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8일 오전 7시 40분, 다테야마 역에 도착했다.
하늘은 잔뜩 흐렸고, 이슬비가 간간히 내리고 있었다. 역 앞 공원에는 계수나무, 일본칠엽수, 느티나무...눈에 익은 나무들이 막 초록의 옷을 벗고 저마다의 색깔로 가을치장 채비를 하고 있었다. 계수나무와 일본칠엽수는 요즘 우리나라 아파트 정원수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인데, 이들의 원래 고향은 일본이다. 내가 사는 아파트에는 계수나무길이 있고, 요즘 이 길을 지날 때면 향기로운 솜사탕냄새가 은은하게 풍긴다. 이곳 계수나무도 향기가 좋을까, 떨어진 계수나뭇잎을 주워 손으로 비벼 맡아봤더니 의아하게도 향기가 나지 않았다.
궂은 날씨임에도 역 대합실에는 벌써 탑승객이 제법 길게 줄을 서있었다. 다테야마역은 다테야마 트레킹, 구로베알펜루트 여행 관문이다. 해발 475m 다테야마역에서 해발 977m 비조다이라까지는 케이블카를 타고, 또 해발 2,450m 무로도고원까지는 고원버스를 타고 약 1시간정도 올라간다.
"아름다운 스기나무여! 그대에게 마음이 있다면, 나의 이 간절한 기원을 들어주세요."
비조다이라美女平에는 먼 옛날 다테야마를 개척한 사에키佐伯를 사랑한 여인이 스기나무에 간절히 기도한 후 소원이 이루어졌고, 그 스기나무는 비조스기美女杉로 불리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었다.
울창한 스기나무 숲을 지나고, 푸른 숲 너머로 흰눈이 쌓인 산봉우리를 바라보면서 고원버스 전용도로를 지나 2,450m 무로도고원室堂高原에 도착했다. 제법 눈이 쌓여 있었고, 바람은 겨울처럼 차가웠고, 흐린 하늘에는 눈발도 간간히 흩날리고 있었다.
멀리 다테야마연봉은 온통 눈에 쌓여 있었다. 10월 초순에 눈이 이렇게 쌓여 있다니! 기상이변이었다. 그 모습에 감탄과 걱정이 교차하였다.
다테야마연봉을 담고 있는 아름다운 미쿠리호수를 지나 2박3일동안 머무를 라이쵸雷鳥산장에 도착했다. 진한 유황냄새가 코를 자극했고, 속도 약간 매시꺼웠다. 이런 날씨에는 계획대로 트레킹을 하는 것도 어려울 듯 했다. 다음날부터는 날씨가 더 나빠진다고 하니 계획 수정은 불가피할 듯 했다.
점심을 먹고 본격적인 트레킹에 나섰다. 결국 일정을 수정했다. 3일차 일정을 당겨하고 나머지 일정은 날씨를 봐서 진행하기로 했다. 당초 1일차는 워밍업겸 좀 쉬운 코스를 트레킹할 참이었는데, 그래도 날씨가 좀 나을 때 핵심 코스를 다녀오기 위해 변경한 것이었다.
해발 2,831m 조도산淨土山가는 길에는 눈이 발목까지 쌓여있었다. 고도차 400m 정도였지만 아이젠을 차고 힘겹게 올랐다. 조도산 정상은 겨울왕국이었다. 바위며 전망대에는 상고대가 날까로운 표창처럼 꽂혀있었다. 날씨가 좋으면 웅장한 기타알프스 연봉과 또하나의 기타알프스의 상징산 야리가다케槍ケ岳까지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짙은 구름에 가려 아쉬움이 컸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기다렸더니 고맙게도 앞 산 일부분만 구름속에서 살짝 얼굴을 내밀었다.
일본 기타알프스에서 가장 높은 산은 오쿠호다카다케奧穗高岳(3,190m)이지만 상징산은 야리가다케槍ヶ岳(3,180m), 다테야마立山, 쯔루기다케劍岳(2,999m)이다. 산세가 남북으로 마치 방패(立)를 사이에 두고 창(槍)과 칼(劒)이 겨루는 형상을 하고 있다. 다테야마立山라는 이름의 산은 없고 오야마雄山(3,003m), 오난지야마大汝山(3,015m), 후지노오리다테富士ノ折立(2,999) 세 연봉을 통칭하는 이름이다.
