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 많은 조합장
내가 부임한 첫날, 지방지 기자가 찾아 왔다. 백발의 혈색 좋은 얼굴에 높은 도수안경을 낀 그 기자는 의례적인 인사를 마치고 대뜸 지부장이 조합장 부정선거를 고발해 달라는 요구를 했다. 아직 관내 사정도 파악되지 않는 상태에서 뭐라고 답변할 수 없어 사정을 알아보고 조치하겠다고 돌려보냈는데 신고식 한번 걸죽하게 치르는게 아닌가 싶었다.
내용인즉 현직 조합장에 도전하는 후보자가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광고를 하여 사전선거운동을 했고, 또 자기를 매수하려고 돈을 건넸다는 것이다.
대처하기 참으로 곤란했지만 이럭저럭 선거를 마치게 되었고, 그 기자가 상주하다시피 후보자를 감시한 덕분인지 그 외 불상사는 없었고 현직 조합장이 근소한 표차로 당선되었다. 현직 조합장이 당선된 일등 공신은 그 기자가 된 셈이었다.
하동에는 회원농협 10개, 회원축협 1개 총 11개 조합이 있는데 10개 회원농협에서 지난해 말부터 금년 2월에 걸쳐 조합장 선거를 했다. 그 결과 6개 조합에서 초선 조합장이 당선되었다. 타지역에 비해 현직의 당선 비율이 떨어졌다. 그리고 그만큼 조합장 선거도 치열했었고 그 후유증도 오래 남았다.
선거관련 소송은 1개 조합에서 제기되었고, 또 3개 조합에서는 선거와 무관치 않은 고발 건으로 검찰 수사를 받았다. 해당 조합장은 수사와 재판에 오랫동안 시달려야 했고, 조합장 선거에 대한 지역 여론도 자연히 나쁜 쪽으로 형성되었다.
결국 조합장 1명은 중도 사퇴하고, 그나마 다행히 1명은 2심에서 100만원 미만의 벌금형을 받고 조합장직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고, 또 1명은 영장실질심사에서 기각되었고, 나머지 1명은 검찰 기소 중지되었다.
초선 조합장이 숫적으로 많다 보니 조합장협의회운영도 초기에는 난항을 겪었다. 다선 조합장들은 당연히 다선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초선 조합장들은 자신들의 의사를 대변해줄 수 있도록 배려되어야 한다고 은연중에 내비쳤다.
지부장인 나로서도 선뜻 어느쪽의 뜻을 따를 수 없어 회의진행을 지켜 볼 수 밖에 없었는데 결국 다선조합장 1명이 대의원과 조합장협의회장, 초선조합장 1명이 대의원과 인사위원회장직을 맡게 되었다. 일부 조합장은 지부장이 중간에서 교통정리를 해주지 않음을 서운하게 생각했고 이런 섭섭함은 상당기간 계속되었다.
지부장이 권위를 내세우던 시절은 지난 것 같다. 그러다 보면 대화 자체가 막혀 버릴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한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나보다 연배가 높다는 것이 다행이다 싶었다. 나를 낮추는데 어색함이 덜하고 서운한 감정 또한 덜 느낄 수 있으니.
조합장들과 관계 유지는 미묘한 점이 많다. 작은 것에도 소홀할 경우 관계가 소원해지기 십상이다. 조합장들은 하고싶은 얘기가 있어도 직설적으로 하기 보다는 돌려서 하는 경우가 많다. 지부장 요즘 너무 열심히 일합니다라는 말은 인사말이 아니라 군지부 때문에 조합 사업이 어렵다는 말로 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