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오대산신앙 관련 자료의 재검토
- 삼국유사 기록의 비판적 해석-
박 광 연
(동국대 HK연구교수)
머리말
Ⅰ. 삼국유사와 오대산사적의 비교
Ⅱ. 금석문 및 문집 속의 오대산
Ⅲ. 돈황 <오대산도> 속의 신라왕자
맺음말
● 투고일: 2015. 5. 10. ● 심사일: 2015. 5. 27. ● 게재확정일: 2015. 6. 17.
사학연구 제118호(201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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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한국 오대산신앙에 대한 국내외의 사료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함으로
써 삼국유사의 오대산신앙 기록의 신빙성 여부를 비판적으로 고찰한
글이다. 검토의 대상은 五臺山事蹟과 朝鮮佛敎通史, 신라시대의 금
석문 및 최치원의 글, 고려시대의 문집들, 그리고 돈황의 <五臺山圖>에
나오는 신라 관련 기록들이다.
검토 결과를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삼국유사 오대산 기록
의 원본과 오대산사적의 원본은 모두 8세기 후반 이후에 쓰여졌고, 신
라인이 당의 오대산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도 8세기 후반이다. 이후 신라
인들 가운데 당의 오대산을 찾은 이들이 많아졌고, 늦어도 9세기 중반 무
렵에는 신라 땅에 오대산이 이식되어 지금의 강원도 오대산이 오대로 불
리게 되었다. 해인사 인근에 오대산사라는 이름을 가진 사찰도 등장하였
다. 고려전기에도 오대산신앙은 계속 이어진 것으로 보이지만 흔적이 미
미하다. 그러다 13세기 후반~14세기에 이르러 많은 기록이 나오는데, 이
는 보살주처신앙의 유행 때문이었다. 삼국유사에 오대산 기록이 많이
수록된 것도 보살주처신앙의 유행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한편 돈황의 <오대산도> (10세기 무렵)에, 신라왕자 및 신라 사신이
오대산을 다녀갔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 나오는 신라왕자가 慈藏이라
는 견해가 있다. 그런데 최근 중국 오대산신앙의 형성 시기에 대한 연구
에 의하면 자장이 입당한 때는 오대산 聖山化를 위한 설화들이 만들어지
기 이전이고, 오대산 순례를 위한 인프라도 구축되기 이전이라고 한다.
삼국유사에서 오대산신앙을 신라에 전한 이가 慈藏이라고 한 것은 설
화적 성격이 강하다. 만약 돈황에서 <오대산도>를 그릴 때 ‘신라왕자 자
장’이 당의 오대산에 왔다는 인식이 있었다면, 이는 당의 오대산 설화를
모티브로 하여 신라에서 만들어진 오대산 관련 설화들이 당으로 전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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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이지 않을까 한다. 앞으로 이러한 설화들이 어떠한 배경 속에서 만들
어졌는가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주제어:오대산, 오대산신앙, 五臺山圖, 慈藏, 삼국유사, 보살주처신앙,
팔대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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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오대산신앙은 대방광불화엄경 60권본(이하 ‘60화엄’이라 함)에 의거
하여 중국의 동북방에 있는 五臺山이 바로 菩薩住處品에 나오는 淸凉山
이고, 이곳에 文殊菩薩이 머물고 있다는 믿음을 말한다. 이 오대산신앙에
대한 관심이 식지 않고 있다.1) 21세기 들어서 시카고대학의 Lin Wei-chen
g,2) 대만대학의 林韻柔,3) 콜롬비아대학의 Andrews Susan4) 등의 박사논문
이 제출되었고, 2014년에는 IABS(International Association of Buddhist
Studies) 제17회 회의 때 ‘오대산’을 주제로 한 패널도 운영되었다.5)
많은 연구자들이 오대산에 주목하는 이유는 오대산신앙이 지니는 시
간성과 공간성 때문일 것이다. 오대산신앙은 어떤 특정 시기에 형성되어
1) 오대산신앙에 대한 연구는 1920년대부터 일본학자 井上以智爲에 의해 시작되었는
데, 五臺山史の一節, 唐代における五臺山の佛敎등의 논문을 歷史と地理에
연재하였다. 小野勝年와 日比野大夫는 五臺山(東京:座右寶刊行會, 1942)에서 북
위부터 청대까지 오대산의 발전 과정을 정리하였다. 중국에서는 1985년 五臺山硏究
會가 성립되었고, 학회지 五臺山硏究를 통해 많은 오대산 관련 논문이 발표되었
다. 杜斗城의 敦煌五臺山文獻校錄硏究(太原:山西人民出版社, 1991)를 통해 돈환
의 <오대산도> 등 돈황 등 중원 이외 지역의 오대산신앙이 소개되었다. 崔正森의 五臺山佛敎史(太原:山西人民出版社, 2000)는 오대산 관련 각종 사료를 종합적으
로 정리하고 있다.
2) Lin Wei-cheng. 2006. Building a Sacred Mountain: Buddhist Monastic Architecture in
Mount Wutai during the Tang Dynasty, 618~907 C.E., Ph.D.diss., Chicago University,
Dept. of Art History.
3) 林韻柔, 2009, 五臺山與文殊道場-中古佛敎聖山信仰的形成與發展, 臺灣大學文學
院歷史學系博士論文.
4) Andrews, Susan. 2013. Representing Mount Wutai’s Past: A Study of Chinese and
Japanese Miracle Tales about the Five Terrace Mountain. Ph.D.diss., Columbia
University.
5) XVIIth Congress of the International Association of Buddhist Studies /August 18 to August
23, 2014/University of Vienna, Vienna, Austria “The Mountain of Five Plateaus: Studies
of the Wutai cult in Multidisciplinary and Transborder/Cultural Approach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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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변한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차 수행도량, 황실의 후원, 화
엄과 밀교 등 다양한 성격이 가미되어 나갔다. 그리고 중국에서 시작되었
지만, 한국, 일본, 서하, 몽골 등 주변 나라로 전파되었고 각 나라의 특성
에 맞게 변용되었다. 오대산신앙은 아시아 불교 문화의 다양성을 이해하
기에 매력적인 주제임에 틀림없다.
오대산신앙에 대한 최근의 활발한 연구는 한국의 오대산신앙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요구한다. 지금까지 오대산신앙에 대한 연구는 삼국유사
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오대산신앙을 신라에 전
한 이가 慈藏이고, 이후 寶川과 孝明두 태자가 오대산에 머물며 수행하
였고, 보천에 의해 동․서․남․북․중앙의 결사와 예참 의례가 정해졌
다고 한다.6) 그동안 오대산신앙의 형성 시기와 구조를 둘러싸고 많은 논
의가 있었는데, 쟁점은 삼국유사 기록을 어디까지 신빙할 것인가였다.
