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 무시무시하기 이를 데 없는 기독교인 색출법인 후미에는 도입된 연대가 1614년, 1628년, 1631년 설 등 다양하지만 나가사키의 관리 미즈노 카와치노가미에 의해 고안되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정말 기가 막힌 사실은 원래는 이 후미에가 되도록 많은 기리시탄(기독교인을 일컫는 일본어)을 살려줄 요량으로 도입했다는 것이지요. 그까짓 그림판, 동판 하나 밟고 지나가면 어떠냐, 그냥 눈 딱 감고 한번 밟고 목숨들 건져라 이런 의도였지요.
(그래서 영화 <사일런스>에서도 관리들이 성도들에게 후미에를 강요하면서 “너희들이 마음까지 배교했는지 여부는 관심 없다. 일단 형식적으로만 밟아라. 그러면 살려주마.”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디 크리스천들 마음이 그렇습니까?
공식적인 후미에의 첫 데뷔는 1631년 운젠지옥 고문 때였습니다. 운젠 지역은 뜨거운 유황온천으로 유명했는데 그 온천을 고문도구로 활용했던 것입니다. 뜨거운 온천수에 몸을 집어넣었다가 빼내고, 등에 상처를 낸 채 온천에 들이밀고, 구멍 뚫린 국자로 온천수를 떠다가 몸에 조금씩 뿌리며, 의사까지 배치하여 적당히 치료까지 해가면서 실로 잔악한 고문을 하였습니다. 부모님 앞에서 아이를 온천 열탕에 집어던지는 것은 물론이고....
유황온천 고문을 받던 와중에 탈진하여 쓰러진 갈바리오 신부에게 관리들이 성상을 가져와 밟으라고 강요했고 신부는 열탕으로 인해 중화상을 입어 피범벅이 된 발을 보며 <그걸 밟느니 차라리 발을 잘라버리겠다>고 소리칩니다.
그것이 후미에의 첫 시작이었고 이때부터 불과 4년 후인 1635년까지 후미에를 거부하고 온몸으로 신앙을 고백하며 순교의 길을 걸어간 기리시탄의 숫자는 28만명이었습니다.
경악스럽기까지 한 일본 크리스천, 일명 기리시탄들의 시련에 어안이 벙벙했던 것도 잠시... 저는 이내 관심을 접고 한동안 잊어버렸습니다. 그들에 대한 관심이 다시 살아난 것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습니다.
(사무라이 스피리츠라고 하는 대전액션형 게임입니다. 칼을 든 사무라이들이 일대일로 결투를 벌이는 게임으로 국내 오락실에서도 인기가 높았습니다. 흔히 <사무라이 쇼다운>으로 알고 있는 분들이 많은데 원 제목은 <사무라이 스피리츠>입니다.)
모처럼 새로 다운받은 게임을 하다가 어릴 때는 그저 게임 캐릭터인 줄만 알았던 주인공들이 다시 보니 더러는 역사상의 실제 인물들인 것을 알고 느낌이 새로웠습니다. 애꾸눈 무사 쥬베이와 닌자 하토리 한조 등 실제 인물들이 섞여 있어 각별히 재미를 더하였는데 혹시나 이 게임의 최종 보스 캐릭터도 실제 인물인지 궁금증이 생겨났습니다.
(호옹이? 슨상님 살아계실 적엔 이런 사람 없었는디?)
저 최종 보스 <아마쿠사 시로 도키사다>의 특기가 무려 성서 암송.... (다른 책에서는 아예 성경 읽기 라고...)
대체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이기에 최종 보스에다가 무려 특기가 성경 읽기라니요... 그것도 일본 사무라이를 소재로 한 게임에서 말이죠. 호기심이 무럭무럭 차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현존하는 유일한 그의 초상화입니다. 사실 그는 죽을 때까지도 얼굴이 알려져 있지 않았기에 상상하여 그린 이미지입니다.)
전국시대 무렵에 가톨릭이 전래된 이래 일본은 기독교(- 엄밀히 말하면 가톨릭)에 대해 관대한 나라였습니다. 일본 최고의 무장이자 전국시대를 제패한 영웅 오다 노부나가부터 선교사들을 받아들여 그들을 매개로 서양식 무기를 도입해 패권을 잡았고 도움을 받는 터라 선교사들이 전도를 하고 휘하의 백성들이나 장수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서도 그런가 보다 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나날이 기리시탄은 늘어났고 백성들만이 아니라 다이묘(영주)들과 사무라이들 중에서도 믿는 사람이 늘어갔는데 대표적인 예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심복 장수이자 조일전쟁 때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의 선봉장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를 들 수 있습니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 묘사된 고니시의 군대)
(기리시탄 사무라이들의 모습입니다.)
