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진항 - 반암 - 거진 (박) - 응봉 - 화진포 - 대진항 - 마차진 - 명파해변 (34.6km)
* 해파랑길 48코스, 해파랑길 49코스, 해파랑길 50코스 일부
향로봉이 백두대간 산군들 중에 우뚝,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산 정상에 있는 군사시설까지 뚜렷하게 보였다. 세계에서 가장 좁은 지역에 가장 많은 군인들이 대치하고 있는 DMZ 가까이까지 온 것이다. 군사보호지역인 향로봉은 백두대간길이 진부령에서 막혀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이기에 더 많은 눈길이 갔다. 해파랑길은 남천과 북천 사이에 자리 잡은 휴전선 아래 최북단 고성군청 소재지 간성읍을 먼발치로 바라보면서 지난다. 남천에서 바라보는 간성읍은 평화롭게만 느껴졌고, 그 뒤쪽 향로봉과 그 연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은 구비구비 물결처럼 순하게 이어졌다. 풍경에서는 군사적 긴장감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가끔 만나는 자전거 라이더들이 반갑기도 했다. 남천을 지나자 바다가 나타났고, 내 발길은 자연스레 바다로 향했다.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고, 바다는 눈부시게 푸른 옥빛이었다. 그런데 눈앞에 놀라운 풍경이 나타났다. 백사장위에는 파도에 밀려온 온갖 쓰레기들로 뒤덮여 있었다. 지난 8,9월 한반도를 강타한 태풍이 만들어 놓은 풍경이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 풍경이 지저분하다고 느껴지지 않고 아름답다고 느껴졌다. 백사장위의 쓰레기들은 자연이 만들어 놓은 거대한 예술품 같았다. 마침 반반한 돌이 있어 한참을 앉아 있었다. 마침 모터보트가 물살을 가르며 지나갔다. 어디 남국의 휴양지에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이름 모를 무인도에 온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멀리 북쪽으로 거진항이 보였다. 원시 속에서 문명을 보는 듯했다.
북천 하구를 돌아 북천 철교에 도착했다. 일제 강점기 때 동해북부선이 지나던 철교였는데 625 때 파괴된 후 방치된 것을 자전거, 걷기 전용 다리로 복원하였다. 북천 강둑에는 가을이 완연했다. 눈에 띄는 식물은 돼지감자였다. 벌 밀원으로 조성했나 생각했더니, '외래식물을 퇴치하기 위해 심었으니 캐가지 마십시오'라는 예상 밖 안내문이 꽂혀 있었다. 건강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가끔 뿌리를 캐가는 경우가 있는 것 같았다. 알아보니 생태계 교란종인 돼지풀, 가시박을 제거하고 대체식물로 심은 돼지감자였다. 부근에 듬성듬성 가시박이 기를 못쓰는 것을 보니 생태 파괴자 외래종 가시박도 돼지감자와의 경쟁에서는 이겨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노란 호박꽃도 눈길을 끌었다. 가을 햇살을 듬뿍 받으며 큰 꽃잎을 열고 벌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지금 핀 호박꽃은 곧 추워질 텐데 과연 열매를 제대로 맺을 수 있을까? 지난 무더운 여름 결실을 도와준 벌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꽃을 피우고 꿀을 보시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반암 해수욕장을 지나 거진항에 도착했다. 거진항은 휴전선 아래 최북단 국가지정 항구다. 명태가 많이 잡힐 때는 번창했던 곳이다. 2년 전에 왔을 때 봤던 '고성명태는 행운이다'라는 벽화 글은 '햇살품은 거진항'으로 바뀌어 있었다. 거진에서 해파랑길 트레킹 마지막 밤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6시 되기 전에 길을 나섰다. 거진항에서 화진포까지 이어지는 소나무 산길에서 일출 광경을 바라보면서 걷고 싶었다. 바쁜 걸음으로 거진 해맞이 산림욕장에 올라가니 바다가 잘 보이는 정자가 나타났다. 동쪽 하늘은 붉어오기 시작했다. 마침 안내판이 있어 읽어 보니 바로 눈 아래 바다에 있는 섬은 흰섬이고 일출과 일몰 때는 부처님이 누워있는 와불처럼 보인다고 했다. 정말 그럴까 궁금증을 안고 일출을 기다렸다. 수평선에서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해는 수평선을 벗어나고 바다에 비친 해가 키를 길게 키우더니 흰 섬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어느 순간 흰섬을 밝은 햇살로 감쌌고, 흰섬은 정말 부처님 와불처럼 느껴졌다. 흰섬은 태양이라는 광배에서 오는 따사로운 아침햇살을 받고 평화롭게 누워있는 와불이었다. 햇살이 와불의 하반신을 비추는 것이 아쉬웠다. 일 년 중 10월 중순쯤에는 와불 머리 부근에 햇살이 비출 것 같았다. 그런데 햇빛을 받아 밝아진 흰섬에는 눈을 의심케 하는 구조물이 놓여 있었다. 와불의 머리에 해당하는 곳에 철주가 박혀있고 그위로 다리가 놓여 있었다. 참으로 불경스러운 풍경에 아연실색했다.