자장에 대해서는, 자장의 오대산 방문과 문수 친견을 모두 인정하기
도 하고,7) 모두 부정하기도 하고,8) 오대산에는 안 갔지만 화엄사상 또는
문수신앙과 관련 있는 것은 맞다고 보기도 하였다.9) 보천과 효명 태자의
이야기는 성덕왕 즉위와 관련 있다고 보기도 하고,10) 신라하대 헌덕왕과
흥덕왕의 왕위계승의 문제를 담고 있다고 보기도 하였다.11) 고려 태조대
6) 三國遺事 권3, 塔像제4, 臺山五萬眞身溟州五臺山寶叱徒太子傳記臺山
月精寺五類聖衆.
7) 김영미, 1992, 자장의 불국토사상 , 한국사시민강좌 10, 서울:일조각.
8) 신종원, 1982, 자장의 불교사상에 대한 재검토:신라불교 초기 계율의 의의 , 한국
사연구 39; 1992, 자장과 중고시대 사회의 사회적 과제 , 신라초기불교사연구,
민족사, 250~286쪽 재수록; 김복순, 1988, 신라 하대 화엄의 1례-오대산사적을 중
심으로 , 사총 33, 9~12쪽.
9) 남동신, 1992, 자장의 불교사상과 불교치국책 , 한국사연구 76, 한국사연구회.
10) 신종원, 1987, 신라 오대산사적과 성덕왕의 즉위배경 , 최영희선생화갑기념 한국
사학논총, 서울:탐구당, 130쪽; 김영미, 1985, 통일신라시대 아미타신앙의 역사
적 성격 , 한국사연구 50․51, 67~68쪽; 박미선, 2007, 新羅五臺山信仰의 成立
時期, 한국사상사학 28, 151~154쪽.
11) 김복순, 1988, 앞의 논문, 12~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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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립설도 있다.12)
중국 오대산신앙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려는 시도도 줄곧 있었다.
한국에서는 박노준의 연구가 기본 시각을 제공하였는데, 논문들의 내용
을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13) 문수신앙의 대중화가 東晋이래 오대
산 문수신앙 성립의 기반이 되었고, 화엄경이 처음 한역된 동진 이후부
터 청량산에 머무는 문수보살에 대한 신앙이 생겨났고, 북위 효문제시대
부터 청량산이 산서성 오대산에 적합하다는 인식이 정착되었고, 唐代들
어 不空과 澄觀의 활약으로 오대산 문수신앙이 흥륭하게 되었다고 하였
다.14) 이후 신라 오대산신앙의 구조를 금강계만다라 및 징관의 교의와 비
교하는 연구도 진행되었고,15) 삼국유사에 묘사된 오대산신앙의 모습을
신라 하대 이후의 것으로 보는 인식이 확산되었다.16) 그렇지만 여전히 오
대산과 관련된 자장의 행적, 보천과 효명의 실존 여부 등 오대산신앙의
형성 시기에 대한 합의는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다.
본고는 이상의 선행 연구들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새로운 관점에서
한국 오대산신앙에 관한 논제들에 접근해보고자 한다. 새로운 관점이란
12) 김두진, 1992, 신라 하대의 오대산신앙과 화엄결사 , 가산이지관스님화갑기념논
총 한국불교문화사상(상), 서울:가산불교문화진흥원; 2002, 오대산신앙과 화엄
결사 , 신라화엄사상사연구, 서울:서울대학교출판부, 252~253쪽 재수록.
13) 박노준, 1986, 오대산신앙의 기원연구; 羅·唐오대산신앙의 비교론적 고찰 , 영동문
화 2; 1988, 唐代오대산신앙과 澄觀, 관동사학 3; 1988, 唐代오대산신앙과
不空三藏, 영동문화 3; 1992, 박노준, 羅·日오대산신앙의 비교연구-변용과 습합
을 중심으로 , 영동문화 4; 1992, 唐代오대산신앙의 移植연구 , 영동문화 4;
박노준, 1995, 韓·中·日오대산신앙의 전개과정 , 영동문화 6; 박노준, 1997, 당대
오대산문수신앙과 그 동아시아적 전개에 관한 연구 , 성신여대 박사학위논문.
14) 오대산신앙의 보급에 징관의 역할을 강조한 盧在性, 澄觀의 五臺山信仰(1999, 中央增伽大學論文集 8) 논문도 있다.
15) 신동하, 1997, 신라 오대산신앙의 구조 , 인문과학연구 3.
16) 김복순, 1996, 신라 오대산 사적의 형성 , 강원불교사연구, 서울:소화; 2002, 한국고대불교사연구, 서울:민족사, 193~194쪽 재수록; 박광연, 2013, 신라법
화사상사연구, 서울:혜안, 2013, 190~192쪽; 석길암, 2014, 나말여초 오대산 불
교권의 재형성 과정 , 한국사상사학 46, 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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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를 벗어나 삼국유사를 보자는 것이다. 선행 연구 가운데 어
느 견해가 맞고 틀린가를 선택하기에 앞서, 오대산신앙에 관한 국내외의
사료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五臺山事蹟, 朝鮮佛敎通史
에도 삼국유사와 유사한 오대산 내용이 실려 있는데, 이 사료들을 언급
한 논문들은 있지만 비교 분석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아 시도해보고자
한다. 또 신라 當代의 금석문 및 최치원의 글, 고려시대의 문집을 통해
오대산신앙이 사회에 알려지고 영향을 미친 시기와 배경을 추적해보겠
다. 그리고 돈황의 <五臺山圖>에 등장하는 신라인의 흔적과 그 해석에 대
해, 외국학계의 오대산신앙에 대한 최근 연구를 참조하여 검토해보고자
한다. 이상의 논의들을 통해 한국 오대산신앙의 형성에 대한 연구에 淺見
을 보태고자 한다.
Ⅰ. 삼국유사와 오대산사적의 비교
삼국유사 오대산 기록과 유사한 내용이 오대산사적에도 나온
다.17) 조선불교통사에도 실려 있는데 오대산사적과 제목뿐만 아니라
내용도 유사하다.18) 그러므로 크게 오대산신앙의 사료는 삼국유사와
오대산사적 두 계통으로 나눌 수 있다. 오대산신앙을 중점적으로 다룬
항목은 다음과 같다.
삼국유사 臺山五萬眞身溟州五臺山寶叱徒太子傳記
17) 五臺山事蹟(월정사소장본)
18) 朝鮮佛敎通史 下篇, 二百品第二, 五臺佛宮山中明堂, 五臺山聖跡幷新羅淨神太
子孝明太子傳記․孝信居士親見五類聖事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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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사적 五臺山聖跡幷新羅淨神太子孝明太子傳記(이하 태자
전기 라고 함)
삼국유사 대산오만진신 은 오대산신앙이 자장에게서 비롯되었음
을 강조한 뒤(자장이 당나라 오대산 태화지에서 문수보살을 만남, 귀국
후 원녕사에서 문수보살 친견함, 자장이 있던 곳에 훗날 월정사가 세워짐,
자장이 신라로 돌아왔을 때 정신대왕의 태자 보천과 효명이 오대산으로
떠남), 보천과 효명에 의해 갖추어진 오대산신앙의 체계에 대해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명주오대산보질도태자전기 는 보천 효명에 대한 다른 판
본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는데, 대산오만진신 에서는 ‘정신대왕의 태자
보천과 효명 형제’라 한 반면, 명주오대산보질도태자전기 에서는 ‘정신
태자 보질도와 아우 효명’이라 하였다.19) 오대산사적은 명주오대산보
질도태자전기 처럼 보질도가 정신태자의 아명이라고 하면서, 두 태자의
이름을 정신, 효명이라 하였다.