조일 7년 전쟁, 일명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공한 일본군 약 16만명 중 기리시탄이 5만명이 넘었고 그들을 위한 군종신부까지 있었을 만치 교회는 일본에 뿌리를 잘 내렸습니다. 비록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87년에 선교사 추방령을 내리기는 했지만 아직까지는 평탄하게 신앙이 이어져 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1597년 2월 5일에 처음으로 선교사 26명이 순교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기리시탄들에게 먹구름이 다가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6년 후 1603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집권하였고 마침내 1614년, 공식적인 기독교 박해령인 <금교령>이 선포됩니다. 이것이 기리시탄들의 뼈아픈 역사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포상금 제도는 무려 1873년까지 이어졌습니다.)
이러니 기리시탄들의 신앙생활에는 애로사항이 꽃피는 정도가 아니라 만개하였고 감시가 용이하도록 각 주택의 담벼락도 없애고 마을 단위로 촌민들이 해당 마을의 절에 신자로 등록하고 정기적으로 예불을 드리게 함으로 승려를 일종의 <종교 경찰>로 활용하기도 하였습니다.
(대부분의 기리시탄들이 서구와 교역이 활발했던 규슈 일대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선교사가 들어오기 용이했고 유럽 상인들을 통해 성경과 성물을 들여오기도 쉬운 터라 교역의 중심지였던 나가사키를 중심으로 교세가 뿌리내리고 있었습니다.)
(순교하는 사제들과 성도들의 모습...)
(도쿠가와 막부는 무려 12만 대군을 파병하여 진압하려 하였습니다. 임진왜란에 출전한 군대가 16만명이었으니 이 전쟁 또한 실로 거대한 한판이었습니다.)
이 와중에 기리시탄 史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포르투갈 출신의 선교사 <크리스토방 페레이라> 신부입니다. 1580년생인 페레이라 신부는 아직은 기리시탄의 마지막 황금기였던 1609년에 일본 선교사로 파송되어 1633년까지 일본 교구장이자 선교단의 수장으로 사역하였습니다.
불과 2년여 후인 1633년 10월에 페레이라 신부는 체포되었고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고문을 당하게 됩니다.
(운젠지옥 온천에서 물고문도 당하고....)
(결국은 구멍 매달기 고문에 손을 들어 버립니다.)
다섯 시간에 걸친 <구멍 매달기 고문> 끝에 배교한 페레이라 신부는 이후 선불교로 개종하고 이름까지 <사와노 추안>으로 바꾸어 일본인이 되었으며 일본 여성과 결혼함으로 신부 자리도 내던졌고 1636년에 배교서인 <현의록>을 집필하여 창조론과 천국, 지옥, 원죄, 죄씻음, 삼위일체, 예수님의 부활과 최후 심판 등을 모조리 부정해 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1650년에 70세로 나가사키에서 사망할 때까지 그의 주 임무는 천문학과 의학 서적을 번역하는 것과 함께 체포된 선교사와 성도들의 심문을 보조하고 통역하며, 후미에를 비롯한 기리시탄 색출 활동에 가담하며 외국 선박에 실린 기독교 물품을 식별해 내는 것이었습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 영광 따위는 없는 비참한 순교의 현장, 마음에는 원이로되 약한 육신으로 인한 좌절감, 그럼에도 침묵하는 듯한 하나님에 대한 원망 등으로 인해 그 의지 높은 페레이라 신부는 배교의 길을 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순교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란 것을 이 인물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차라리 꽁지가 빠지게 도망치고 또 도망치거나 한 놈이라도 죽고 같이 죽자는 식으로 최후의 발악을 하다 총칼에 맞아 죽을지언정 순교한답시고 나 자신을 감당도 못할 고통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것은 실로 위험하기 그지없는 일이었습니다.)
페레이라 신부의 배교가 알려지자 교황청에서는 난리가 났고 그 죄를 대신 갚기 위해 일본 선교를 떠나려 하는 선교사들과 사제들의 출사표가 줄을 이었으며 마침내 1642년 8월에 루비노 신부 일행이 규슈의 사쓰마에 상륙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1638년에 시마바라의 난이 진압되어 기리시탄에 대한 감시와 핍박이 한층 극에 달한 터라 루비노 선교단은 사지로 뛰어든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결국 체포되어 나가사키로 압송된 루비노 신부와 선교사들은 무려 7개월 간 물고문과 구멍 매달기 고문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1643년 3월 21일에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 22일에 루비노 신부와 메틴스키 신부가 순교, 23일에 마르케스 신부가 순교하여 루비노 선교단은 전원이 순교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이채로운 것은 토마스 선교사는 조선인이었고 마르케스 신부는 일본인이었는데 일본 현지에서 선교사와 사제로 양성된 인물들로 추측됩니다.)