2일차 아침 7시 30분, 오야마雄山 정상을 향해 출발했다. 비가 제법 주룩주룩 내렸고, 바람도 어제 보다 세찼다. 다행히 기온은 영상이었다. 그래도 아이젠을 차고, 판초우의를 입고, 스패츠를 차고, 스틱을 들고... 중무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테야마 연봉을 오르겠다는 일념은 악천후에도 식지 않았다. 또 언제 이곳에 오겠는가. 일행 대부분은 가이드가 혹시 트레킹을 취소할까봐, 오히러 걱정하는 눈치였다.
일행은 오르막길에서 한 줄로 길게 늘어졌다. 고개를 떨구고 거친 숨소리와 스틱소리를 들으며 걸었다. 풍경을 구경할 여유는 이미 사라졌다. 인내하고 인내하는 나와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고개들어 눈 앞 풍경을 보지 않고 걷게 되자 귀가 열리기 시작했다. 경사진 개울에는 내린 비와 눈 녹은 물이 콸콸콸콸, 판초우의 어깨쭉지에는 빗방울이 뚜둑뚜둑, 귀의 청신경이 살아났다. 숨이 차 약간 벌어진 입 혀끝으로는 알싸한 공기맛도 느껴졌다. 인고속에 느껴지는 내 몸과 자연의 교감 희열이었다.
9시에 2,700m 이치노고시산장一ノ越山莊에 도착했다. 당초 계획은 다테야마 3개 연봉을 완주할 참이었지만 날씨가 계속 나빠 첫째 봉우리 오야마雄山에만 오르고 하산하기로 했다. 그리고 일행중 일부는 정상 도전을 포기하고 하산하기로 결정했다. 따뜻한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정상에 오를 단도리를 꼼꼼히 한 후, 다시 눈앞을 가로막고 우뚝 솟아있는 가파른 능선길에 달라 붙었다.
능선길은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 보이지 않는 돌 너덜길이었다. 단지 오르막길은 붉은색, 내리막길은 노란색 페인트로 화살 표시가 돼 있었다. 안개가 시야를 가리고 바람마저 제법 강하게 불어 붉은 화살표시만 보고 오르고 올랐다. 숨을 헐떡거리며 가파른 벼랑을 넘어서자 볼품없는 꼬마 신사神社가 눈에 띄었다. 마치 우리나라 산길 고개에서 흔히 보는 성황 돌무더기 같았다. 누가 간절한 마음을 담아 모셨는지? 인간 본성에 있는 원초적 신앙심이 이런데서 일어나는게 아닌가 싶었다.
10시 30분, 드디어 해발 3,003m 오야마 雄山정상에 올랐다. 3시간 남짓 등산이었는데, 날씨 탓인지 고도 탓인지 너무나 힘들었다. 정상에는 제법 규모가 큰 신사가 자리잡고 있었다. 관리소도 있었지만 날씨탓인지 관리인은 없었다. 신사입장료는 700엔이었다. 영산靈山다운 정상 모습이었다. 일본의 3대 영산靈山은 후지산富士山, 다테야마立山, 하쿠산白山이다.
악천후 탓인지 정상에는 우리 일행 뿐이었다.
하산후 건조실에 젖은 신발, 판초우의, 배낭을 널어놓고 온천탕에 몸을 푹 녹이고, 느긋하게 시원한 맥주를 마시면서 하산의 여유를 만끽했다.
3일차 아침, 전날보다 빗줄기는 세찼고 바람도 세차졌다. 트레킹 일정을 취소하고 하산하기로 결정했다. 가이드말로는 10월초 이렇게 눈오고 비오는 날씨는 지난 몇년동안 경험한 적이 없다고 했다. 악천후 속에 이정도 트레킹한 것만 해도 다행이다 싶었다. 책임감 강한 가이드 덕분이 아닌가 싶고 고마웠다.