다시 숲길로 들어섰다. 숲길은 과거 김일성별장이었던 '화진포의 성'까지 이어진다. 이 길은 세 번째 걷는 길이다. 걸을 때마다 참 기분 좋은 산길이다는 느낌이 들었다. 완만한 능선길에 소나무가 울창하고 오른쪽으로 바다가 얼핏 얼핏 보인다. 해파랑길 강릉 북쪽 구간에서 거의 유일한 산길이다. 바다만 끼고 걷다가 산길로 들어서니 새로운 감흥이 일고, 심신이 힐링되는 것 같았다. 전망 좋은 곳에 정자가 보였다. 여성 세분이 간식을 먹으면서 얘기 중이어서 머뭇거리다가 올랐더니 '어디서 오냐'고 말을 걸어왔다. 그러면서 삶은 고구마, 요구르트와 건과류 그리고 커피까지 나눠줬다. 아침도 거르고 걷는 중이었는데 고맙게도 에너지를 보충했다. 응봉에 올랐더니 화진포 일대가 한눈에 들어왔다. 동해바다, 화진포 해수욕장, 소나무 숲, 화진포 호수. 마치 매가 된 듯한 느낌으로 풍경을 내려다보고 그 아름다운 매력에 빠져 들었다. 대중가요 '화진포에서 맺은 사랑'이라는 노래로 먼저 알았던 곳이기에 화진포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는데, 의외로 썰렁하고 쓸쓸했다. 김일성 별장, 이기붕 별장, 이승만 별장 등 과거 최고 권력자들의 별장만 있고 경관 좋은 곳에 흔히 보이는 카페나 숙박시설은 눈에 띄지 않았다. 이런 점이 화진포의 매력인지도 모르겠다. 이에 비해 초도에는 민박집도 있고, 음식점도 있고, 심지어 나이트클럽 간판도 보였다. 초도가 화진포의 배후 마을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대진항을 지나고 마차진해수욕장을 지나니 통일전망대 출입신고소가 나타났다. 대형 주차장에는 버스 몇 대만 주차해 있었고, 출입신고 수속을 기다리는 사람들도 얼마 되지 않았다. 여기도 코로나 19의 여파가 강하게 미치고 있었다. 마른오징어 등 토산품을 팔던 도로변 가게들은 장사를 중단한 듯 비어 있었다. 오가는 차량도 드물고 인적도 끊긴 도로를 얼마간 걸어가니 산길로 접어들었고, '명파 해변 2.8km' 해파랑길 안내판이 나타났다. 목적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 명파 해변은 어떤 모습일까. 이름만큼이나 아름다울까. 다 왔다는 안도감보다 궁금함이 먼저 일었다. 그리고 마지막 여정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걷고 싶었다. 수양버들이 연녹색 잎을 티우는 3월 초봄에 시작해서 수목이 짙은 푸른색으로 변한 9월 초가을에 끝나게 된다. 내 인생에 이렇게 긴 여정이 있었던가. 계획을 세우고, 트레킹 하고, 그것을 글로 표현하면서 바쁘게 그리고 즐겁게 보냈다. 갑자기 찾아온 코로나19 때문에 시작한 국내여행이었지만, 나에게 선물 같은 소중한 경험이 되었다.
산길은 어느덧 소나무 숲에서 활엽수 숲으로 바뀌어 있었다. 때죽나무, 산벚나무, 신갈나무 등등 수종도 다양하게 어우러진 풍성한 숲이었다. 강릉에서부터 소나무 일색인 숲만 봐오다가 활엽수 숲을 만나니 신기하기도 했고 반가웠다. 나는 침엽수 숲보다 활엽수 숲에서 더 편안함을 느끼는 것 같다. 서로 어깨동무하듯 가지를 뻗어 만든 활엽수 숲 천정은 아늑하고 보호받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각자 하늘 향해 쭉쭉 뻗어 있는 침엽수림에 들어가면 왠지 모를 두려움이 느껴진다. 더 이상 걸어갈 수 없는 마지막 목적지 명파. 침엽수 숲길이 아니라 활엽수 숲길을 걸어가게 된다는 것은 무슨 조화인가 싶었다.
드디어 명파해변에 도착했다. 텅 비어 있었다. 녹슨 철조망이 이중삼중으로 처져 있고, 파도에 떠밀려 온 부유물들이 가득 엉켜 있었다. 와중에 어디서나 잘 자라는 달개비가 바다를 닮은 짙은 남빛 꽃을 피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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