(거적으로 몸을 감아 못 움직이게 하고 물에 빠뜨린 후 막대기로 눌러 물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여 수장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좀 분위기 깨는 소리이지만... 첫번째 사진에서 거적에 몸이 감겨 순교를 기다리는 모니카 역을 맡은 인물이 우리나라 가수 <지드래곤>의 열성팬이자 그와 열애설도 퍼졌던 일본의 미녀 배우 <고마츠 나나>입니다.)
(주세페 키아라 신부가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니지만 신부를 따라다니는 기치지로의 가족들이 당한 화형 장면입니다.)
영화 <사일런스>와 소설 <침묵>에 등장하는 관리 이노우에 지쿠고노가미는 실제 인물이며 (원래 이름은 <이노우에 마사시게>입니다.) 그 자신부터가 배교한 기리시탄인데 기리시탄을 배교시키는데 뛰어난 능력을 보인 인물로 이 사람의 주 전략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선교사와 사제를 배교시켜 그들로 하여금 복음을 부정하도록 하여 기리시탄들을 좌절시키고 복음을 뿌리째 뽑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걸려든 대표적인 인물이 페레이라 신부였지요. 그러나 뼛속까지 배교한 페레이라 신부와 달리 주세페 키아라 신부는 후미에를 하고 풀려나 이름을 <오카모토 산우에몬>으로 바꾸고 일본인으로 귀화한 후에도 눈 하나 깜짝 않고 복음 전하는 일을 계속하였습니다.
(이름이 바뀐 연유도 참 씁쓸한데 원래 저 이름의 주인인 진짜 오카모토 산우에몬은 에도에서 근무하던 사무라이였습니다. 그러다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사형을 당했는데 그가 사형당한 타이밍이 주세페 키아라 신부가 후미에를 하고 풀려난 시점과 아다리가 잘 맞아 떨어지는 바람에 이노우에 지쿠고노가미의 주선으로 주세페 키아라 신부가 그 오카모토 산우에몬의 주민등록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입니다. 이름만 물려받은 것이 아닌 그의 부인과 아들도 물려받고(!!!!) 원래 인물이 무사였다 보니 그의 칼도 물려받아(!!!) 본의 아니게 무사 신분이 되었는데 그가 거짓으로 배교한 것이 들통 나는 바람에 에도에 있는 기리시탄 수용소에 들어가서도 10명분의 급여(- 녹봉 또는 봉록이라고도 불리며 무사에게 내리는 월급)를 받으며 하인까지 거느리고 살았습니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이 이노우에 마사시게가 단순한 관리가 아닌 막부 서열 10위 안에 드는 세력가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소유한 에도의 6천평 상당의 별장과 저택을 개조하여 기리시탄 수용소로 만들기까지 했습니다. 소설 <침묵>에서 이노우에가 로드리고 신부에게 <에도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서 살라고 한 것은 바로 이 수용소로 들어가라는 것이었습니다.)
1643년이 기리시탄들에게는 실로 잔인한 해였는데 앞서 말씀드렸듯이 3월에 루비노 선교단이 전원 순교하고 6월에는 주세페 키아라 신부가 배교하고 그해 말에는 최후의 일본인 사제였던 고니시 만쇼 신부가 순교하여 이 해부터 일본 교회는 목회자가 없는 지하 잠복교회로 변하게 되고 이때부터 <가쿠레 기리시탄(- 잠복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일본인 사제는 고니시 만쇼, 마지막 일본 선교사는 주세페 키아라 신부였습니다. 소설 <침묵>에서도 키아라 신부를 모델로 한 로드리고 신부가 자신을 <일본 최후의 신부>라 칭하며 의지를 다지는 장면이 나오지요. 주세페 키아라 신부는 배교 이전에는 고토 섬과 규슈 일대를 다니며 복음을 전했으며 배교 이후에도 비밀리에 복음을 전했는데 기리시탄 수용소에 유폐되어서도 갇힌 성도들을 양육하고 수용소에 근무하는 사무원들과 무사들에게까지 전도를 하다 적발되어 1674년 6월 14일에 다시 배교 서약서를 작성하는 상황에 이릅니다. 그는 1683년에 수용소에서 사망하였으나 기리시탄들에게 지대한 족적을 남겼고 이후 200년간 지켜져 온 복음의 자취는 그로 인하여 뿌려진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선교사도 없고 사제도 없고 적발될까 두려워 성경책 하나 십자가 하나조차 갖고 있기 힘든 극악한 박해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가쿠레 기리시탄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막부에서도 기리시탄들이 완전히 소탕되었다고 생각할 무렵 1657년에 오무라 고오리 지방에서 기리시탄들이 대거 적발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한 성도가 옆집 사는 친구에게 전도하다가 그 친구의 밀고로 드러난 사건이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608명의 잠복 성도들이 체포되고 441명이 처형 순교, 78명이 옥사, 20명이 종신형에 처해지고 99명이 석방되었습니다.