오대산사적은 삼국유사와 비교하면 기본 줄거리는 비슷하지만,
글자 출입이 있고 표현의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진여원을 개창한 때가
삼국유사에서는 ‘신룡 원년 을사(705) 3월 초4일’이라 하였는데, 오대
산사적에서는 ‘신룡 원년 을사 8월 3일’이라고 하여 날짜가 다르다. 진여
원에 하사한 토지의 결수도 차이가 난다. 삼국유사는 柴地15결, 栗枝
6결, 坐位2결이라 되어 있고, 오대산사적은 시지 50결, 栢子地6결이
다. 또 삼국유사에서는 정신왕, 보천, 효명이 역사상 누구에 해당하는
지 밝히지 않았고 삼국유사 편찬자도 國史에 글이 없어 정확하지 않다
고 한 반면, 오대산사적에서는 신라본기 기사를 삽입하여 정신태자를
19) 두 기록의 자세한 비교는 신동하, 1997, 앞의 논문, 11~12쪽 참조. 신동하는 대산
오만진신 이 참조한 ‘산중고기’는 신라 때 작성되었고, 태자전기 는 고려조에 들
어가서 작성되었다고 보았다.
한국 오대산신앙 관련 자료의 재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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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하여 왕이 된 효명태자가 33대 성덕왕이라고 분명히 하고 있다.
두 기록이 다른 원인은 여러 측면에서 고려해봐야겠지만, 삼국유사
와 오대산사적이 참조한 원자료가 달랐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우선 삼국유사는 그 찬술 과정에 대해 논란이 있어 찬자를 확정할
수는 없지만, 대산오만진신 의 세주를 一然이 썼다고 인정한다면 오대
산 기록을 삼국유사에 삽입한 이가 일연이라고 볼 수 있다. 삼국유사
대산오만진신 의 주된 출처는 ‘산중고전(山中古傳)’으로, 일연은 원자료
를 오대산에서 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別傳이 별도로 있었지만, 그 내용
은 자세히 다루지 않고 있고, 唐高僧傳, 三國本史, 國史, 古記, 記등과 비
교하여 교감하고 있다.
오대산사적에는 “大德11년 2월 일 宣授朝列大夫翰林直學士匡靖
大夫咨議都僉議司事延英殿大司學提修史判文翰署事閔漬記”가 달려
있어 태자전기 를 충렬왕 33년(1307)에 민지가 기록하였음을 알 수 있
다. 일연과 민지의 생몰년을 비교하면, 일연은 1206년에 태어나 1289년에
생을 마쳤고 민지는 1248년에 태어나 1326년에 죽었다. 1283년(충렬왕 9)
에 國尊에 초대된 일연과 충렬왕 초반에 殿中侍史, 典理正郞등을 지낸
민지가 서로 대면하였을 가능성은 있지만 40세 이상 차이가 나는 두 사람
이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을 것이다. 확인 가능한 두 사람의 인연은 일연
사후, 왕명으로 민지가 일연 비명( 麟角寺普覺國師碑) 을 쓴 것이 전부
인 듯하다. 외교가, 외교문서작성가로서 이름을 떨친 민지의 본격적인 활
동은 일연 사후에 시작되었다.20) 오대산사적에 삼국유사를 참조한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민지는 일연과는 다른 루트로 원자료를 입수하
였을 것 같다. 민지가 밝힌 바에 의하면, 태자전기 의 원본은 오대산에
소장되어 있던 鄕言으로 된 자료였다.
20) 이창국, 2001, 원간섭기 민지의 현실인식-불교기록을 중심으로 , 민족문화논총
24, 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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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화를 겪은 이래 나라의 행보가 많이 어려워져서 공양이 자주 끊기고
절도 심하게 무너졌다. 사문이 하루는 이를 보고, 분개하여 탄식하고서 힘
을 다해 수리하고 나에게 와서 말하였다. “이 산의 명성이 천하에 알려져
있는데, 보유하고 있는 옛 기록[古稽]은 모두 신라시대의 향언[羅代鄕言]으
로 되어 있어 사방의 군자가 두로 볼 수 있는 바가 아니니, 비록 사람들에
게 이 산과 절의 영이로움에 대해 자세히 알게 하고자 하여도 어찌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훗날 혹시 天使가 이 산에 와서 古記를 구해 보고자 한
다면 장차 무엇을 보여주겠습니까? 원컨대 문장을 卿의 말로 바꾸어 이를
보는 자들이 大聖의 신령하고 기이한 자취가 해와 달이 빛나는 것과 같음
을 분명하게 알게 해주십시오.” 나는 이 말을 듣고 옳다고 여겼다. 비록 내
가 글을 지을 주는 알지만 그 의미를 부연하지는 못한다. 또한 그의 청을
거듭 어기고 필삭하였다.21)
태자전기 에 이어서 나오는 信孝居士親見五類聖事蹟끝부분에 찬
술 배경을 적고 있다. 민지는 오대산 승려의 부탁으로 ‘羅代鄕言’으로 된
오대산 관련 기록을 한문으로 옮겼고, 그 과정에서 필삭(더 쓸 것은 쓰고
지울 것은 지움)하였다고 한다.
정리하면, 오대산에 전해오던 전승 기록이 몽골과의 전쟁에서 대부분
불타고, 남은 것 가운데 일부를 일연이 먼저 얻어서 삼국유사에 수록하
고, 마지막 남은 향언으로 된 자료를 민지가 한문으로 바꾸어 전하고 있
는 것이 아닌가 한다.
