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대 - 광안리 해수욕장 - 수영 센텀시티 - 동백섬 - 해운대 해수욕장 - 미포 (17.8 km)
* 해파랑길 1코스, 부산갈맷길 2코스
해파랑 트레킹 길에 나섰다. 안해는 코로나19 여파로 어린이집 휴원이 2주 더 연장되어 돌봄 케어가 필요한 손녀를 보기 위해 아들 집으로 가고 나는 부산행 KTX를 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아직 쌀쌀한 아침이지만 햇살에서는 봄기운이 느껴졌고 강변 버드나무는 연노랑 움을 티우기 시작했다. 갑자기 핸드폰으로 '30분 먼저 출발하는 앞 기차로 바꿔 가시겠습니까'라는 연락이 왔다. 옳거니 하고 차표를 변경했다. 역에 도착해서 아침을 해결할 요량으로 일찍 집을 나섰기 때문에 시간상으로 앞 차를 충분히 탈 수 있었다. KTX의 마케팅 전략이겠지만 그 친절함이 놀랍고 고마웠다. 월요일 아침 기차라 지방 근무하는 사람들로 승객이 많을 줄 알았는데, 2자리에 1 사람씩 앉아도 빈자리가 많았다. 아침 9시쯤 김천에 도착했을 땐 손님이 거의 다 내렸고, 두 사람만 남아 종점 부산까지 갔다. 한산한 역 대합실과 광장을 지나 27번 시내버스를 타고 11쯤에 이기대에 도착했다.
오륙도가 눈앞, 지척 거리에 있었다. 먼 옛날 이기대와 연결돼 있던 산능선이 침식과 풍화를 거쳐 섬이 된 듯했다. 바다 한가운데 굳세게 자리 잡고 있을 것으로 상상했는데, 육지와 너무 가까이 붙어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교실 창문 너머로 보였던 오륙도. 새로운 세계로 안내하는 등대처럼 느꼈었다. 질풍노도의 시절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던 섬이었다.
여기는 봄이 빨랐다. 노란 유채꽃이 파란 하늘과 검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멋진 풍경을 만들어 환영했다. 눈 앞에 펼쳐지는 망망 푸른 동해바다 그리고 시원한 바람에 실려오는 갯내음. 온몸의 세포를 깨우고 오감을 활짝 열어 주었다. 해안을 따라 이어진 숲 길은 걷기에 좋았다. 가파른 절벽길을 오르내리기도 하고 구름다리를 건너기도 하고... 봄 바다의 정취를 마음껏 느낄 수 있어 좋았다. 낙엽 활엽수는 아직 잎을 피우기 전인데 군데군데 심심찮게 푸른 상록수가 눈에 띄었다. 땅에 바짝 붙여 있는 푸른 줄기식물은 송악이었고, 싱싱한 푸르름을 뿜어내고 있는 나무는 사스레피나무였다. 중부지방에서는 보기 힘든 낯선 나무들이다. 송악은 고창 선운사 입구 개울가 바위 절벽에 자라는 것을 본 것이 유일했다. 그 나무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기에 매우 귀한 나무로 여겼었는데, 이기대 공원에는 많은 나무가 자생하고 있어 놀랐다. 사스레피나무는 자작나무의 일종인 사스레나무와는 다른 나무로 주로 남부지방에 자란다. 사스레피나무는 이어지는 해파랑길에서 계속 만날 수 있었고 결국 눈에 익은 친숙한 나무가 되었다.
이기대 둘레길이 끝날 무렵, 붉게 꽃 핀 동백나무 너머로 멋진 도시 풍경이 나타났다. 동백섬을 가운데 두고 수영의 빌딩 숲과 해운대의 고층 아파트가 좌우로 펼쳐졌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현대적인 도시 뷰가 아닌가 싶었다. 초 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40여 년 전 고등학교 시절,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았고 일대에서 친구들과 놀았던 추억이 어려있는 곳이다. 그때는 눈에 띄는 건물도 없었다. 광안리 해수욕장 앞바다에서 백합을 캐기도 했고, 보트를 타고 노 저어 나가 담치를 따기도 했었다. 그리고 가끔 월요일 시험이 끝난 후에 남천동 시장 횟집 골목에서 소주를 마시며 시험 스트레스를 풀기도 했었다. 그때 모습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참 많이도 변했다. 해안은 매립되어 고급 아파트촌으로 변해 어디가 어딘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반갑게도 삼익비치아파트만 그 자리에 그 모습 그대로 변함없이 서있었다. 바다를 가로질러 지나고 있는 광안대교에는 갑갑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광안리해수욕장 주변은 엄청 화려하게 변해 있었다. 카페가 들어서고 고급 음식점이 들어서고, 새로운 건물 공사가 한참 진행중이었다. 낮에 보는 광안리해수욕장과 밤에 보는 광안리해수욕장은 전혀 다른 모습일 듯했다.