(석방된 99명은 후미에를 하고 풀려났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기리시탄들에 대한 막부의 탄압은 실로 악랄하여 종신형에 처해진 성도들은 정말 죽을 때까지 옥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11살에 투옥된 성도 치요는 1722년에 75세로 옥사할 때까지 64년간 옥살이를 했고 13살에 투옥된 성도 치마츠는 1719년에 74세로 옥사할 때까지 61년간 옥살이를 했습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유초등부 주일학교 학생들인데 막부는 그 소년 소녀들까지 예수님을 믿었다는 이유로 평생 감옥에 가두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다시 기리시탄 박해의 광풍이 몰아쳤고 마침내 1700년에 일본 전역에서 공식적으로 기리시탄은 소멸되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일단 매년마다 후미에를 하는데다 후미에를 한 성도들은 <기청문>이라 불리는 일명 <코로비 문서>를 작성해야 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과 믿음을 완전히 버리겠다는 맹세문이며 작성 후 작성자 본인의 피로 지장을 찍었습니다.
좀 더 세부적으로 보면 남자 6대, 여자 3대까지 그 안의 모든 출생, 혼인, 여행, 사망, 이사, 개명, 이혼, 출가 등의 내역을 기록하여 기리시탄의 자손들이 회심하는 것을 차단하며 그 배교서약서의 내용 또한 <하나님과 성모 마리아(!!!!)를 비롯하여 모든 천사들과 성인들을 걸고 다시는 기리시탄으로 회심하지 않을 것을 서약한다>는 실로 막대한 정신적 압박을 주었습니다. 이 배교서약서는 1635년부터 실시되었고 배교한 페레이라 신부와 아라키 료하쿠 신부, 고토 료준 신부의 아이디어였습니다.
잊혀졌던 기리시탄들이 다시 발견된 것은 약 10여년 이후의 일로 1708년에 이탈리아 출신의 지오반니 밥티스타 시도티 신부가 일본에 상륙하였다가 체포되어 기리시탄 수용소에 갇혔는데 수용소 생활 6년째인 1714년 2월에 자신을 시중들던 하인 부부가 자신들이 기리시탄임을 고백함으로 드러났습니다. 알고 보니 이들은 옛 주세페 키아라 신부의 하인들이었고 키아라 신부로부터 복음을 전해들은 성도들 중 하나였습니다. 뜻하지 않게 성도를 만난 시도티 신부는 그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고 1714년 10월 21일에 시도티 신부와 성도 부부는 나란히 순교하였습니다.
이것으로 정말 기리시탄이 확인사살까지 끝났다고 여겼으나 세월이 흘러 1790년 7월에 우라가미 마을에서 기리시탄들이 적발되어 19명이 체포됨으로써 다시 기리시탄 박해의 바람이 불어닥쳤는데 이 끈질기고 끈질긴 성도들은 잡혀가고 순교하며 핍박을 당하는 와중에도 잡초처럼 버티고 버텨 1842년과 1856년, 1867년까지도 우라가미에서 잔존한 기리시탄들이 적발되는 등 명맥을 이어 갔습니다.
기리시탄들이 250년간의 기나긴 세월을 버티고 버틸 수 있었던 힘이 되어 준 것은 250년 전 순교한 바스찬 신부의 예언인 <7대가 지나면 흑선을 타고 교황이 보낸 고해신부가 도착할 것이며 매주라도 고해성사를 할 수 있고 어디서든 큰 소리로 찬송가를 부르며 걸어다닐 수 있을 것>이라는 메시지였습니다.
그들은 예배를 인도하고 복음과 교리를 가르쳐 줄 사제와 선교사가 없는 상황에서, 성경책 한 권 조차 가지고 있을 수 없는 불모의 상황에서 입에서 입으로 기억되고 전해진 구전만으로 믿음을 유지해야 했습니다. 라틴어 기도문은 발음만 유사한 한자로 표기되어 뜻은 전혀 사라지고 주문처럼 읽기만 하였고 평신도 인도자가 우두머리가 되어 비밀리에 밀교처럼 예배를 드렸습니다.
