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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여행

아, 바이칼

 

 

바이칼의 관문인 이르쿠츠크의 7월은 우리나라 봄날 같았다.

하늘은 맑고 푸르고, 높이 자란 버드나무 가로수가 눈길을 끌었다. 높은 빌딩이 눈에 띄지 않는 유럽풍 거리는 번잡스럽지 않았다

넓은 앙가라강은 유유히 흘렸고, 강변을 따라 조성된 산책 공원은 한가로웠다.

이르쿠츠크는 바이칼에서 발원한 앙가라강 유역에 자리잡은 시베리아에서 가장 오랜 350여년의 역사를 지닌 도시다.

먼 옛날부터 몽골계 부족인 부랴트족들의 삶의 터전이었으나,

16C 코사크전사들이 모피를 얻기 위해 진출했었고, 러시아의 동방진출 전진기지 역할을 했으며,

실패한 혁명가의 유배지였기도 했다.


 






흑담비를 물고 있는 검은 호랑이, 흑호는 이르쿠츠크의 상징이다.

지금은 남획으로 거의 멸종되었다고 한다. 이르쿠츠크의 역사는 흑담비 모피 수집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흑담비 모피는 당시 유럽 귀부인들에게 최고의 인기품이었다.

이 흑담비 모피 수탈 선봉에 선 사람들이 러시아 자유농민집단인 코사크민병대였다.

시베리아 원주민들은 총기로 무장한 코사크민병대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많은 원주민들이 침략자의 총에 맞아 죽고, 이보다 더 많은 원주민들이 침략자들이 옮긴 전염병에 걸려 죽었다.

코사크 민병대는 동으로 동으로 모피를 찾아 태평양연안을 거쳐 알래스카 까지 이동하였고,

그 코사크 민병대가 간 곳이 바로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다.

 

이르쿠츠크는 데카브리스트들의 유배지로 유명하다.

나폴레옹의 모스코바 침공을 막아낸 러시아 젊은 장교들은 파리에서 선진 유럽 문화을 경험하고,

러시아의 낙후성을 목격하였다. 이들은 유럽과 같은 새로운 러시아를 만들기 위해서는 농노제 폐지,

전제군주제 폐지가 절실하다고 보고, 182512월 전제 군주 짜르체제 전복을 목적으로 혁명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러시아 12월 혁명은 조선말 김옥균, 박영효 등 개화당이 일으킨 갑신정변을 연상케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선각자들만의 혁명은 성공하기 어려운가 보다.

12월 혁명에 참여한 젊은 귀족들을 데카브리스트라 한다.

 







혁명에 참여한 귀족들은 체포되었고, 시베리아 이르쿠츠크지역으로 유배를 당하게 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중 11명의 부인이 남편을 따라 이르쿠츠크로 왔다.

귀족 신분을 버리고, 재산도 포기하고, 혹독하게 추운 낯선 땅으로 남편을 찾아온 부인들의 순애보는 참으로 대단하고 놀라웠다.

남편은 7년이란 긴 유배생활 끝에 복권되었고, 부부는 함께 살게 되었다.

그들은 지역주민들을 위해 학교, 병원, 극장등을 세웠고, 지역주민들과 모여 토론하고 문화 행사를 개최하기도 했다.

모스코바에서 멀리 떨어진 모피수탈과 유배지의 도시였던 이르쿠츠크는 이들 데카브리스트와 부인들에 의해

유럽을 닮은 지성과 예술의 도시로 탈바꿈하였고 '시베리아의 파리'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르쿠츠크에서 둘째날환바이칼 기차여행이었다.

전날 농산물 시장과 수퍼마켓에서 산 과일, 맥주, 음료수, 과자에 점심도시락을 준비해 기차에 올랐다. 꼭 친구들과 MT가는 느낌이었다

환바이칼 철길은 시베리아횡단철길의 일부분이었다.