흥미로운 것은 오대에서 행하는 예참의 신앙 대상 및 의례 내용에도
21) 五臺山事蹟, “自經兵火以來國步多艱供養屢絶寺亦頹圮已甚沙門而一見之慨
然發嘆旣已殫力修葺來謂余曰是山之名聞於天下而所有古稽皆羅代鄕言非四
方君子所可通見雖欲使人人能究是山寺之靈異豈可得乎若他日或有天使到山而
求觀古記則其將何以示之哉願以文易其卿言使諸觀者明知大聖靈奇之跡如日月
皎然耳予聞其言以爲然雖自知爲文不能副其意亦重違其請而筆削云爾大德十
一年二月日宣授朝列大夫翰林直學士匡靖大夫咨議都僉議司事延英殿大司學提
修史判文翰署事閔漬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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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오대산사적
青東臺
圓通社
一萬觀音
菩薩
觀音房
圓像觀音
一萬觀音
像
八卷金經
仁王般若
千手呪
觀音禮懺
東臺
圓通結社
阿閦如來
一萬觀世
音菩薩
觀音房
圓像觀音
一萬觀世音
八卷金光
明經
仁王般若
大悲心呪
觀音禮懺
赤南臺
金剛社
八大菩薩
一萬地藏
菩薩
地藏房
圓像地藏
八大菩薩
一萬地蔵
像
地藏經
金剛般若
占察禮懺
南臺
金剛結社
八大菩薩
一萬地藏
菩薩
地藏房
圓像地藏
八大菩薩
一萬地藏
地藏經
金光般若
占察禮懺
西臺
水精社
無量壽如
來
一萬大勢
至菩薩
彌陁房
圓像無量
壽
無量壽如
來
一萬大勢
八卷法華
彌陁禮懺
西臺
水精結社
無量壽如
來
一萬大勢
至菩薩
彌陀房
圓像無量壽
無量壽如來
一萬大勢至
法華經
彌陀禮懺
黒北臺
白蓮社
釋迦如來
五百大阿
羅漢
羅漢堂
圓像釈迦
釈迦如來
五百羅漢
佛報恩經
涅槃經
涅槃禮經
北臺
白蓮結社
釋迦如來
一萬彌勒
菩薩
五百大阿
羅漢
羅漢房
圓像釋迦
釋迦如來
一萬彌勒
菩薩
五百大阿
羅漢
佛報恩經
涅般經
涅般禮懺
黄中臺
眞如院
華嚴社
毘盧遮那
佛
一萬文殊
菩薩
泥像文殊
不動
毗盧遮那
三十六化
形
華嚴經
六百般若
文殊禮懺
中臺
眞如院
華嚴結社
毘盧遮那
如來
一萬文殊
菩薩
文殊大聖
泥像文殊
一萬文殊
華嚴經
大般若
華嚴禮懺
두 기록이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표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두 기록의 차이나는 부분을 차례대로 보면, 삼국유사는 8권 금경,
오대산사적은 8권 금광명경, 삼국유사는 천수주, 오대산사적은 대
비심주, 삼국유사는 금강반야, 오대산사적은 금광반야, 삼국유사
는 육백반야 및 문수예참, 오대산사적은 대반야 및 화엄예참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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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차이는, 같은 성격의 것을 다른 이름으로 부른 것일 뿐이기 때문
에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삼국유사에는 없고 오대산사
적에만 등장하는 이름들이 있다. 바로 동대의 ‘阿閦如來’와 북대의 ‘一萬
彌勒菩薩’이다. 아촉여래의 경우, 金光明經 사방불 가운데 동방을 맡은
부처이고, 금강계 만다라의 5불 중 동쪽에 위치하므로 오대산의 동대의
신앙대상이었다는 것이 자연스럽다. 1만 미륵보살이 왜 북대에 배치되었
는가에 대해서는 좀더 생각해보아야 한다.
한편 이러한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삼국유사의 원본과
오대산사적의 원본, 어느 기록이 먼저 일까? 우선, 오대산사적 원본
이 먼저 작성되었고, 삼국유사의 원본이 그 뒤일 가능성이 있다. 오대
산사적은 각 대 별로 ‘여래-1만 보살’의 형식이 갖춰져 안정감이 있다.
아촉여래, 미륵보살이 처음 오대산신앙 체계 속에 포함되어 있었는데 후
대에 전승되는 과정에서 누군가 삭제하였다고 한다면, 누가 삭제하였을
까? 삼국유사 오대산 기록에 미륵이 없는 것은 왕건에 의해 궁예가 축
출된 후 불교계의 사상 분위기가 반영된 것이라는 해석22)도 이러한 고려
속에서 나왔을 것이다. 반대로 삼국유사의 원본이 먼저이고, 오대산사
적의 원본이 나중일 가능성도 있다. 밀교의 사회적 영향력이 점차 강해
지면서 밀교에서 중시하는 5불 가운데 하나인 아촉불이 추가되고, 미륵신
앙이 더욱 확산되면서 미륵보살도 한 자리 차지하게 되었을 수 있기 때문
이다. 둘 다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흥미롭지만 더 이상의 추론은 무리다.
두 기록의 차이점보다 오히려 공통점에 주목하여 작성 시기를 파악하는
것이 더 의미 있을 것 같다.23)
22) 김두진, 2002, 앞의 책, 251~254쪽.
23) 오대산사적의 ‘羅代鄕言’이라는 표현에서 신라시대에 쓴 것으로 유추할 수 있지
만, 향언을 다른 말로 羅言이라고도 부르기 때문에, 이 단어만으로는 신라 때 쓴
것인지 고려 때 쓴 것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한국 오대산신앙 관련 자료의 재검토
215
삼국유사와 오대산사적의 공통 요소 가운데 ‘八大菩薩’에 주목해
보자. 남방은 지장보살이 대표라고 보고 있지만,24) 구조적으로 볼 때 1만
지장보살의 우두머리이며, 무량수여래, 석가여래, 비로자나여래에 비견되
는 것은 팔대보살이다. 팔대보살이 어떤 존재이길래 여래에 비견된 것일
까? 남대의 독송 경전인 지장경이나, 신라․고려시대의 점찰예참에 팔
대보살이 등장하지 않는다. 팔대보살은 帛尸梨蜜多羅가 번역한 佛說灌
頂經,25) 僧伽婆羅가 번역한 舍利弗陀羅尼經26) 등 초기의 밀교 경전에
서부터 등장하는데, 여기서의 팔대보살은 생소한 이름의 보살들일 뿐이
다. 善無畏(637~735)의 尊勝佛頂脩瑜伽法軌儀에서도 팔대보살이 등장
하긴 하지만, 여전히 眷屬에 불과하고 여래에 비견될 만한 위상은 없
다.27) 팔대보살의 위상이 높아진 것은 不空(705~774)이 번역한 八大菩
薩曼荼羅經부터이다.28) 이 경에서는 여덟 보살을 배치하는 만다라 건립
법과 그 공덕을 설하고 있다. 가운데 여래를 중심으로 金剛手, 觀自在, 除
蓋障, 虛空藏, 慈氏, 普賢, 文殊, 地藏이 등장하는데,29) 가운데 여래가 특
정 존격으로 지정되지 않고 성격에 따라 변화한다고 한다.30) 한국의 오대
24) 신동하, 1997, 앞의 논문, 17쪽.
25) 佛說灌頂經 卷8(大正藏 21, p.517c13-16).
26) 舍利弗陀羅尼經 卷1(大正藏 19, 698a10-13).
27) 千手觀音造次第法儀軌 卷1(大正藏 20, 138a13-25).
