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해파랑길

해파랑길 21. 관동제일루 죽서루

맹방 - 삼척 문화예술회관 - 죽서루 - 삼척 장미공원 - 삼척항 -솔향기 전망대 -삼척해수욕장 - 추암 (22.9km)
* 해파랑길 32코스, 오랍드리길, 이사부길

 

 

삼척시에 도착했다. 제일 먼저 눈을 사로잡은 것은 거대한 시멘트 공장과 운송 구조물이었다. 꼭 이상한 나라 놀이공원 워터 슬라이딩 같기도 했고, 별난 취미를 가진 성주의 괴상한 성 같기도 했다. 육칠십 년, 화려한 개발연대를 이끌었던 산업의 주역이 시멘트 산업이었고, 그 중심에 삼척이 있었다. 시대가 바뀐 요즘에도 지난 공로와 가치는 평가절하되지 않을 것이다. 해파랑길은 오십천변을 따라 이어져 있었다. 그 길은 '오랍드리 산소길'이란 이름으로 조성되어 관리되고 있었다. '오랍드리'란 집 주변의 길이란 강원도 사투리란다. 제주의 올레길과 비슷한 길이다. 붉은색 아스콘이 깔려 있고, 많은 시민들도 산책을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삼척 구간을 걸으면서 여행자를 배려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었는데, 삼척시내에 들어오니 영 달라졌다. 시민이 많이 이용하는 곳에 역량을 집중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일 것이다. 나에게 삼척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죽서루와 오십천이다. 죽서루는 오십천변 절벽 석회암 바위 위에 자리 잡고 있다. 관동팔경 중 유일하게 국가 문화재로 지정돼 있으며, 관동제일루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정면은 7칸이고 측면은 2칸, 2층 팔작지붕 건물이다. 1층 기둥은 17개. 홀 수인 것도 특이한데 기둥의 길이가 다 다르다. 기반인 석회암 바위의 생김새를 그대로 살려 기둥을 세웠기 때문이다.

죽서루 안에는 정철, 허목 등 명문장가와 명필들의 시와 편액이 걸려 있고, 숙종과 정조의 어제시도 걸려 있다.

이곳에 올 수 없었던 정조는 김홍도에게 그림을 그려 올리도록 하고 그 그림을 보고 시를 지었다고 한다.

 

일렁이는 바다에는 갈매기 나네

죽서의 태수는 뉘련가

배 위에 가득 찬 여인들과 밤새워 노니네

 

정조는 그림을 보고 죽서루가 바닷가에 있는 것으로 착각한 것 같다.

 

오십천은 백병산에서 발원하여 미인폭포를 만나고, 한국의 그랜드 캐년이라 불리는 통리협곡을 빠져나와 구불구불 석회암지대를 지나 삼척으로 흐른다. 오십 번이나 구비구비 굽어 흐른다고 오십천이라고 부른다고 하는데, 어느 지질학 책에서는 통리협곡 골 사이를 흐르는 '새내'의 강원도 사투리 '시내'가 신내, 쉰내로 되었다가 '오십천'으로 한자음화 되었다고 한다. 어쨌든 삼척은 우리나라 대표적 석회암지대이며, 동굴 계곡 폭포 등 볼만한 자연경관을 많이 지닌 복 받은 곳이다. 

 

점심때쯤 삼척항에 도착했다. 마침 곰치국 집이 보여 들어갔다. 동해의 명물 곰치국을 먹어보지 않고 해파랑길을 완주했다고 할 수야 없지. 그런데 주인 양반께서 오늘은 곰치국은 안되고, 대구국만 된다고 했다. 실망스럽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대구국을 시켰다. 가끔 먹던 맑은 대구지리와는 다르게 발갛고 약간 매운맛이었지만 먹을만했다. 그런데 양은 너무 많아 내가 다 먹기엔 버거웠다. 비는 완전히 그쳤고, 파란 하늘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공기도 상쾌해져 걷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삼척항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언덕길 마을로 들어섰다. 솔향기전망대가 나타나고, 카페도 나타나고, 예쁘게 단장한 갤러리도 있었다. 담장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고, 알록달록 색칠을 한 지붕도 예뼜다. 텃밭에는 할머니가 쪼그리고 앉아 밭일을 하고 계셨다. 고구마 고추 도라지 참깨 들깨... 도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자급형 도시 농업의 모습이었다. 광진산 봉수대로 가는 길로 들어섰다. 봉수대는 망가지고 돌무더기만 남아있었고, '국난극복 유적지'라는 좀 생뚱맞은 비가 세워져 있었다. 

 

해안길에는 '이사부길'이라는 안내판이 세워 저 있었다. '독도는 우리 땅' 노래 가사에 나오는 신라장군 이사부다. 지금으로부터 1500년 전, 이사부 장군이 북진하여 신라 영토를 북쪽으로 넓히고 지금의 울릉도인 우산국까지 점령한 그 길인가. 소백산맥 동남부 성읍국가로 출발한 신라는 진한의 맹주였지만 백제 가야와 끊임없이 영토 전쟁을 치러야 했고, 왜의 침입도 빈번하게 받아한 때는 경주가 포위당하기도 했었다. 삼척 땅은 고구려와 땅을 뺏기고 빼앗은 곳이기도 했다. 풍전등화와 같은 국가 존망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던 신라는 백제 고구려보다 한참 늦은 6세기 초에 비로소 왕권을 강화하고 고대국가로서 면모를 갖추었다. 그리고 영토 확장 전쟁에 나서게 되는데, 그 중심에 이사부 장군이 있었을 것이다. 이사부장군의 북진 영토확장은 삼국 통일을 이루는 첫 발걸음이지는 않았을까.  

 

비치 조각공원에 도착하니 동해에서 잡히는 바다 물고기 돌 조각품이 전시되어 있었고, 삼척해수욕장은 성수기가 임박했음에도 썰렁했다. 백사장을 청소하고, 시설물을 보수하고, 안전요원을 배치하고, 코로나 19 예방을 위한 안내 배너판을 설치하는 등 개장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한 것 같았는데, 피서객은 눈에 띄지 않았다. 아르바이트 대학생들만 무료함을 달래려는 듯 노트북만 뚫어 저라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옆 길거리 그리고 맞은편 카페와 음식점에는 사람들로 제법 붐볐다. '위드코르나19' 시대에 나타난 기이한 현상이 아닌가 싶었다. 발열체크를 해야 하고, 방문객 기록을 해야 하고, 거리두기를 해야 하는 등 방역수칙을 준수해야 하는 귀찮음 때문에 사람들은 해수욕장 입장을 기피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