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광해수욕장 - (노선버스) - 월내 - 서생 - 간절곶 - 진하해수욕장(박) (17.0km)
* 해파랑길 4코스
일광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노선버스를 타고 다시 월내로 왔다. 버스 안에는 통학하는 학생들과 일터로 가는 사람들로 거의 만차였다. 배낭을 멘 내 모습에 좀 민망한 느낌이 들었다. 마트에 들려 아침식사용으로 간편식과 과일을 산 후, 해파랑길 리본을 찾아 본격적인 트레킹에 나섰다. 해안은 고리 원자력발전소가 차지하고 있어 갈 수 없고, 차량통행이 많은 도로로 해파랑길은 이어졌다. 부산광역시와 울산광역시 경계를 지났다. 고리원자력발전소는 부산의 기장과 울산의 서생 사이 걸쳐 있었다. 그런데 얼마 가지 못해 길을 놓치고 말았다. 그런 줄도 모르고 한참을 가다가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어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봉태산 가는 샛길을 지나치고 말았다. 되돌아 갈 수도 없고, 그냥 계속 갔다. 신고리원전교차로에서 왼편으로 돌아 해파랑길과 다시 만났다.
논밭이 나타났다. 들 가운데 마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을 사이에 논밭이 있는 전형적인 도시근교 농촌 풍경이었다. 논에는 물이 채워져 있고, 밭은 반듯하게 이랑이 만들어져 있었다. 새봄을 맞아 한 해 농사를 시작하려는 농부의 부지런함이 느껴졌다. 제법 외양 멋을 낸 음식점을 뒷길을 돌아가니 하얀 꽃잎을 막 터트리기 시작한 배밭도 나타났다. 이런 농촌 풍경은 해파랑길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바다 풍경만 쭉 보다가 농촌 풍경을 접하니 반갑고, 색다른 감흥이 일었다. 서생 바닷가로 들어가는 길에는 많은 차량이 주차를 하고 있고, 대형 트럭들의 왕래가 잦았다. 신고리 원자력발전소 공사 작업차량들 같았다. 서생은 신고리원자력발전소의 배후 도시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다시 해안길로 들어서니 작은 포구 마을이 나타나고, 전망 좋은 바닷가에는 카페와 풀빌라가 자리 잡고 있었다. 가까운 곳에 신년 해맞이로 유명한 간절곶이 있기에 찾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았다. 폭격을 맞은 것처럼 벽채만 앙상하게 남아있는 건물들도 군데군데 보였다. 물고기 양식장을 하다 채산성이 맞지 않아 부도나고 버려진 것 같았다. 수산업 생산사업은 쇠하고 일부 관광서비스 산업만 호황을 누리는 것 같았다.
간절곶에 12시 넘어 도착했다. 먼바다에서 바라보면 간짓대처럼 보인다 해서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정동진, 호미곶과 함께 동해안의 대표적인 일출 명소로 전국에서 가장 먼저 해돋이를 감상할 수 있다고 한다.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큰 우체통이었다. '간절곶 소망우체통'. 마지막으로 편지를 써서 부쳐본 것이 언제였던가. 기억조차 가물했다.
전망 좋은 해안가 벤치에서 한참을 앉아 있었다. 무거운 신발도 벗고 양말도 벗어, 걷느라 애쓴 발에게도 자유를 줬다. 오늘 마지막 종착지 진하해수욕장은 얼마 남지 않았다. 진하해수욕장은 내 삶에 너무나 의미 있는 장소이다. 1972년 여름, 나는 이곳에서 '농대에 가겠다'고 밝혔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요즘 MT 같은 모임에서였다. 그 당시에는 자연계에서는 공대에 가는 것이 대세였기에 내 말을 들은 선배들과 친구들의 의아해했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그 후 농대를 갔고, 농협에 취직을 했고, 다른 직장으로 이직을 할 기회가 있었지만 마지막 순간에 포기를 했다. 내 삶에서 '농'자는 숙명처럼 붙여 다녔고, '농'자를 뗀다는 것은 이름을 바꾸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농'은 나의 아이덴티티와 가치관의 중심축이 되어 버렸다.
나는 지리산 천왕봉이 보이는 하동에서 쉰둥이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몰락한 양반, 잔반의 후예였다. 이것저것 아시는 것이 많았고, 자존심이 무척 강하셨으며, 족보를 손에서 거의 놓지 않으셨고, 자식 교육에도 관심이 많으셨다. 그렇게 넉넉지 못한 형편에 도회지로 유학을 가게 되었고, 대학까지 나오게 된 것은 아버지의 교육열 덕분인 것 같다. 어릴 적 내 별명은 '띠띠오점'이었다. 내가 받은 시험 점수 '75'를 혀가 짧아 '띠띠오'로 발음한 게 별명이 되었고 친구들로부터 놀림을 무척 많이 받았었다. 자연스레 남들 앞에 나서 말하는 게 두려웠고, 심지어 엄마 심부름으로 이웃집에 가는 것도 피하기 일쑤였다. 이런 내가 집을 떠나 진주, 부산으로 유학을 가게 된 것은 기회였지만 한편 넘어야 하는 큰 산이었다. 특히 친구 하나 없는 부산으로 고등학교를 진학한 것은 엄청난 사건이었고,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게 만들었다. 그럴 즈음 나에게 구세주처럼 나타난 게 '석우'라는 모임이었다. 같은 학년 친구뿐만 아니라 선배도 있었고 후배도 있었으며, 대학에 다니는 선배도 가끔 찾아오기도 했다. 가끔 만나 학업 스트레스를 풀기도 했고, 매년 여름방학 때는 MT를 같이 갔었다. 그러면서 자존감을 되찾아가고, 세상을 알아가게 되었다. 하지만 촌놈이라는 열등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특히 문화적 열등감은 나를 심하게 위축시켰다. 그 돌파구 중 하나가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것이었다. 우연히 소설 상록수의 실존 인물인 최용신의 이야기를 담은 유달영 선생님의 '눈 속에 잎 피는 나무'라는 수필 책을 읽게 되었다. 그 책을 읽은 후, 내가 태어나고 자란 농촌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다. 그리고 농대에 가겠다는 생각도 자연스레 하게 되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낯선 도시가 주는 열등감을 내가 익숙한 농촌에서 극복하고자 했던 일종의 회피 선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찌 됐건 열등감은 나를 키운 원동력이었던 것 같다. 어느 시인은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었다 하고 어느 CEO는 고독이었다고 했는데, 나를 키운 팔 할은 열등감이었다.
진하해수욕장은 낯 설지가 않았다. 주변 환경은 많이 변했지만, 긴 백사장과 앞 바닷속 섬은 추억 속 장면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밤새 주장하고 토론하고 말다툼하다 홀로 찾은 새벽 백사장에서 쓸쓸함을 느꼈던 기억이 떠올랐다. 바다게, 하다못해 바다벌레 한 마리도 눈에 띄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당시 바다는 너무 깨끗해 먹을 것이 없어 바다생물들이 찾아오지 않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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