이 구간은 지형이 험준하여 시베리아 횡단철길 중에서 가장 난공사 구간이였으며, 공사비용도 많이 들었고, 가장 마지막에 완공되었다.

1956년 앙가라강에 수력발전용 댐이 건설되어 앙가라강변 철길이 물에 잠기게 되자 새로 우회철길이 만들어 졌고,

바이칼호 수변 철길은 방치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 바이칼호수가 관광지로 각광을 받게 되자 철길을 보수하여 관광열차로 운행하게 되었다.

 

환바이칼 열차는 관광객으로 만원이었다.

열차는 시베리아 횡단선로를 따라 동으로 달리다가 슬루잔카역에서 환바이칼 선로로 바꾸었다.

오른쪽은 바이칼 호수, 왼쪽은 자작나무와 소나무 숲.

열차는 절벽 위를 달리고, 다리를 건너고, 터널을 통과하면서 시시각각 변하는 바이칼의 풍경 속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열차는 시속 20km로 천천히 달렸고, 중간중간역에서 30분정도 쉬었다.

역 주변에 드문드문 몇 가구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고, 여행객들에게 음식과 차를 팔았다.

날씨가 흐린 것이 아쉬웠지만 바이칼 호수는 한없이 넓고, 신비로웠다.  

 





춘원 이광수가 소설 유정을 구상한 곳이 바로 이곳 바이칼 호수가 어느 마을이었다고 한다.

오산중학교 교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그가 맑고 넓은 바이칼에서 마음의 위안을 얻고

아가페적인 사랑에 대한 영감을 얻지는 않았을까?

 

다시 이르쿠츠크로 돌아오는 버스 안. 슬픔이 짙게 느껴지는 러시아 노래가 심금을 울렸다.

가난한 화가의 애잔한 사랑을 노래한 '백만 송이 장미', 2차세계대전에서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한 체첸장병들을 추모한 '백학'.

그리고  사랑하는 페르시아 공주를 볼가강에 던져야 했던 코사크 농민혁명가를 노래한 '스텐카라진'.

젊은 대학시절, 막걸리 마시면서 불렸던 스텐카라진을 다시 듣게 되다니반갑고도 묘한 감정이 일었다.

이들 노래에서 투박하고 슬픈 비애미가 느껴졌다. 이것이 러시아의 원초적인 국민정서 인지도 모르겠다.

 

 


다음날 아침 일찍 바이칼 알혼섬으로 출발했다.

도중에 브랴트족의 성황당인 우스찌아르다에서 무사여행을 기원하고, 과일노점상에서 과일도 샀다.

차창 밖으로 소나무, 자작나무 그리고 낙엽송 숲이 스쳐 지나가다가 어느 순간부터 나무 한그루 없는 초원지대가 나타났다.

기후 조건도 특이하게 바뀐 것 같지도 않은데, 생태환경은 전혀 딴 세상으로 바뀌었다.

연락선을 타고 알혼섬에 도착, 미니밴으로 갈아타고 후지르 마을 숙소로 이동했다.

우리가 이틀 동안 머무를 숙소는 바이칼 호수 바로 옆, 전망 좋은 곳에 자리한 통나무집이었다.

넓은 호수, 탁 트인 전망, 한적하고 맑은 공기. 아무생각 없이 며칠 휴양하기에 딱 좋은 곳이었다.

 





알혼섬에는 포장도로가 없다. 따로 길도 없는 듯했다. 차가 많이 다닌 곳이 길이 된 듯 했다.

4륜구동 미니밴을 타고 울퉁불퉁 오프로드를 달렸다.

낮은 지역은 대부분 나무 한그루 없는 초목지대였고, 멀리 산중턱 위로 숲이 형성되어 있었다.

어쩌다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소떼가 보였고, 민가도 가축도 눈에 띄지 않았다. 나무는 소나무와 낙엽송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알혼섬에 가면 쭉쭉 뻗은 흰색 자작나무 숲을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는데좀 실망했다.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불한 바위가 있었다.