28) 金剛智(669~741)가 灌頂弟子에게 수여하였다는 念誦結護法普通諸部(大正藏
No.904)에 나오는 八大菩薩의 布字․眞言이 不空의 팔대보살만다라경과 일치한
다. 이를 근거로 金剛智부터 팔대보살의 위상의 변화가 볼 수도 있지만, 이 책은
唐末중국밀교에서 성립한 僞作으로 보는 견해가 있어서 쉽게 단정하기 어렵다(대
정장 해제 참조). 다만 팔대보살의 강조가 金剛智․不空系密敎와 관련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29) 八大菩薩曼荼羅經 卷1(大正藏 20, 675c15~22). 宋代에는 法賢역의 佛說八大
菩薩(大正藏 14, no. 490)이 등장한다.
30) 김수연, 2012, 고려시대 밀교사 연구, 이화여대 박사학위논문, 83쪽. 八大菩薩曼
荼羅經은 고려후기에 제작되는 ‘아미타팔대보살도’ ‘약사팔대보살도’ 등의 소의
경전이기도 하다.
사학연구 제118호(2015. 6)
216
산에 팔대보살이, 그것도 여래에 비견되는 위상으로 배정된 데는 팔대보
살만다라경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을 것 같다.31)
주지하듯이 불공은 代宗(재위 762~779)과 여러 귀족들의 보시를 받
아 오대산에 金閣寺를 건립하였고(765년), 그 이후 오대산 문수신앙을 밀
교 세력의 성장에 적극 활용하였다.32) 그의 활동 이후 오대산신앙에 밀교
의 성격이 더해졌고, 신라 오대산의 구조에도 밀교의 영향이 있음을 감안
하면33) 일연이나 민지가 보았던 원본들은 불공이 활동한 8세기 후반 이
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Ⅱ. 금석문 및 문집 속의 오대산
흥미롭게도, 삼국유사를 제외하면, 신라인의 唐오대산 순례에 대
한 최초의 기록도 8세기 후반에 나타난다. 祖堂集 <雪嶽山陳田寺元寂
禪師전기>에 의하면, 道義선사가 784년(선덕왕 5) 당에 들어간 뒤 바로
오대산으로 가서 문수보살을 참례하고 조계산으로 이동하였다고 한다.34)
도의가 입당 직후에 오대산으로 바로 갔다는 것은 신라에 있을 때 오대산
에 대해 들어서 알고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8세기 후반에는 신라에
31) 팔대보살이 위치한 오대산 남대의 절 이름이 金剛(結)社인 것은 금강지-불공으로
이어지는 금강계 밀교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한다.
32) 不空은 兩京및 전국 사원에 ‘대성문수사리보살원’을 설치하고, 비단으로 장식한
문수상 봉안을 의무로 할 것을 주장하였다. 藤善眞澄, 2004, 安史の亂と佛敎界, 隋唐時代の佛敎と社會, 東京:白帝社, 187~193쪽.
33) 신라 오대산신앙은 五方佛신앙과 같은 밀교의 체계를 따랐으나, 신라 불교신앙의
전통에서 가장 보편성이 큰 신앙요소를 배치 반영하였다고 한다(신동하, 1997, 앞
의 논문, 12~20쪽).
34) 祖堂集 권7, 雪嶽山陳田寺元寂禪師傳; 김복순, 2005, 9~10세기 신라 유학승들
의 중국 유학과 활동 반경 , 역사와 현실 56, 24~25쪽.
한국 오대산신앙 관련 자료의 재검토
217
도 오대산 문수보살에 대한 소문이 퍼졌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784년(선
덕왕 5)이라는 시점은 代宗사후 德宗(재위 780~805)이 통치하던 때로,
오대산의 사원 규모나 승려 수가 급격히 증가하던 오대산신앙의 절정기였
다. 도의 이후로도 신라 승려들의 당 오대산 순례는 계속 이어졌다. 870년
에 입당한 朗空行寂(832~916)이 875년 이전에 오대산 花嚴寺에 투신하
여 문수보살과 교감하기 위해 중대에 올랐다는 사례도 있다.35)
시간이 흐르면서 당의 오대산이 신라 땅에도 이식되었다. 朗圓開淸
(835~930)이 859년 康州嚴川寺에서 구족계를 받은 뒤 얼마 지나서 通曉
大師梵日(810~889)을 찾아갔는데, 당시 범일이 있던 장소가 비문에는
‘五臺’라고 표현되어 있다.36) 범일의 제자라고 전하는 信義등에 의해 월
정사가 사찰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하는데,37) 이는 범일이 오대
산에 머물렀던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강원도 오대산은 9세
기 중반 이후 범일과 그의 문도들에 의해 ‘오대’라 불리고 사세가 확장되
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신라 하대의 해인사 관련 기록에도 ‘오대’가 등장한다.
(1) 국가를 尸羅라 부른 것은 波羅提가 법을 일으킨 곳을 취했기 때문이
고, 산을 가야라 칭한 것은 석가모니가 도를 이룬 곳과 같기 때문이다. 게
다가 경계는 二室(嵩山의 太室山과 少室山)을 뛰어 넘고, 봉우리는 오대
(산)보다 높이 솟았다.38)
35) 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譯註羅末麗初金石文下, 서울:혜안, 1995,
276~277쪽), “以後至五臺山投花嚴寺求感於文殊大聖先上中臺忽遇神人鬢眉
皓尒”. 긍양도 오대산에 가서 참례하였다. 9~10세기 오대산은 선사들의 필수 순례
지였다(김복순, 2005, 앞의 논문, 24~27, 37~38쪽).
36) 地藏禪院朗圓大師悟眞塔碑(譯註羅末麗初金石文下, 서울:혜안, 1995, 98쪽),
“大師不遠千里行至五臺謁通曉大師”.
37) 석길암, 2014, 앞의 논문, 45쪽.
38) 崔致遠, 新羅迦耶山海印寺結界場記, 東文選 권64, 記, “國號尸羅實波羅提興法
之處山稱伽倻同釋迦文成道之所而況境超二室峯聳五臺”.
사학연구 제118호(201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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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五臺山寺吉祥塔詞除序/ 沙門僧訓撰(중략) 乾寧二年夷則(음력 7월)建
인용문 (1)은 최치원이 쓴 해인사의 결계장기로, 해인사가 있는 가야
산의 빼어남을 오대산에 견주고 있다. 이 표현에는 오대산이 명승지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2)는 895년(진성여왕 9)에 僧訓이 찬한 <五臺山寺吉
祥塔詞>이다. 이 탑지가 해인사 일주문에서 발견되었으므로, 오대산사는
해인사 인근의 사찰 가운데 하나라고 보고 있다. 해인사 인근의 사찰에
오대산이라는 이름을 부여한 것도 오대산신앙의 유행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중국의 경우 五代시기에 산서성 오대산 이외에 제2, 제3의 오대
산을 절강, 복건, 하북 지역에 만들려는 움직임이 등장하였다고 하는데,39)
가야산 오대산사도 같은 의도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신라말 오
대산신앙의 유행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40)
이상을 통해 8세기 후반 이후 신라 사회에 당의 오대산신앙이 소개되
어 오대산 순례를 실천하는 선사들이 등장하였고, 9세기 중반 무렵에는
신라 땅에 오대산이 이식되어 지금의 강원도 오대산이 오대로 불리게 되
었고, 해인사 인근에 오대산사라는 이름을 가진 사찰이 등장하기에 이른
다. 이처럼 삼국유사를 제외한 다른 기록에서는 오대산이라는 이름이
8세기 후반에 처음 나타나고, 9~10세기에 걸쳐 확산되었다는 사실은 한
국 오대산신앙을 이해하는 데 많은 점을 시사한다.
