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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파랑길

해파랑길 25. 굴산사지, 범일국사 그리고 단오제

오독떼기 전수관 - 굴산사지 - 굴산사 당간지주 - 장현저수지 - 모산봉 - 단오공원 - 안목해변 (박) (17.2km)
* 해파랑길 38코스, 바우길 6구간

 

 

강릉이라 경포대는 관동팔경 제일일세

머리좋고 실한 처녀 줄뽕낭게 걸어앉네

아침이슬 만난 동무 서경천에 일별일세

강릉이라 남대천에 빨래방치 둥실떳네

 

학산오독떼기전수관에 도착했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오독떼기 가사가 새겨진 거대한 자연석 바위가 나를 맞이했다. '오독떼기'가 무슨 말일까 궁금했었는데, 농사지을 때 부르는 농요였다. 농요는 전국 곳곳에 전해지고 있지만 온전하게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흔하지 않다. 학산 오독 떼기는 그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어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오독떼기'라는 말은 해석이 분분한데,  ‘오’는 신성하고 고귀하다는 뜻에서 ‘독떼기’는 들판을 개간한다는 뜻에서 생겼다는 설에 마음이 끌렀다.

 

그 옛날 일족의 무리들이 학산골에 들어왔다. 산세도 좋고 물도 쉼 없이 흘려 사람 살기 좋은 곳이었으나, 들은 돌 투성이어서 농사를 지을 수 없는 황무지였다. 무리들은 황무지에서 초목을 베어내고 돌을 떼어내어 논을 만들었다. 비로소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한 셈이었다. 함께 힘을 모아 피땀 흘려 일궜으니 얼마나 기뼜을까. 그들은 천지신명께 감사 제사를 올리고, 몇 날 며칠 노래 부르고 춤췄을 것이다. 그리고 매년 농사를 지을 때마다 '오독떼기' 노래 부르며 감사하고 풍년을 기원했을 것이다. 

 

학산 오독 떼기 전수관에서 조금 내려가니 굴산사지 부도 길 안내판이 나타났다. 안내판을 따라 들어가니 빛바랜 굴산사지 발굴 학술조사 입간판이 나타났다. 굴산사지? 어디선가 본 듯 한 이름인데 기억은 가물가물했다. 입간판에는 굴산사 연혁과 학술조사 내용이 설명돼 있었다. 굴산사는 통일신라시대 창건되었고 거란 침입 때 소실되어 중창되었다가, 여말선초에 폐사된 절이었다. 길을 따라 들어가니 석천, 학바위, 승탑이 나타났다. 이 모두는 범일국사와 관련된 유적이었다. 

 

학산의 양갓집 규수가 우물에 물을 길으러 갔다. 바가지에 물을 뜨니 해가 담겼다. 처녀는 그 물을 마시고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아비 없는 자식이라고 하여 몰래 뒷산 학바위에 버렸다. 며칠 뒤에 가보니 학이 붉은 구슬을 입에서 내어 먹이면서 돌보고 있었다.

 

범일국사의 탄생설화이다. 석천과 학바위는 탄생설화에 나오는 곳이며, 승탑은 스님의 사리와 유골을 모신 일종의 무덤이다. 도대체 범일국사는 어떤 분일까. 유적지가 있으며 탄생설화까지 전해지는 분이라면 대단한 인물임에는 분명하다. 그런데 나의 무지 탓인지, 처음 듣는 이름이라 당황스러웠다. 

 

범일은 통일신라 시대 이곳 학산에서 태어나 15세에 출가하였고, 당나라에 유학하여 선종을 계승하고 귀국하였다. 당시 신라는 왕실을 중심으로 교종이 득세를 하고 있던 시대였다. 명주 도독이 청하여 굴산사주지로 온 범일은 강릉을 중심으로 영동 지역에 선종을 전파하였고, 신라 말 구산선문의 하나인 사굴산파를 창시하였다. 범일이 영동지역에 선종을 전파할 수 있었던 것은 신라 말의 정치상황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왕족 간의 왕위쟁탈과 귀족들 간의 권력투쟁으로 신라의 국력은 쇠하고 지방호족들이 세력을 넓혀 가던 시기였다. 특히 강릉지역은 왕위쟁탈에서 패한 김주원이 피신해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한 곳이었고, 그의 후손들은 명주 도독이 되어 제후국과 같은 세력을 유지했던 곳이다. 신라의 왕족의 후예였던 범일은 명주 도독의 강력한 후원 아래 교세를 확장하였고, 강릉지역 민중들로부터 추앙받는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 대관령국사성황당 당신화에 의하면 범일국사는 난리통에 산천초목을 군사로 변하게 하여 많은 적군을 물리쳐 강릉을 지켰고, 죽어서 대관령 서낭신이 되었다고 한다.

