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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파랑길

해파랑길 23. 금진 해수욕장에서 본 정동진 해안단구

묵호 - 대진 - 망상 오토캠핑장 - 옥계해수욕장 - 금진해수욕장 - 심곡항 - 정동진 (23.5km)
* 해파랑길 34코스, 해파랑길 35코스, 바우길 9구간

 

 

'서울 남대문의 정동방은 이곳 까막바위입니다'

'서울 경복궁의 정동방은 이곳 대진마을입니다'

서울의 중심부와 위도상으로 같은 위치에 있다는 표지석이 잇달아 세워져 있었다.  두 곳 모두 1999년 10월 26일 국립지리원 공인을 받았다고 표시돼 있었다. 서울 광화문의 정동 쪽은 강릉 정동진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실제로는 동해시 대진항이라는 주장이었다. 1994년 TV 드라마 '모래시계'로 정동진이 알려지고, 일출 명소로 각광을 받고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관광객이 몰려오는 관광명소로 유명해지자 실제 정동방에 있는 대진에서는 억울했던 것 같았다. 대진항과 정동진은 거리상으로 많이 떨어져 있다. 둘 다 정동진으로 부를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는 아니다. 조선시대에 한양의 광화문 정 동쪽에 있다고 해서 정동진이라고 부르게 됐다고 하는데, 실제로 정동진은 서울의 북한산과 같은 위도에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미 정동진에는 역사가 있고 수많은 스토리가 쌓여 있기에 그 이미지가 바뀌지 않을 것 같다.

 

작은 어촌마을과 해수욕장을 지나 망상해수욕장에 도착했다. 명사십리 해수욕장으로 유명한 곳이며, 장애인 어르신 영유아 등 가족단위로 즐길 수 있는 열린 해수욕장으로 알려진 곳이다. 소나무 숲을 지나자 넓고 긴 백사장이 펼쳐져 있고 동해 푸른 바다가 시원하게 눈 앞에 나타났다. 다른 해수욕장은 한적했었는데, 이곳에는 안내 요원도 몇 명이나 배치돼 있고 피서객들도 제법 붐볐다. 숲 속에는 텐트촌이 형성돼 있었고, 가족단위로 캠핑을 즐기고 있었다. 오토캠핑장으로 특화된 곳이었다. 편의점이 3곳이나 있고, 패스트푸드점도 있고, 전기차 충전소도 갖춰져 있었다. 나에게는 낯 선 광경이었지만 가족단위 텐트 캠핑은 새로운 휴가문화로 자리 잡고 있었다. 배낭을 메고 혼자서 걷는 내 모습은 이방인처럼 느껴졌다.

 

망상해수욕장에서 점심식사를 할 요량이었는데, 마음에 드는 음식점도 없었고 분위기도 맞지 않아 해수욕장을 빠져나왔다. 망상해수욕장 주변은 차 없이 걸어 다니기에는 불편한 곳이었다. 백사장이 십리인 만큼 해수욕장을 벗어나는데도 시간이 많이 걸렸고, 지치고 힘들었다. 그리고 보행자라면 누구나 피하고 싶은 찻길이 계속 이어졌다. 그나마 맑은 날씨에 툭트인 동해안 전망은 위로가 되었다. 혹시나 점심을 먹을만한 곳이 있을까 두리번거리며 걸어도 눈에 잡히는 음식점은 없었다. 그렇게 2시간 이상을 걸어 옥계해수욕장에 도착했다. 해수욕장은 썰렁했고, 주변에 음식점도 편의시설도 눈에 띄지 않았다. 이미 점심시간도 지났다. 오늘은 어쩌면 점심 겸 저녁을 먹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걷는데, 뜻밖에 숲 속에 한식 뷔페집이 나타났다. 이건 행운이었다. 만약 숲 속 길이 아닌 도로 쪽으로 걸었다면 영락없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손님들은 작업복 차림의 근로자였고, 분위기는 건설현장 함바집 같았다. 여사장에게  '참 어렵게 식당 찾았습니다' 했더니 '여기 놓쳤더라면 1시간은 더 가야 될 걸요'라고 했다. 음식도 집밥처럼 입에 맞았다. 막걸리를 팔지 않는 것이 아쉬웠지만, 믹스커피까지 마시는 여유를 부렸다. 