오대산에 대한 기록이 한참 보이지 않다가 1106년 이예가 쓴 三角山
重修僧伽崛記에서 오대산을 언급하고 있다. “우리 太祖께서 나라를 세
우신 뒤에 역대의 임금들이 모두 친히 여기에 와서 禮를 올리셨다. 저 당
의 아홉 황제가 淸涼山에 가서 文殊菩薩에게 귀의한 것과 같다고 볼 수
39) 김성수, 2012, 오대산도의 티벳 전파와 내륙아시아 불교세계 속에서 오대산의
위상 , 역사교육 122, 155쪽.
40) 자장과 오대산문수신앙을 연결시킨 것은 하대 화엄종 승려의 윤색이라는 해석(신
종원, 김복순 등)과 함께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한국 오대산신앙 관련 자료의 재검토
219
있다.”41)라고 하여 삼각산(북한산) 승가굴을 중국 청량산(오대산)에 비견
하고 있다. 오대산에 대한 인식이 12세기까지도 이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215년 과거에서 이규보가 수석을 차지할 때 차석이었던 陳澕가 쓴
시 가운데 遊五臺山이 있어 13세기 초반에도 오대산을 유람하였음을
알 수 있다.42)
오대산신앙은 이렇게 명맥을 이어오다가 원간섭기 이후에 크게 유행하
게 된다. 문집에 오대산이 빈번하게 등장하는데, 특히 이색의 글에 많다.
오대산 유람을 다녀온 이들과 이색의 교류가 많았기 때문인 듯하다. 이색
은 오대산을 다녀온 나옹의 제자인 英露菴의 부탁으로 오대산 상원사 승당
의 기문을 쓰기도 하고,43) 豫章의 德上人이 五臺山에 유람하면서 얻은 詩
卷에 글을 쓰기도 하였다.44) 이색의 시에서 오대산과 금강산을 동시에 거
론하는 경우가 있는데,45) 이는 고려후기에 菩薩住處信仰으로서 오대산신
앙과 금강산신앙이 성행한 사실과 관련 있다.46)
옛날의 楓嶽도인인 장로 文日은 세상에서 성품을 보고 도를 얻은 사람
이었다고 일컬어지는데 일찍이 문도들에게 “내가 일찍이 상국에 있을 때
에 廬山景福寺의 장로가 나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에는 세 산이 있는데
이 세 산에 사는 사람은 영원히 三惡途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세 산은
보개산, 풍악산, 오대산이다”라고 하였다.47)
41) 東文選 권64, 記, 三角山重修僧伽崛記, “故我太祖開國之後歷代之君皆親瞻禮焉
彼唐有九帝駕幸淸涼山歸仰文殊菩薩卽可以同日而語矣”.
42) 東文選 권20, 七言絶句, 遊五臺山.
43) 東文選 권75, 記, 五臺上院寺僧堂記; 牧隱文藁 권6, 記, 五臺山上院寺僧堂記.
44) 牧隱詩藁 권3, 詩, 題豫章德上人遊五臺詩卷.
45) 牧隱詩藁 권6, 詩, 偶題自笑, “曰居於五臺金剛與諸山”; 牧隱詩藁 권31, 詩, 江陵
金龍壽來言兩崔無恙, “香火臺山形影薄管絃叢石性情寬”.
46) 고려후기 보살주처신앙에 대해서는 박광연, 2015, 불국토 , 테마한국불교 3, 동
국대출판부 참조.
47) 寶盖山石臺記(한국금석문종합영상시스템 참조), “昔楓嶽道人長老文日世所稱
見性得道者也甞與門徒曰我曾在上國時盧山景福寺長老謂余曰汝國有三山住此
사학연구 제118호(201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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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태자전기 를 썼던 민지가 같은 해인 1307년에 쓴 寶盖山石臺
記의 한 부분으로, 보개산이 지장보살의 주처임을 강조하기 위해 풍악산
(금강산)과 오대산의 권위를 빌어오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13~14세기
오대산신앙은 제2 전성기라고 할 만큼 인기가 있었는데, 민지가 태자전
기 를 정리한 것도,48) 삼국유사에 오대산 관련 여러 기록이 수록된 것
도 고려후기에 유행한 보살주처신앙의 영향이라고 생각된다. 權近(1352~
1409)은 조선 건국 초 오대산에 큰 화재가 난 뒤 중창 불사를 하자, 영락
2년(1404)에 獅子庵중창기, 觀音庵중창기, 西臺水精庵중창기를 작성하
였다.49) 이 중창기에서 권근은 “옛날 신라의 두 왕자가 여기에 도망 와서
禪을 닦아 도를 깨달았다. 지금도 승려로서 선을 닦아 증득하고자 하는
자는 모두 여기에 즐거이 머무른다.”50)라고 하여 삼국유사에 나오는 보
천, 효명 두 왕자의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다.
Ⅲ. 돈황 <오대산도> 속의 신라왕자
莫高窟을 비롯하여 敦煌의 석굴에는 <五臺山圖>가 매우 많다.51) 당
三山者永不墮三惡途三山者寳盖楓岳五臺是也”.
48) 민지는 五臺山月精寺事蹟記(1307) 외에도 고려후기 보살주처신앙을 보여주는 金剛
山楡岾寺事蹟記(1297), 楓嶽山長安寺事蹟記跋(1305), 寶盖山石臺記(1307)를 썼다
고 한다.
49) 陽村先生文集 권13, 記類, 五臺山獅子庵重創記; 陽村先生文集 권14. 記類, 五臺
山觀音庵重創記; 陽村先生文集 권14, 記類, 五臺山西臺水精庵重創記; 東文選
권80, 記, 五臺山西臺水精菴重創記.
50) 東文選 권80, 記, 五臺山西臺水精菴重創記, “昔新羅二王子甞遁于此修禪得道
至今衲子欲修證者皆樂居之”.
51) 막고굴 112, 159, 222, 237, 361(中唐시기), 9, 144(晩唐시기), 61(五代시기), 楡林窟
19, 32(오대 시기), 3(서하 시기) 등에 오대산과 관련된 벽화가 있다고 한다. 김성수,
2012, 앞의 논문, 150쪽.