 

다시 학산들에 들어서니 우뚝 솟은 돌기둥 2개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굴산사 당간지주였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당간지주로 국가보물로 지정돼 있다. 절은 사라졌지만 당간지주는 천년이 흐른 후에도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마치, 잘 자란 벼가 녹색의 바다를 이루고 있는 들판을 지켜주는 수호신 같았다. 너른 학산들은 강릉지역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는데 더없이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 흔적이 굴산사지와 당간지주이며, 그 무형의 유산이 오독떼기가 아닌가 싶다.

 

그 옛날 학산 지역은 지금보다 훨씬 번창했을 것이다. 수많은 스님들이 수도를 했을 것이고, 참배객들이 끊임없이 오갔을 것이며, 사하촌에는 농민 장인 장사꾼들로 매일매일 시끌벅쩍했을 것이다. 절이 사라진 요즘, 학산들은 너무나 호젓했다. 얘기를 걸어 보고 싶어도 사람을 만날 수 없었고, 잠시 쉬어 갈 만한 카페도 눈에 띄지 않았다. 점심때가 훨씬 지나 겨우 식당을 발견하고 허기를 채웠다. 주인이 직접 사육한 염소를 잡아 끊인 염소탕이 나왔는데, 그 맛이 일품이었다.

 

 

논길을 지나고 저수지 둑방을 지나서, 또다시 소나무 숲길로 들어섰다. 소나무 숲은 울창했고 길은 고운 흙길이었다.  산책 삼아, 운동 삼아 나온 주민들도 더러 만났다. 숲은 얼핏 보아도 오래전부터 보호받아 온 듯했다. 작은 언덕 같은 봉오리 몇 개를 지나 모산봉에 도착했다. 정상에는 모산봉 복원비가 세워져 있었다. 모산봉은 영험함이 대관령 동쪽에서 가장 으뜸이라 일찍이 많은 문사를 배출하였는데, 패악한 무리들이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해 깍아내린 것을 강릉을 사랑하는 시민들이 힘을 모아 흙을 올려 복원하였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 모산봉은 높이가 105m밖에 안 되는 낮은 산이지만 강릉의 안산 대접을 받고 있으며, 문필봉이라 불리는 산이다. 정상에는 멋진 소나무가 떡 버티고 있었고, 사방은 온통 소나무 수해였다. 강릉지역에 유난히 소나무가 많은 것은 대관령을 넘어 오는 강풍과 바닷가 해풍을 막기 위함도 있겠지만 높은 대관령에 비해 너무 낮은 마을 앞뒷산을 풍수적으로 보하기 위해 비보림으로 조성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8월의 오후, 뜨거운 아스팔트 길을 따라 수행하듯 걸어 단오공원에 도착했다. 공원은 공연이 끝난 마당처럼 썰렁함마저 느껴졌다. 우선 인근 마트에 들려 생수와 에너지원을 사서 기력을 보충하고 휴식을 취한 뒤, 강릉단오제 홍보전시관에 들렸다. 유네스코 인류 무형문화유산으로 선정된 강릉 단오제. 실제로 체험해보지 못하고, 말로만 들었기에 궁금함과 호기심이 많았었다. 놀란 것은 강릉단오제의 주신이 범일국사라는 것이었다. 신에게 감사하고 제사 지내는 것이 축제의 원형이라고 볼 때, 범일국사는 강릉지역에서 신격화된 영웅이었다. 통일신라시대 역사적 실존 인물이 단오제의 주신으로 추앙받고 있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강릉지역에서 존경받는 인물이었으며 강력한 세력을 갖고 있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강릉의 단오제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어쩌면 통일신라 시대를 훨씬 넘어 선사시대부터 이어저 내려왔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강릉단오제는 우리 민족의 전통 축제 원형을 오늘날까지 충실하게 유지하고 있다. 많았던 전통 축제가 사라지고 지역 홍보성 축제가 판을 치고 있는 세상이 되었다. 이렇듯 시대의 변천에도 불구하고 강릉지역에 전통 축제의 원형이 충실하게 남아있는 이유가 궁금했다.

 

강릉 단오제는 음력 3월 20일부터 제사에 사용될 신주(神酒)를 빚는 데서 시작하여 단오 다음날인 5월 6일의 소제(燒祭)까지 거의 50일이나 걸리는 대대적인 행사이다. 대관령에서 서낭을 모셔와 여 서낭과 합사 제사 지내고, 무당들의 굿판과 관노 가면극이 벌어지고, 그네 씨름 줄다리기 등 민속놀이와 각종 기념행사가 벌어진다. 그야말로 신명 나는 별신굿 한판이 벌어지고, 축제의 한마당이 펼쳐지는 것이다. 한 마디로 감사와 축제의 스펙터클한 놀이판인 것이다. 단언컨대 전시관 구경만으로 단오제를 제대로 느낄 수는 없다. 일본의 마쯔리를 보고 놀라고 부러워했는데, 내년에는 강릉 단오제를 꼭 와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