니 돼지고기 수육에 최고였다.
<3.26. 일> 흐림, 쾌청, 소낙비, 우박 후 맑고 무지개
며칠 전 카톡에 남파랑길 봄 여행 3박 4일 계획을 올렸더니 7명이 동행하겠다고 했다.
한국에 돌아가 뭘 할까.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지난해 몽땅 스킵했던 남파랑길 거제 구간을 어떻게 할까였다. 궁리 끝에 친구들과 함께 즐기면서 거제도 봄산과 바다를 여행하기로 마음먹고 올렸던 것이었다. 이왕이면 한려수도 봄바다를 제대로 즐기자는 생각에 매물도와 소매물도를 여행 계획에 포함시켰다. 몽돌해변, 산, 케이블카 그리고 바다와 섬. 여행 계획을 짜고 보니 봄바다 여행으로는 최고의 코스가 아니겠나 싶었다.
프랑크푸르트 9주 살기 중 6주가 지났고, 어느새 3주만 남았다. 긴 시간을 어떻게 보내지, 걱정했었는데 이젠 끝이 보이는 것 같다. 여기 생활은 대체로 단순하고 규칙적이다. 새벽에 일어나 원고를 쓰고, 오전에 아내와 마트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마을과 들판을 산책하고, 오후에 손녀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같이 놀아주고... 요즘 포켓몬에 빠진 손녀는 포켓몬 캐릭터 퀴즈놀이를 하자고 졸라대고, 심심하면 비장의 무기 놀이를 하자고 한다. 손녀는 부채를 들고 나는 실내화를 들고 거실에서 한바탕 소동을 피우고 난 뒤 저녁을 먹는다.
얼마 전까지는 봄장마처럼 매일 흐리고 비가 오더니, 요즘은 하루에도 몇 번씩 날씨가 바뀐다. 겨울날씨와 봄날씨 힘겨루기 대치가 팽팽한 것 같다. 오늘은 흐렸다가 쾌청했다가 갑자기 우박이 떨어졌다가 오후 늦게는 쌍무지개까지 떴다. 봄 날씨는 종잡을 수 없다지만, 여기 날씨는 그 정도가 너무 심하다.
<4. 3. 월> 맑고 바람불고 쌀쌀
드디어 남파랑길 원고 1차 탈고를 했다. 나의 프랑크푸르트 9주 살기의 서브 미션이 완성되었다. 새로운 글을 쓰고, 이왕 써놓은 글을 교정하고, 여행 일정을 정리해서 기록하는 일은 당초 생각했던 것보다 만만찮았다. 새로운 글을 쓰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원고를 교정하는 작업은 마치 모래성을 다듬는 것처럼 하고 또 해도 뭔가 허전했다.
출판사에 전화 연락을 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나홀로 산책길에 나섰다.
넓은 들판을 지나고 리드바흐 개울을 따라 내려갔다. 3월 초 처음 왔을 때는 땅에 바짝 붙어있던 보리는 한 뼘 정도 파랗게 자랐고, 청명한 하늘에는 종달이도 찌르찌르 찌르르∼ 노래하고 있었다. 낮은 울타리에는 노란 개나리꽃이, 초록의 정원에는 노오란 수선화가 상큼하게 피어 있었다. 봄비에 불어난 리드바흐 개울도 철철 기운차게 봄이 왔음을 노래했고, 연록의 수양버들 가지는 차가운 봄바람에도 살랑살랑 춤추고 있었다.
지난 일요일 본 라인강은 강변까지 누런 물이 차올랐었고, 경사지 언덕 끝없는 리슬링포도밭은 초록 봄 빛으로 물들고 있었었다.
<4. 7∼ 10> 부활절 연휴 여행
부활절 연휴를 맞아 독일 알프스로 3박 4일 여행을 떠났다. 열흘 후, 귀국을 앞두고 마지막 추억 만들기 여행인 셈이었다. 학교간지 2달째인 손녀가 친구가 프랑스 파리 여행 간다는데, 우리는 한국에 가자고 졸라대기도 했었다. 여기는 부활절 연휴에 여행을 가는 것이 연례행사인 것 같다.
가는 길에 울름Ulm이라는 도시에서 1박을 했다. 중세 때부터 도나우 강변에 번성했던 도시로 옛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아인슈타인 출생지였다. 봄비가 제법 줄기차게 내리는 저녁 사람들 행렬에 끼어 걸어갔더니 부활절행사를 하고 있었다. 다음날 성당과 시내 관광에 나섰다. 울름 성당은 높이 161m, 768 개 계단. 세계에서 가장 높은 성당이었다.
오스트리아와 독일 국경을 넘나들어 오후에 독일 알프스 아이브제 호수에 도착했다. 날씨는 변덕을 부려 진눈깨비가 제법 차갑게 내렸다. 다행히 다음날은 날이 맑았다. 작은 호숫가에 자리 잡은 호텔은 동화 속 그림 같았다. 일찍 아침을 먹고 산악열차를 타고 케이블카를 갈아 타고 츄크스피체 정상에 올랐다. 해발 2,962m, 독일에서 제일 높은 산이다. 바로 지척 정상에는 눈이 쌓여 갈 수 없었고, 보기만 했다. 산 정상에 황금십자가가 꽂혀 있었다. 아이브제 호수는 해발 973m 높이에 있었고, 호수 산책로는 7km였다. 평탄한 산책로에는 다정한 남녀 연인, 유모차를 끌고 가는 젊은 부부, 개와 함께 산책하는 가족... 눈 덮인 산 그리고 거울 같은 호수를 바라보며 걷는 울창한 숲길 산책로는 너무 좋았다.
꿈같은 3박 4일을 보냈다. 멋진 음식점에서 정통 독일 맥주를 마시며 슈바인스학세, 돼지족발 요리도 먹었다. 손녀와 끝말잇기, 퀴즈 맞추기를 하며 티격태격하기도 했다.
돌아오는 날은 쾌청, 얄밉게도 너무 날씨가 좋았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은 너무나 목가적이었다. 산악지대를 벗어나자 평탄한 들판이 계속 이어졌다. 들에는 어느새 봄기운이 완연해졌고, 초록의 풀밭에는 노란 민들레꽃이 카펫을 깔아 놓은 듯 피어 있었다. 참 아름답고, 참 부러웠다. 그런데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오는 5시간 내내 비슷한 풍경이 계속 이어졌다.
이번 여행 내내, 며느리는 운전을 하고 음식점을 예약하고... 수고를 많이 했다. 덕분에 추억에 남을 멋진 여행을 편하게 했다.
<4.12. 수> 봄비 주룩주룩
나흘 후면 한국으로 돌아간다. 프랑크푸르트 9주 살기가 드디어 끝난다.
며느리는 혼자서 직장에 다니고 손녀도 키워야 한다. 형편상 당분간 힘든 워킹맘으로 살아야 한다.
떠나기 전 뭘 할까, 배추 11 포기를 사서 한국식 김치를 담았다.
아내는 손녀를 보고 집안일을 하고 힘들었지만 보람 있었고, 떠날 것을 생각하니 안쓰럽다고 했다.
나는 남파랑길 원고를 쓰고 다듬고, 가족과 함께 이곳저곳 독일 여행까지 알차게 했다.
평소 많이 겉돌았던 내게 가족이란 말이 특별하게 다가온 9주였다.
아내와 나는, 매일
한 방에서 같이 자고
한 식탁에서 같이 밥을 먹고
가끔, 같이 산책을 나가고
마트도 같이 간다
손녀와 놀 때도
같이 놀아야 한다
이건 횡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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