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목해변 - 경포호 - 교문암 - 주문진 (박) (25.1km)
* 해파랑길 39코스, 해파랑길 40코스 일부, 바우길 5구간, 바우길 12구간
느지막한 오후에 안목해변, 강릉항에 도착했다. 미리 예약해둔 게스트하우스는 바로 강릉항 앞에 있었다. 1층은 식당, 2층은 게스트하우스로 운영하고 있었다. 젊은 사장 부부는 주방일 하랴, 서빙하랴 경황이 없었다. 내가 묵을 방은 바다가 잘 보이는 2인실이었는데, 손님이 없는 탓인지 운이 좋은 탓인지 혼자 쓰게 되었다. 지하 1층에 있는 공용 샤워실에서 몸을 씻고 잠시 휴식을 취한 후에, 1층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산책길에 나섰다. 길에는 의외로 사람들이 많았고, 해변을 따라 카페가 쭉 들어서 있었다. 알고 보니 강릉 안목해변 카페 거리였다. 7년 전에 울릉도행 배를 타기 위해 아내와 함께 와 본 적이 있고 말로는 많이 들었었는데, 이렇게 많은 카페가 있을 줄 몰랐다. 이색적인 풍경이었다. 전망 좋은 창가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여유를 즐기는 선남선녀들의 모습이 아름답고 생경스러웠다. 선뜻 카페 문을 열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결국 방파제 길로 접어들었다. 강릉항 방파제는 특별했다. 보통 방파제에 비해 높고 넓고 길었고, 바다로 뻗은 넓은 산책로 같았다. 방파제 끝자락 등대까지는 한참을 걸어야 했다. 유모차를 끄는 젊은 부부, 뜀박질을 하는 아빠와 아들, 멋진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는 커플, 밤낚시를 가는 아저씨... 많은 사람들이 방파제 위를 오가고 있었다. 그날따라 노을도 특별했다. 적당하게 구름이 낀 하늘이 서서히 물들기 시작하더니 붉은색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온 천지에 비현실적인 광경이 펼쳐졌다. 하늘뿐만 아니라 바다까지 검붉은 색으로 일순간 물들었다. 마치 환타지 만화영화 속 한 장면 속에 서있는 것 같았다. 방파제에서 보는 안목해수욕장과 카페거리도 특별했다. 그리고 방파제 끝에서 보는 강릉항의 야경도 일품이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게스트하우스를 나왔다. 거리에는 어젯밤 유흥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조금 지나면 말끔히 치워질 것이다. 해파랑길을 걸으면서 거리며 백사장이 참 깨끗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그 지역에 사시는 어르신들의 노력 덕분이었다. 아침나절 연세 드신 어르신들이 유니폼 조끼를 입고 청소하는 모습을 보기도 하고, 청소를 끝내고 정자 그늘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광경도 곳곳에서 목격했다. 어르신들에게 거리청소는 봉사활동이면서, 용돈벌이이며, 무료한 하루를 보내는 소일거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뜻한 아침바다 기운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걷다 보니 딴봉마을 산책로에 접어들었다. 산책로는 넓은 소나무 숲 속에 미로처럼 조성돼 있었다. 부지런한 강릉 시민들이 운동삼아 걷기도 하고, 운동기구에서 몸을 풀고 있었다. 딴봉 소나무 숲은 동해안에서 만난 소나무숲 중에서 가장 넓은 것 같았다. 이렇게 넓은 소나무 숲이 훼손, 개발되지 않고 보존되어 있다는 것이 고마웠다. '솔향 강릉' 슬로건의 진정성이 느껴졌다. '시민과 관광객이 함께 즐기고 누릴 수 있는 다시 찾고, 다시 걷고 싶은 웰빙 공간으로 가꾸고 보존해 나가겠다'는 산책로 안내판의 약속도 고마웠다.