민락동 고층 아파트 단지 앞 수변공원 매립 평탄지에 거대한 바윗덩어리가 앉아 있었다. 조경을 위해 설치한 조각품은 아니었다. 2018년 10월 태풍 콩레이 때 강한 파도에 떠밀려 온 것이란다. 무게가 7.69톤. 자연재해의 무섭고도 대단한 위력이 느껴졌다. 그 바위 그늘에 몇 사람이 모여 한가롭게 놀고 있었다. 그 모습이 아이러니했다.
민락동을 지나 수영천을 따라 걷는 길은 포장도로 옆, 나무데크길이었다. 빠른 걸음으로 걷는 주민, 애완견 개와 함께 산책하는 사람들과 마주치기도 했다. 그런데 이 길은 너무 지루했다. 게다가 코를 자극하는 기분 나쁜 냄새가 수영천에서 올라왔다. 썩 유쾌하지 않은 기분에 걸음도 빨라졌다. 천천히 여유롭게 걸어야겠다는 생각보다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무의식이 작동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그만 길을 놓쳤다. 수영2교를 건너야 하는데 진입로를 놓쳐 수영교까지 가게 되었다. 센텀시티역 앞에서 그 사실을 알고 인터넷 지도를 보며 해운대 방향으로 걸었다. 그 덕분에 센텀시티와 벡스코를 보게 되었다.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리고, 레드카펫에 스타들이 멋진 드레스를 입고 멋진 포즈를 취하는 모습을 영상으로만 봐왔던 곳인데, 썰렁했다. 삭막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유명 배우들의 핸드프린팅, 유명 영화 포스터, 스파이더맨 슈퍼맨 등 유명 영화 캐릭터가 설치돼 있는 해운대 영화인의 거리를 지나 동백섬으로 들어갔다. 붉고 흰 동백꽃이 뚝뚝 떨어진 산책로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해운대는 추억이 많이 어린 곳이다. 젊은 시절 친구들과 놀 다가 통금시간을 넘겨 바다파출소에서 밤을 새운 적도 있으며, 바캉스 성수기에 해운대 해수욕장에 왔다가 인파 속에 아들을 잃어버릴 뻔한 아찔한 기억도 있다. 영화 해운대의 촬영지였던 미포는 할 일 없이 놀던 곳이기도 하다. 이젠 그때의 정겹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복합리조트 L시티가 해운대의 새로운 랜드마크로서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해파랑길을 걷기로 마음먹은 것은 2월초였다. 에베레스트 트레킹, 남미 파타고니아 트레킹에 이어 올해는 알프스 트레킹을 갈까 생각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닥친 코로나 19 여파로 해외 트레킹을 갈 수 없게 되어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국내 여행을 하기로 마음먹었다.해파랑길 770km. 매달 3박 4일로 약 100km 정도를 걸어 7개월 후에 끝내는 것으로 일정을 잡았다. 갑자기 결정한 것이기에 치밀한 계획을 세우지는 못했다. 그냥 내가 아는 상식 수준의 정보에 의존하여 걷고, 문제가 생기면 그때그때 해결하기로 했다. 해외가 아니라 국내 여행이기에 가능했고, 국내 여행의 장점 같기도 했다. 그리고 혼자서 트레킹 하기로 했다. 준비가 부족한 상태에서 동반자와 함께 가기가 부담스러웠고, 코로나19시대 더불어 여행 가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작년 영남 알프스 종주를 같이 한 후 종종 함께 산행을 하던 여성 산 동무가 같이 가겠다는 의사를 표했지만 정중하게 거절했다.
'해파랑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해파랑길 13. 영덕 블루로드, 생태와 신재생의 길 (0) | 2020.10.31 |
---|---|
목 차 (0) | 2020.10.21 |
해파랑길3. 소설 갯마을 무대 일광 (0) | 2020.10.21 |
해파랑길4. 진하해수욕장, 1972년 여름 (0) | 2020.10.21 |
해파랑길5. 프랜드리한 울산 태화강 (0) | 2020.10.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