한국 오대산신앙 관련 자료의 재검토
221
고종 때 무측천의 후원으로 會賾이 오대산 중대를 방문한 후 山圖를 그려
소책자 1권으로 만들어 널리 유통시킨 이후로 <오대산도>가 유행하였다
고 한다.52) <오대산도>는 오대산신앙의 보급에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오대산도>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한, 五代(907~960) 말기에 조성된 막고
굴 61굴의 <오대산도>에 신라인의 흔적, 즉 ‘新羅王(子)塔’, ‘新羅送供使
(신라에서 보낸 사신)’라는 畵題가 있다.53) 여기서 신라왕자가 누구인지,
신라에서 보낸 사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승려들뿐만 아니라 신라의
왕족이나 사신들도 당의 오대산을 방문하였고, 신라왕도 오대산에 관심
이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문제는 중국 오대산에 관심을 가지고
사신을 오대산에 파견한 왕이 누구인가인데, 그 해답을 찾기는 어렵다.
돈황 막고굴 61굴의 <오대산도>에 나오는 ‘신라왕자’가 선덕여왕(재
위 632~647) 때 활약한 승려 慈藏이라는 해석이 있다.54) 이를 어떻게 봐
야 할까? 이 해석은 삼국유사에 숱하게 나오는 자장 관련 이야기와 연
결되기 때문에, 삼국유사에 묘사된 자장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삼
국유사 자장정률 황룡사장육 황룡사구층탑 대산오만진신 등에
서 자장이 당에 들어가 청량산(오대산)에서 가서 문수보살을 친견하였다
고 말하고 있는데, 別本, 本傳, 山中古傳등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이를
모두 역사상 있었던 일로 믿을 수 있는가. 자장을 비롯한 신라의 오대산
관련 설화가 당의 오대산신앙 설화의 영향 하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55) 당의 오대산신앙 관련 설화가 언제 만들어졌는가를 되짚어
52) 김성수, 2012, 앞의 논문, 151~152쪽.
53) 李新, 2011, 敦煌石窟에서 발견된 古代韓半島資料에 관한 硏究-莫高窟第61窟
<五臺山圖>를 중심으로 , 동아인문학 20. 신라왕자로 판독한 경위는 이 논문에
나온다.
54) 李新, 2011, 앞의 논문, 29~30쪽.
55) 김승호, 2012, 당 오대산 설화의 신라적 수용과 변이 , 어문연구 71, 132쪽. 다만
이 논문에서는 자장의 유학 후 바로 당 오대산 설화가 수입되었다고 한다.
사학연구 제118호(201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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봐야 한다.
지금까지 중국의 오대산신앙은 60화엄의 번역 직후인 5세기에 이미
생겨났다는 견해가 일반적이었다. 漢末이래 200여 년간 북방민족이 활동
하던 오대산 지역이 북위 태무제 때인 428년에 개척되기 시작하였고, 효무
제 때인 486년에 현이 설치되었는데, 이때부터 오대산을 화엄경의 청
량산으로 擬定하는 경향이 시작하였다고 한다.56) 남북조시대에 화엄경
의 강경, 독송, 서사는 물론 화엄경 독송을 위해 수행 결사가 조직되어
화엄신앙이 대중화, 통속화되었고, 이 과정을 통해 보살주처품 에서 설
하고 있는 청량산 문수보살에 대한 신앙도 점차 유포, 확산되어 중국 땅
에서 문수보살의 주처를 찾으려는 노력이 점차 늘어났다는 것이다.57)
이러한 주장의 주요한 논거는 북위 후반 酈道元이 쓴 水經注와 唐
慧祥이 찬한 古淸凉傳이었다. 수경주에서 오대산과 문수보살을 언급
하고 있고, 고청량전에는 북위 熙平원년(516)에 승려 靈辨이 화엄경
을 머리에 이고 오대산에 올라가 용맹하게 수행하고 華嚴經論 100권을
저술하였다는 이야기나, 북제(550~577) 초년에 천보 황제의 셋째 왕자가
오대산에서 문수사리를 친견하지 못해 소신공양하고, 그의 신하였던 劉
謙之가 화엄경을 轉誦하며 문수사리의 冥應을 얻었다는 이야기 등이
나오기 때문이다.58)
그런데 최근 수경주 및 고청량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제기되
었다. 수경주는 中古시기 저술된 문헌 가운데 오대산을 기재한 유일한
문헌인데, 내용 가운데 과장되고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고 輔敎의 용도로
만든 책이라 신중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59) 그리고 고청량전의
56) 박노준, 1997, 앞의 박사학위논문, 20~21쪽.
57) 위의 논문, 16, 99쪽.
58) 古淸凉傳 上(大正藏 51, 史傳部4, 1094c).
59) 林韻柔, 2009, 앞의 박사논문, 50쪽.
한국 오대산신앙 관련 자료의 재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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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자인 혜상이 667년과 669년에 두 번 오대산에 올랐는데, 그때만 해도
오대산은 황실의 지원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高宗연간(재위 649~683)
에 비로소 황제의 지원이 이루어지면서 순례자가 증가하였고, 이러한 사
례들을 모아서 調露원년(679) 전후에 편찬한 책이 고청량전이라는 것
이다. 고청량전 내용의 대부분은 고종 연간 순례자의 영험 사적에 대
한 것이고, 남북조시대의 이야기는 사실이라기보다 설화적 성격이 강하
다. 혜상이 고청량전을 찬술하기 이전의 오대산은 불교의 영향 하에
들어가긴 하였으나 문수신앙과의 관계가 특별히 강조되지 않았다는 것
이다.60)
고청량전에 대한 사료 비판은 여러 측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靈
辨이 516년에 화엄경을 머리에 이고 오대산에 올라가 화엄경론을 저
술하였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그런데 최근 중국에서 영변이 오대산에
가지 않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영변은 懸甕山嵩岩寺에서 화엄경을
머리에 이고 行道하였을 뿐 오대산에 가지 않았는데, 고청량전, 화엄
경전기 등에서 영변이 오대산에서 수행하였다고 한 것은 당 고종-무측
천 시기 오대산의 ‘聖山化’와 관련 있다고 한다.61)
고종-무측천에 이르러 오대산신앙은 지역신앙에서 국가신앙으로,
신선 색채가 짙은 불교도량에서 문수도량으로 전환되었고, 무측천이 오
대산에 많은 지원을 하자62) 8세기 이후에 오대산 순례가 활발해졌다고
한다.63) 대종이 순례자의 숙박을 위해 往來停止院을 배치하고, 770년 7월
60) 위의 논문, 53~58, 71쪽.
61) 張文良, 2015, 靈辯的實相與虛像-以法藏的靈辯傳爲中心, 華嚴經論的再發
現與靈辯傳的再構成, 2015華嚴傳宗國際學術硏討會會前論文集. 이 논문에서는
북제의 왕자가 오대산에서 소신 공양하였다는 이야기도 허구임을 논증하고 있다.