낮은 언덕위에 빨강 파랑 노랑 천을 감은 13개의 세르게가 하늘을 향해 일렬로 서있었다.

하늘의 기가 내리는 곳인가, 아님 신성한 불한 바위를 지키는 금목인가. 세르게를 지나자 바로 눈앞에 불한바위가 나타났다.

불한 바위는 알혼 섬의 상징이자, 가장 신성시 되는 곳이다. 샤먼들이 기도하고 하늘에 제사지내는 곳이다.

멀리서 보면 불한 바위는 호수 가에 솟은 특별할 것 없는 둘로 나눠진 바위덩어리처럼 보였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니 신성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날따라 흰구름이 불한 바위를 둥글게 감싸고 파랗게 열린 하늘에서 신성한 하늘의 기운이 내리는 듯 했다.

아침 해 뜰 무렵 불한바위는 더욱 신비롭게 느껴졌다.


 







바이칼호수는 상상을 초월하는 호수다.

넓이면에서 우리나 경상남북도 면적과 비슷하며, 세계에서 가장 깊으며 담수량도 세계최대다.

바이칼호수는 2500만전 지구의 지각운동에 의해 땅이 깊고 길게 갈라진 곳에 물이 고여 만들어졌다.

알혼섬은 땅이 찟어지는 엄청난 지각변동에서도 굳건하게 제자리를 지킨 땅덩어리로 보인다.

주변의 땅은 무너지고 꺼졌는데도 알혼섬은 단단한 지반을 토대로 지금의 형태를 유지한 것 같다.

알혼섬, 특히 불한 바위가 기가 센 것은 이러한 연유가 아닌가 싶다.  

 

하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이곳이 많은 민족의 시원이라는 점이다.

먼 옛날, 우리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먼 할아버지가 여기서 살다가 남으로 남으로 내려와 우리의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

참 믿기 힘든 얘기다. 그런데 전해내려 오는 전설 그리고 DNA분석에 따르면 황당한 얘기가 아닌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2만년 전, 지구상에 가장 추운 빙하기가 찾아왔다.

북반구는 온통 얼음으로 뒤덮이고, 생명이 살 수 없는 동토의 땅으로 변해 갔다. 그런데 바이칼호수는 얼지 않는 따뜻한 호수로 남았다.

빙하기 때 바이칼호수의 수면은 지금보다 3,4백미터 낮아졌고갈라진 지각 틈새로 엄청난 양의 열수가 솟았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호수아래 열수대가 있고 그곳의 수온은 다른 곳 보다 높다고 한다.

바이칼호수는 빙하기시대 사람이 살 수 있는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지역이었다.

 

그 당시 가장 앞선 문명을 가진 사람들이 바이칼 호수 주변을 점령했을 것이다.

그곳에서 수천 년을 사는 동안 문명은 더욱 발전했고, 종족은 더욱  번성했을 것이며,

그래서 세상을 지배하는 종족이 되었을 것이며,

들은 스스로 천손 족이라 칭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혜로운 그들은 붉은 신단수 아래 

살찐 순록과 첫 수확한 하얀 순록 젖을 차려놓고

눈처럼 흰 옷을 입고 하늘에 감사하고,

손잡고 둥글게 춤췄을 것이다.

그리고 빙하기시대가 끝나고 대홍수로 바이칼 호수가 다시 잠기게 되자

새로운 땅을 찾아 남으로 동으로 이동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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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한 옛날에 나는 떠났다.

부여를 숙신을 발해를 여진을 요를 금을

흥안령을 음산을 아무우르를 숭가리를

범과 사슴과 너구리를 배반하고

송어와 메기와 개구리를 속이고 나는 떠났다.

 

나는 그 때

자작나무와 이깔나무의 슬퍼하든 것을 기억한다.

갈대와 장풍의 붙드든 말도 잊지 않었다. (백석, 북방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