이번 트레킹에서는 일본에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는 뇌조雷鳥 무리를 많이 봤다. 울음소리가 천둥소리를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닭처럼 잘 날지 못하고 뒤뚱뒤뚱 걸었다. 또 무로도고원 트레킹 길옆으로는 몇몇 식물들이 눈에 띄었다. 눈잣나무, 버드나무, 마가목, 만병초, 시로미, 스노베리... 이들 나무 대부분은 우리나라 산에서도 볼 수 있다. 눈잣나무는 설악산 중청봉에서 대청봉에 이르는 능선길에서, 마가목은 울릉도 성인봉에서, 시로미는 한라산 윗세오름 가는 길 개울가에서 자주 눈에 뛴다. 만병초는 본적이 없어 돈나무로 오해를 했었는데, 몸에 좋은 약초로 소문이 나서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사라졌다고 한다.
1994년 8월, 일본 노린추킨農林中金에 파견근무할 때 일본 친구들과 3박4일 기타알프스 등산을 간 적이 있다. 벌써 30년이나 지난 일이다. 나가부사온센中房溫川에서 엔잔소燕山莊를 거쳐 야리가다케槍ヶ岳 정상에 올랐다가 가미코지上高地로 하산했었다. 그때 그 친구들이 언제 기회되면 다테야마立山를 꼭 한번 가보라고 했었다. 그때 그 친구들의 말이 마음속 깊이 남았었는데, 드디어 실행하게 된 것이다. 일본 친구들 다무라田村 기하라木原 가네코金子 후루이古井 모두 그립다. 골드 미쓰 두사람은 나에게 참 야사시이やさしい 했었는데...
도야마富山시내에 있는 일본 전통 음식점에 들려 점심을 사치스럽게 먹었다.
송어스시ますのすし집인데, 꼭꼭 눌려서 만든다고 해서 오스노스시おすのすし라고도 한다고 했다. 이 음식점은 에키벤驛弁집으로 시작해서 도야마 명물 오미야게土産집으로 크게 성공한 음식점이었다.
아래 여러지역 에키벤 표장지 디자인이 아름답고 이채롭다.
나고야 가는 길에 구조郡上라는 조카마치城下村에 들렸다. 옛 모습이 남아있는 조용한 마을이었다. 일본 전국시대 작은 번의 성 아래마을이었는데, 치요千代의 출생지라는 안내글이 눈에 띄었다. 뭔가 하고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작은 번의 영주였던 남편을 잘 내조해 큰 번의 영주로 출세시킨 여자였다. 일본판 평강공주, 내조의 여왕이었다.
길이와 무게는 잴 수 있어도 삶은 재볼 수 없다.
남자 5명이 한 방에 2박 3일을 있으면서 많은 대화가 있었다.
결혼, 출산 등 현대 젊은이들이 고민하고 있는 답이 없는 문제들wild problems에 대한 좋은 책이 있어 소개했었다. 과거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전통과 풍습에 따라 자연스레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개인의 자유가 증가하면서 스스로 결정해야 할 어려운 문제가 되었다. 나도 아직 책을 다 읽지는 않아 어떤 명쾌한 답이 있는지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애벌레가 나비가 된 후의 일을 고민하는 것은 쓸데없는 고민일 것이다.
그리고 자연스레 내가 쓴 책 '남파랑길'도 얘기했었다.
트레킹 여행 마지막 날 아침 8시 30분, 나고야 성에 갔었다. 30분을 기다리니 북소리와 함께 개문을 알리는 우령찬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들리고 출입문이 열렸다. 나고야 성은 한 창 수리중이었다. 천수각은 들어 갈 수 없었고, 정원을 한 바뀌돌고 나왔다.
이번 트레킹 여행에는 학교 선배 3분을 만났다. 두분은 고등학교 4년 선배이고, 한 분은 대학 2년 선배이다.
대학 선배는 나의 책 '남파랑길'을 성심껏 읽어 주신 분으로 대학교수 정년퇴임 후, 독서 음악감상 사진찍기 등산... 즐겁게 사시는 분이다. 고등학교 선배는 처음 뵙는 분들인데, 한 분은 대기업 정년퇴직하셨고 한 분은 아직 사업체를 경영하고 계셨다. 두분은 함께 등산여행을 즐기기 시작한 것 같았다. 두분 아이스크림을 먹는 모습은 너무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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