62) 고종의 오대산 후원도 武則天(재위 685~704)의 뜻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무측천은
재위한 10여 년 동안 화엄경의 번역, 강좌, 연구를 적극 지지하였는데, 오대산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화엄경의 유행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무측천은 702년
중대에 탑을 세우고, 淸凉寺를 건설하였다.
사학연구 제118호(201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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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는 太原에서 1만인 규모의 齋會를 개최하였는데, 그 이후에 오대산의
명성이 해외에도 알려져 이 시기 唐을 찾는 사람들은 오대산 순례를 필수
코스라 여기게 되었다고 한다.64)
이처럼 오대산 聖山化가 고종 때 시작되었고, 이 무렵 고청량전을
비롯한 오대산 설화들이 만들어졌고, 오대산으로의 순례가 본격적으로 시
작된 것이 무측천 때부터이며, 8세기 후반 대종의 후원으로 순례자들을
위한 숙박시설이 갖추어지면서 다른 나라 사람들의 오대산 순례도 증가
하였다고 한다면, 643년에 신라로 귀국한 자장이 당에 있었을 때에는 오
대산 설화가 유행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으며 그의 오대산 순례 여부도
재고의 여지가 있다.
60화엄이 번역되었다고 해서, 동북방의 오대산이 화엄경에 나오는
청량산에 비정되고 문수보살의 주처로 인식되었다고 해서 곧바로 아무런
노력 없이 그 사실이 전국적으로, 나아가 해외에까지 알려질 수는 없을
것이다. 황제, 황실의 후원과 지지 속에서 오대산은 유명한 ‘오대산’으로
거듭날 수 있었고, 신라를 비롯한 주변 나라로의 이식과 외국인의 오대산
방문은 ‘오대산’으로 거듭난 이후에야 가능하였을 것이다. 제반 편의 시
설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개인적인 고행 차원에서의 방문은 있었
겠지만 다수의 성지 순례는 현실적으로 어려웠을 것이다.65)
63) 710년 菩提流支가 역출한 文殊師利法寶藏陀羅尼經에서는 ‘섬부주의 동북방에 大
振那國이 있고, 그 나라에 五頂이라는 산이 있는데 문수사리동자가 거주하고 있다’
라고 하여 오대산 문수신앙을 명확하게 표방하였다. 보리유지가 청량산을 오정이라
한 것은 그 이전에 이미 이러한 사고가 인정되고 있었음을 반영하다는 해석(박노준,
1997, 앞의 박사학위논문, 21쪽)도 있고, 이 경의 역출이 오대산을 청량산에 비정하
는 데 결정타 역할을 하였다는 해석도 있다(藤善眞澄, 2004, 앞의 책, 188쪽).
64) 藤善眞澄, 2004, 앞의 책, 191쪽.
65) 入唐求法巡禮行記에서 圓仁이 오대산에 갈 때 이용한 숙박시설은 驛館, 寺院,
普通院, 일반인의 家宅, 店등이었다(이유진, 2009, 당대 구법승의 숙박시설-圓仁
의 入唐求法巡禮行記를 중심으로 , 숭실사학 22, 248쪽).
한국 오대산신앙 관련 자료의 재검토
225
자장이 당에 있던 시기는 오대산 순례가 유행하기 전이고, 순례를 위
한 인프라도 구축되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자장이 오대산에 찾아갔을지
는 의문스럽다. 그러므로 <오대산도>의 신라왕자가 자장을 가리킨다는
해석도 조심스럽다. 만약 돈황에서 <오대산도>를 그리던 때에 ‘왕자 출신
의 자장이 당의 오대산에 올랐다’는 이야기가 유포되었다면, 이는 신라에
서 만들어진 설화가 역수출되었을 가능성도 있는 것 같다.
맺음말
삼국유사의 사료적 가치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뒤로 삼국유사
의 모든 기록들이 역사학자의 의심의 눈초리를 피할 수 없게 되면서 삼
국유사에 의지하던 신라 불교사 연구는 험난하기만 하다. 그 가운데서도
신라 오대산신앙은 정치사적 의미나 불교사적 의미나 어느 것 하나 명확
하게 설명하기가 어렵다. 삼국유사만으로는 설명하기가 어렵다면, 삼
국유사 바깥으로 시선을 돌려보자는 생각에서 본 논문이 시작되었다. 오
대산신앙에 대한 연구 열풍으로 한국 오대산신앙에 대한 다양한 자료들
이 소개되었기 때문에 이들 자료와 삼국유사의 비교 고찰을 통해 오대
산신앙에 대한 논의를 한발 진전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였다.
오대산 관련 기록의 검토는 크게 세 가지 방향으로 진행하였다. 첫째
는 오대산사적과 삼국유사 기록의 비교, 둘째는 금석문 및 문집에 묘
사된 오대산 기록과의 비교, 셋째는 돈황 막고굴 제61굴 <오대산도>에 기
록된 신라왕자에 대한 해석을 시도하였다.
검토의 결과를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삼국유사 오대산 기
록의 원본과 오대산사적의 원본은 모두 8세기 후반 이후에 쓰여졌고,
사학연구 제118호(2015. 6)
226
신라인이 당의 오대산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도 8세기 후반이다. 이후 신
라인들 가운데 당의 오대산을 찾은 이들이 많아졌고, 늦어도 9세기 중반
무렵에는 신라 땅에 오대산이 이식되어 지금의 강원도 오대산이 오대로
불리게 되었다. 해인사 인근에 오대산사라는 이름을 가진 사찰도 등장하
였다. 고려전기에도 오대산신앙은 계속 이어진 것으로 보이지만 흔적이
미미하다. 그러다 13세기 후반~14세기에 이르러 많은 기록이 나오는데,
이는 보살주처신앙의 유행 때문이었다. 삼국유사에 오대산 기록이 많
이 수록된 것도 보살주처신앙의 유행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한편 돈황의 <오대산도> (10세기 무렵)에, 신라왕자 및 신라 사신이
오대산을 다녀갔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 나오는 신라왕자가 慈藏이라
는 견해가 있는데, 최근 중국 오대산신앙의 형성 시기에 대한 연구에 의
하면, 자장이 입당한 때는 오대산 聖山化를 위한 설화도 만들어지기 이전
이고, 오대산 순례를 위한 인프라도 구축되기 이전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삼국유사에서 오대산신앙을 신라에 전한 이가 慈藏이라고 한 것은 설
화적 성격이 강하다. 만약 돈황에서 <오대산도>를 그릴 때 ‘신라왕자 자
장’이 당의 오대산에 왔다는 인식이 있었다면, 이는 당의 오대산 설화를
모티브로 하여 신라에서 만들어진 오대산 관련 설화들이 당으로 전해진
결과이지 않을까 한다.
앞으로 이러한 설화들이 어떠한 배경 속에서 만들어졌는가에 대한 연
구가 필요하다. 또한 한국 오대산신앙에 관한 자료들과 일본, 토번, 서하
등의 오대산신앙 자료들을 비교하는 작업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해서는 후일을 기약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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