  

강릉바우길 안내 표지석이 나타났다. 반가웠다. 옥계부터 해파랑길은 강릉 바우길과 함께 이어졌다. 강릉바우길에 대한 좋은 추억이 많다. 선자령풍차길도 아름다웠고, 대관령 옛길도 풍치가 있었으며, 특히 짙은 해무에 잠긴 어명 받은 소나무길은 몽환적이었다. 좋은 추억 때문인지 발걸음도 가벼워졌고, 주변 풍경도 달라진 듯했다. 며칠 동안 비 오고 흐렸던 날씨가 쾌청한 날씨로 바뀐 것도 한 몫했을 것이다. 금진해수욕장에 도착하니 생맥주를 파는 카페가 눈에 들어왔다. 낯선 곳에서 친한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웠다. 생맥주 1잔을 시켰더니 나초 안주를 서비스로 내놓았다. 카페 안에는 젊은 선남선녀들의 자유분방함이 눈길을 끌었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핫하게 유행하는 서핑을  즐기기 위해 모인 젊은이들이었다. 카페에서 바라보는 동해바다는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맑은 하늘, 푸른 바다, 하얀 파도, 흰 백사장 그리고 서핑하는 젊은이들. 여느 유명 휴양지에 온 듯했다. 한참 동안 트래커가 아니라 휴양객처럼 풍경에 빠져 있었다. 북쪽 정동진 방향으로 특이한 지형이 눈길을 끌었다. 산자락을 따라 완만하게 내려오는 산 능선이 몇 개 산봉우리를 만들더니 거의 수평에 가까울 정도로 평탄하게 해안 절벽까지 이어졌다. 지형학 용어로 해안단구라고 하는 지형으로, 먼 옛날 바닷물에 깎기고 깎여 평탄해진 땅이 융기하여 형성된 곳이다. 참 보기 드문 특별한 지형으로 지질학적으로 가치가 크다고 한다. 수평의 육지는 수평의 바다와 어우러져 색다른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마치 바다를 향해 막 출발을 준비하고 있는 거대한 항공모함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바닷 쪽 해안단구 위에는 눈에 띄게 큰 사각의 건축 구조물 구축돼 있었다. 마치 거대한 검정색 큐빅을 올려 놓은 듯 했다. 일출 명소로 유명한 정동진을 찾아오는 관광객을 위해 지어진 건축물 같았다.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느릿한 해안단구의 끝자락에 위치한 모난 사각의 검정색 건물, 주변의 자연환경과 어울리지 않았고 눈길을 피하고 싶었다. 좀 경관 친화적으로 지을 수는 없었을까. 수천만 년 세월, 바닷물이 깎고 비와 바람이 다듬은 위대한 자연 유산이 이 시대에 와서 훼손되었다는 것에 화가 났다. 그래도 건물의 색이 눈에 확 띄는 강렬한 유채색이 아닌 것만은 그나마 다행이다 싶었다.

 

강릉 헌화로를 따라 심곡항에 도착했다. 여기도 수로부인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지는 모양이다. 가파른 나무계단을 올라가니 헌화정이 깎아지른 절벽 위 소나무 숲 속에 세워져 있었다. 아담한 심곡항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고, 동해바다는 하늘과 맞닿는 수평선까지 펼쳐져 있었다. 다시 심곡마을로 내려와 건너편 산길로 접어들었다. 마치 동네 뒷산 숲 속 오솔길로 올라가는 느낌이었다. 물소리 새소리에 귀가 즐거웠고, 언뜻 햇볕이 드는 길가에는 솔파랭이가 어린애 같이 해맑은 얼굴로 방긋 웃고 있었다. 이런 산길을 십 분쯤 올라가니 평탄한 지대가 나타났다. 대관령 같은 고위 평탄면이 아니라 저위 평탄면이었다. 금진해수욕장에 본 정동진 해안단구 위에 올라 선 것이었다. 넓은 평지는 다 밭이었다. 아마 물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논으로 활용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밭에는 감자가 따가운 햇살 속에서 알감자 키우기에 여념이 없어 보였다.

 

정동진은 유명세만큼이나 특별하지는 않았다. 백사장이 넓은 것도 아니고, 풍경이 멋진 것도 아니고, 해변에 멋진 소나무 숲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크루즈 리조트, 모래시계 공원, 열차 박물관, 레일 바이크 등등. 오히려 산만하다는 느낌이 먼저 들었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이유는 TV 드라마의 영향이 클 것이고, 그 후 많은 콘텐츠가 쌓였기 때문일 거다. 유명세가 있는 곳을 일부러 찾는 성향은 아닌 나에게도 정동진은 언젠가 가 봐야 할 곳으로 마음속에 담겨 있었었다. 다음날 새벽 5시에 일어났다. 일출광경을 보기 위해서였다. 벌써 젊은이들이 연인끼리 혹은 친구들끼리 해변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제법 찬 기운이 느껴지는 새벽이라 모포를 감고 있는 커플도 있었다. 다행히 하늘은 옅은 구름만 약간 끼어 있었다. 어쩌면 멋있는 일출광경을 볼 수 있겠다는 기대감도 생겼다. 회청색 하늘이 점점 붉어지더니 아침해가 수평선 위로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온전한 형태의 일출이었다. 지금까지 봐온 일출 중에서 가장 완벽한 형태의 일출이었다. 운 좋게도 소 혀처럼 드리워진, 오메가 일출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