경포호수에 도착했다. 호수는 잔잔하고 넓었다. 호수 둘레길은 4.3km, 십리가 넘었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사람들이 꽤 많았다. 걷는 사람, 뛰는 사람, 자전거를 타는 사람.... 긴 원피스 자락을 바람에 날리며 전동 킥보드를 타는 소녀의 뒷모습도 눈길을 끌었다. 가까운 곳에 이렇게 넓고 아름다운 호수가 있다는 것은 행운일 것이다. 그런데 경포호수의 남쪽 쉼터에서 바라본 광경에서 묘한 감정이 일었다. 경포의 시그니쳐는 이미 경포대가 아니었다. 동쪽 경포 해수욕장과 호수의 경계에 우뚝 솟아 있는 호텔이었다. 특히 아침나절 경포호수에 호텔 그림자가 비친 데칼코마니 풍경은 인상적이었다. 실제 모습보다 사진으로 찍힌 풍경이 더 강렬했다. 이에 비해 경포대는 북쪽 숲 속에 숨어 눈에 잘 띄지도 않았다. 오히려 주변의 흰색의 건물들만 강렬하게 눈에 띄었다. 언젠가 오스트리아 여행 갔을 때 본 볼프강 호수의 멋진 풍경이 떠 올랐다. 차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마을의 지붕들은 대부분 붉은색이었는데, 볼프강 호수변의 집들의 지붕은 대부분 검은회색 톤이었다. 아름다운 호수의 경관을 해치지 않기 위해 강렬한 붉은색을 피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었다. 언덕 위 소나무 숲 속에 자리한 경포대는 기품 있는 선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두르지 않고 자연과 일체가 되어 풍류를 즐기는 옛 선비들의 미적 감각은 요즘과는 분명 달랐을 것이다.
해안을 따라 올라가는 길은 편안했다. 길은 평탄했고, 시원한 바닷바람은 더위를 잊게 했고, 군데군데 소나무 숲길은 지친 마음에 위로가 되어 주었다. 나무 한 그루 없는 들판길 퇴약볕 아래서 거의 열사병 직전까지 갔던 어제에 비하면 훨씬 수월했고, 마음의 여유도 생겼다. 점심시간에 맞춰 동해안의 명물 물회를 맛있게 먹었고, 카페에 들려 생맥주도 한잔하는 여유를 즐겼다.
사천진해수욕장 오니 커다란 둥근 바위돌들이 눈길을 끌었다. 교문암이라는 바위다. 지금까지 보아왔던 뽀족하거나 울퉁불퉁한 바위들과는 다른 느낌의 바위였다. 오랜 세월 깎고 잘 다듬어 놓은 것 같았다. 화강암 바위지대에 보이는 핵석이다. 땅속의 용암이 지각변동으로 갈라진 틈새로 스며들었다가 식은 것이 화강암이다. 울진과 삼척지역은 바닷속에서 오랫동안 쌓여서 만들어진 석회암지대인 반면 강릉과 속초지역은 화강암 지대이다. 강릉과 속초지역이 울진과 삼척에 비해 해안가들이 너른 것도 기반암의 차이에서 오는 지형적 특징이다. 해수욕장이 많고 너른 것도 이런 지형적 차이에서 기인한다. 인간은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은가 보다. 이곳은 홍길동전의 저자이자 개혁 사상가였던 허균이 태어난 곳이다. 교문암처럼 둥글게 살지 않고 사회 개혁적인 사상을 가진 그는 역모를 꾸몄다는 죄로 능지처참을 당했고 조선왕조가 무너질 때까지 복권되지 못한 불운한 인물이다.
오후 3시쯤 주문진에 도착했다. 좀 이르긴 해도 하루 일정을 접었다. 주문진은 내가 첫 방문하는 곳 같았다. 길 양편으로는 건어물 가게가 쭉 늘어서 있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가게마다 간판에 '이천 광주' '천안 공주' .... 지방명이 붙어 있었다.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기보다 연고지역 방문객을 중점적으로 마케팅하겠다는 전략 같았다. 어시장 회집 골목에도 제법 사람들이 붐볐다. 동해안의 다른 도시에 비해 활기가 넘치는 것 같았다. 강릉까지 고속도로가 뚪히고 KTX가 연결된 후 나타난 현상인가. 숙소를 정한 후 생선구이 전문집에 갔더니 벽에는 온통 방문객들의 낙서 흔적들로 메어져 있었다. 맛있게 저녁을 먹은 후 식혜 한 병을 덤으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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