(마을 사람들끼리 모여서 담소를 나누는 것처럼 가장해야 했기에 기도는 눈을 뜨고 손도 모으지 않고 그냥 얘기하듯이 했습니다. 그조차 집 밖으로 새어나가 밖에 들리기라도 하면 경을 치기 때문에 입속으로 중얼거리며 주문 외우듯이 기도했습니다. 기리시탄들이 250년 세월을 인내하며 기다리고 기다렸던 것은 <자유롭게 소리를 내어 기도할 수 있는 날>이었습니다.)
이들도 물론 고문이나 고통에 못 이겨 후미에를 하고 배교하였겠지만 배교에 무너져 좌절하고 영영 돌아선 것이 아닌 주님 앞에 돌아와 후미에를 한 발을 씻고 그 물을 마시며 눈물로 통회하였으며 다시 일어서 기리시탄으로서의 정체성과 의지를 다졌던 것입니다. 상황 논리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 그들을 무책임한 배교자라고 지적하는 이들도 있겠으나 이들은 자신들이 처한 환경과 여건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으며 순교한 자들이나 후미에를 한 자들이나 그 마음만은 다르지 아니하였습니다.
기나긴 고난의 행군도 어느 새 끝이 보이고 여명이 밝아 오기 시작하였습니다.
1865년에 프랑스 선교사 제라르 신부가 요코하마에 성당을 세웠고 프티 장 신부가 일부러 길거리를 찬송가를 부르고 다니며 전도를 시도하였습니다. 역사적인 그날 1865년 3월 17일에 성당을 구경하러 온 십여명의 마을 사람들이 기도하고 있던 프티 장 신부에게 <성모님을 공경하시는지>, <결혼은 하셨는지>, <전례력을 지키는지> 물어보았고 프티 장 신부는 <성모님을 공경하며 사제라 결혼하지 않았으며 전례력을 지키고 있다>고 답하였습니다.
1865년 8월까지 가쿠레 기리시탄 3,800명이 더 발견되어 잊혀진 일본 교회가 회복되는 듯한 기미를 보였으나 도쿠가와 막부에 이은 메이지 정부의 최후의 발악과도 같은 박해가 시작되어 1867년 7월에 우라가미 마을의 기리시탄들이 체포되고 1868년 7월에 기리시탄 4,274명이 체포되어 유형에 처해졌으며 1871년 12월에 이마리 지방에서 70명의 기리시탄이 체포되어 옥에 갇혔습니다.
유형에 처해진 기리시탄들은 좁은 감방에 갇혀 더위와 질병에 시달리거나 추운 곳으로 보내져 눈 오는 바깥에 방치되는 식의 탄압을 받아 많은 사람들이 순교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박해자들의 마지막 발악이었습니다.
일본과 통상하고 있던 서구 열강들이 메이지 정부에 압력을 가하여 박해를 멈출 것을 요청했고 여기에 손을 든 일본 정부는 1872년 2월에 체포한 기리시탄들을 석방하고 1873년 2월에는 각 마을마다 설치된 기리시탄 금지 팻말들을 철거하였으며 유형에 처해진 기리시탄들을 귀향시키고 기리시탄 박해를 전면 중지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889년, 일본 정부에 의해 신앙의 자유가 공식적으로 선언되었으니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선교사 추방령으로부터 302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금교령으로부터 275년만이었습니다.
(불상으로 위장한 성상)
(강한 빛을 쪼일 때 특수한 무늬가 비치도록 하는 구리거울인 <마경>입니다. 주로 연꽃이나 부처의 모습이 비치게 하는 불교용품인데 예수님의 모습이 비치도록 기리시탄들이 개조했습니다.)
일본의 잠복 크리스천, 가쿠레 기리시탄의 역사는 환난 시대에 남겨질 성도들에 대한 예표이며 각박한 현실 속에 살아가는 성도들을 비추는 거울과 같은 이야기였습니다.
현실과 고통, 핍박 앞에서 더러는 순교하고 더러는 지조를 굽혔지만 순교한 이들과 살아남은 이들 모두 그 마음은 다르지 아니하였습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싶으신 것은 이것일지도 모릅니다. 후미에 앞에 선 우리에게....
“나는 침묵하지 않았다. 나는 너와 함께 고통을 당하고 있다. 밟아라. 밟아도 좋다. 너의 아픔을 내가 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약속해라. 결코 쓰러지지 않겠다고... 결코 좌절하지 않겠다고.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고... 그리고... 다시 일어서겠다고.”
집필자 : 계시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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